135화
* * *
록사나가 마차에 올랐다. 그 뒤로 아이린과 아스테리온이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벨루카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훌쩍 자란 벨루카의 모습을 발견한 아스테리온의 두 눈이 확 커졌다.
“내내 잠만 잔다고 하더니 덩치가 커졌군. 언제 깨어난 거지?”
“오늘 아침에요. 정말 늠름해졌죠?”
록사나가 벨루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린과 함께 나란히 자리에 착석했다.
아스테리온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벨루카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잠시 후,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출발했다.
“벨루카, 잘 다녀왔어? 별일은 없었고?”
- 물론이지. 너무 보고 싶었어, 록사나.
“나도 보고 싶었어.”
록사나와 늑대 정령이 서로의 볼을 맞대고 비비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늑대가 말을 하는군.”
아스테리온이 손으로 자신의 왼쪽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렸다.
“벨루카 말이 들려요?”
록사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정말 들리세요, 공작님? 저는 벨루카 님 울음소리밖에 안 들리는데요?”
아이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벨루카에게로 향했다.
“거기 늑대 정령, 록사나에게서 좀 떨어져!”
- 흥, 내 맘이야. 남자 인간, 넌 이런 거 마음대로 못 하지?!
벨루카가 자신의 얼굴을 록사나에게 더욱 바짝 들이밀며 비볐다. 시선은 아스테리온에게 향한 채로 그를 골려 댔다.
“크크큭, 간지러워, 벨루카.”
아스테리온이 벨루카의 목덜미를 낚아챌까 하다가 관두었다. 어린 정령의 도발에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정령의 말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군.”
“정말요? 방금 전 벨루카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볼래요?”
록사나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놀리더군.”
불만이 가득 들어찬 말투였다.
록사나와 아이린이 동시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쩔 수 없이 아스테리온은 벨루카가 말했던 ‘흥, 내 맘이야. 남자 인간, 넌 이런 거 마음대로 못 하지?!’를 그대로 읊어야만 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아스테리온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아스테리온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뭐를요? …설마?! 사양할게요! 꿈도 꾸지 마세요!”
벨루카처럼 볼을 비빌 수 있다는 말임을 눈치챈 록사나가 냉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에 오르려는 열을 식히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스테리온의 커다란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벨루카가 자신의 옆에 놓아 두었던 서신 하나를 록사나에게 건네주었다.
- 자, 여기 있어, 록사나.
그 서신을 막 열어 보려던 록사나의 시선이 이번에는 옆에 있는 아이린에게로 향했다.
아이린은 마차에 오르기 전부터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소란으로 사라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궁금해?”
“두말하면 잔소리죠. 어떻게 되셨어요?”
황태자의 티 파티에서의 일을 묻는 것이었다.
과연 황태자가 투자를 한다고 했을까? 당연히 아이린은 도노반의 투자를 원치 않는 쪽이었다.
“투자자를 한 명 유치했지.”
“네에?!!”
아이린이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몸을 펄떡이며 잔뜩 놀란 얼굴을 했다.
“서, 설마 황태자는 아니죠?”
아이린이 간절한 눈빛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 라는 생각이 소녀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린, 아무리 네가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 제국의 공작 앞에서 황태자를 하대하듯 칭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록사나는 속마음을 이내 삼켰다. 정작 아스테리온이 이런 걸 따지거나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린 역시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아이였다.
록사나가 뜸 들이자, 아이린은 애가 많이 닳았다. 이내 울상이 되었다.
“정말 황태자인 거예요?”
“아니야. 브루노 코니움 후작 영식이야.”
“정말이죠? 아, 정말 다행이에요.”
십년감수한 아이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태자는 예상대로 되었고, 코니움 후작 영식은 의외인데요?”
“너도 그렇지? 나도 그래.”
브루노가 화제에 오르자, 아스테리온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록사나는 티 파티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이린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린은 재미있는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깔깔 웃거나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다.
록사나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한 편의 잘 짜인 희극 같았다.
심혈을 기울여 기획한 4구역 주거 환경 및 거리 정비 사업은 그녀가 수도에서 사활을 거는 일 중 하나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이었다.
“남작님이 모두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코니움 후작 영식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니, 다들 눈이 동태 눈깔인가 봐요.”
아이린의 거친 표현에 아스테리온이 웬일로 기분 좋게 씩 웃었다. 그러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동태 눈깔에 브루노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나 말이야. 난 정말 큰돈 쉽게 벌 기회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거절하느라 정신없었지.”
록사나가 황태자의 두 번째 티타임 초대장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자금이 충분하다는 핑계를 대고 도노반의 투자 제의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 가서 마음을 바꿨다.
거절한다고 도노반이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스스로 확실하게 투자를 포기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사실대로 밝히면 되는 것이다.
마침 도노반 측에서 아벨리오 남작저에 첩자를 심으려는 정황을 사전에 발 빠르게 포착해 냈다.
휴고가 보내 준 고용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꾐에 넘어가는 대신 이러한 사실을 록사나에게 전달했다.
첩자가 생기거나 침투하는 걸 아무리 철저하게 막으려고 해도 어디선가는 반드시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록사나는 이를 역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일부러 몇 명의 첩자를 특별히 선발했다.
당시 상황을 떠올린 그녀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고액의 보수를 제시하니 서로 다들 자신이 첩자를 하겠다고 난리였지.’
도노반이 자신의 첩자로 알고 있는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첩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록사나와 특별히 추가 계약을 맺은 특수 임무 수행자들이었다.
첩자 역할을 맡은, 일명 첩자들은 록사나의 계획에 따라 중요한 서류를 고의적으로 도노반 측에 유출했다.
그저 그런 서류들에 4구역 관련 서류가 끼워져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들이 다소 빠져 있긴 했지만 그 서류에는 거짓이 없었다.
도노반은 처음 서류를 보고 제법 믿을 만한 사업이라고 판단하며 투자를 결심했을 것이다.
해당 서류에 눈에 띄는 수익성이 보이지 않는 점은 첩자가 접근할 수 없는 깊은 곳에 따로 보관되어 있어서 빠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캠든 상단이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고 여겼으리라.
그랬는데 정작 록사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에서 사업을 구상했으며, 실속 없는 핑크빛 미래만을 그렸다.
이후 도노반과 그의 측근들이 실망을 거듭할 때쯤 아스테리온의 등장은 ‘그럼 그렇지!’라는 희망의 불씨를 활활 지폈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 허투루 아무 사업에나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의 몇 마디에 도노반을 위시한 사람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단순히 여자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공작이 투자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굳이 진실에 거짓을 섞을 필요도 없었지.’
진실에서 일부 사실만 뺐을 뿐이었다.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에게 4구역 주거 환경 및 거리 정비 사업에 대한 투자 요청을 처음 제시했을 때 그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아스테리온이 투자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업성과 어마어마한 수익성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아스테리온의 사업적 안목이 록사나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보다 앞섰다.
록사나가 4구역 주거 환경 및 거리 정비 사업과 관련해 제시한 방법은 가히 획기적이었다.
건물을 위아래로 높임으로써 한정된 땅에는 기존보다 많은 집과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사용 가능한 실내 공간이 파격적으로 늘어나면서도 안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해당 사업의 시작을 위해 기존의 땅과 건물들을 확보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 땅과 건물을 팔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매입한다.
그러고 나면 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두 번째, 땅과 건물을 팔기를 원치 않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새집으로 배상한다. 즉 분양을 하는 것이다.
만약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나 새집으로 받겠다고 하는 경우에도 돈을 포기하면 분양을 받을 수 있었다.
미래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분양을 받는 것이 돈으로 받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4구역의 집을 사고자 한다면 원래 받은 돈에다가 더 많은 돈을 보태야 할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땅도 건물도 없고 세를 들어 사는 이들에 대한 경우였다.
이들에게는 주거지가 완성된 후 일정한 규모의 집을 기존의 월세와 비슷한 수준인 저렴한 가격으로 장기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로 했다.
첫 번째 경우를 제외하고 건물이 올라갈 동안 집이 없는 이들은 일정 기간 임시 거처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들은 우선 지원 대상으로 4구역 건설 현장에서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고도 추산한 투자자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손안에 떨어지는 남는 부동산과 창출될 수익이 어마어마했다.
당연하게도 이 내용은 도노반에게 철저하게 공개되지 않은 사항들이었다.
록사나는 황궁으로 향하기 전인 어제 최대 투자자인 아스테리온에게 서신을 하나 보냈었다.
도노반의 티 파티에 예고 없이 찾아와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와서 무엇을 어떻게 언급해야 하는지도 필요한 만큼 자세히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