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옳다구나. 너 오늘 아주 잘 걸렸다. 먼지까지 탈탈 털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록사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열기가 가득 차올랐을 때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진행을 하려고 하는 사업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거리 정비 사업이에요.”
“거리 정비 사업? 그게 뭐죠?”
세르지오가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4구역 거리를 정비하는 사업이에요. 일명 4구역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랍니다!”
도노반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4구역은 평민들 중에서도 가장 못 사는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냄새나고 더러운 그 지역을 무척 싫어했다. 마차로 지나가 보기만 했지 내려서 그 땅에 발을 디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게 돈이 넉넉하다면 예전부터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어요. 그건 바로 평민들이 사는 집이나 거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4구역은 미관상 좀 별로잖아요.”
“그들을 도와줘 봤자 돌아오는 게 없지 않소? 돈만 버리는 일이지. 생각해 보시오. 그들의 집과 거리를 깨끗하게 바꿔 준다고 해도 몸이 더러운데 그 깨끗함이 얼마나 갈지…….”
게르델 백작이 록사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바라보면서 가르치듯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4구역 평민들은 잘 씻을 줄 모르고 배운 것 없이 무식한 자들이었다.
“집이 깨끗해지면 그들도 청결에 신경을 쓰기 시작할 거예요.”
록사나가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벨리오 남작님께서는 그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내 조용히 있던 브루노가 질문을 했다.
“많죠!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서 우선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질 거예요.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수입이 늘면서 생활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그들이 나라에 내는 세금도 증가할 거예요.”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정작 남작님한테는 돈만 나가고 별 이득이 없어 보이는군요.”
“어머, 코니움 영식. 아니에요. 평민들이 잘살게 되면 캠든 상단 물건을 사 줄 거니까 제게도 이득인 거죠.”
“평민들이 얼마나 번다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노반이 코웃음을 쳤다.
록사나의 의견이 허무맹랑하게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세월에 그리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그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였다.
그가 아벨리오 남작저에 심어 놓은 첩자가 전해 온 서류에도 방금 록사나가 언급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사업 관련 문서도 있었지만 현재 귀족들이 선점해서 자리를 잡고 하는 사업들이라 수익성이 없는 것이었다.
혜성처럼 떠오르고 있는 캠든 상단이었다.
그래서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라는 것에 기대를 잔뜩 걸었었다. 뭔가 독특한 방법이 있어서 기획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을 줄이야. 요즘 돈이 좀 잘 벌리는 건 순전히 운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도노반은 캠든 상단에 투자해서 돈을 잔뜩 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이 팍 새 버렸다.
록사나가 도노반의 실망한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첩자가 일을 잘했나 보네.’
이번에는 세르지오가 나서서 그녀를 물어뜯었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이 내는 세금이 더 많습니다, 남작님.”
“지금은 그렇죠. 평민들이 얼마나 버나 하시겠지만 귀족보다 평민의 수가 많아요. 그들이 내는 세금도 귀족들이 내는 세금 못지않아요. 티끌 모아 태산이 될 거예요.”
이어서 부인들까지도 록사나에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한마디씩 건넸다.
하지만 록사나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제가 ‘4구역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대해 카일라니 공작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분도 투자하신다고 하셨어요.”
카일라니 공작이 화제로 등장하자 도노반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동일한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남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무조건 한배를 타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카일라니 공작은 투자의 귀재였기 때문이다.
카일라니 공작은 소공작 시절부터 손대는 사업마다 큰 성과를 거둔 인물이었다.
“그게 정말이오, 남작?”
“사실입니까?”
게르델 백작과 브루노가 동시에 물었다.
“사실입니다.”
대답은 록사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록사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난 공작은 초대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아, 제가 보고 싶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해서 황궁에 온 김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자리 하나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도노반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마지못해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그도 공작의 투자 이유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의 자리는 금방 만들어졌다. 그가 자리에 착석하는 것과 동시에 성격 급한 게르델 백작이 물었다.
“아벨리오 남작의 4구역 주거 환경 정비인가 뭔가 하는 것에 공작님께서 투자를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카일라니 공작님이 투자를 결정하셨다면 수익성이 꽤 높은가 봅니다.”
그를 떠보는 게르델 백작을 보며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백작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검은 속내가 빤히 보였다.
“그럼요, 꽤 되지요. 제가 요즘 전 부인인 남작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거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수도에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꼭꼭 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결혼 생활 중에 마음을 숨겼던 결과가 어땠는지는 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깊은 후회와 절망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으니까.
그래서 어차피 마음을 영영 숨길 수 없다면 과감히 드러내기로 했다.
그의 적들이 록사나를 공격한다면 목숨 걸고 지켜 낼 것이고, 그녀 역시 지금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되찾았다.
‘내가 왜 그녀의 사업에 투자하는지 다들 궁금하긴 하겠지.’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그다음 말을 기다리는 있는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 자리에 큰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가 어떤 이야기하든 투자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다.
“저는 아벨리오 남작이 하는 사업에는 무조건 투자할 겁니다.”
“그 말씀은?”
아스테리온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브루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매서운 기운을 버티는 것이 제법이었다. 그게 아스테리온의 속을 뒤집었다.
그래서 오늘은 도노반보다 코니움 후작 영식이 더 눈에 거슬렸다.
“돈에 먼지만 쌓이게 두는 것보다는 점수를 따는 데 쓰는 것이 경제적이지 않습니까. 코니움 영식은 돈에 먼지 쌓일 틈이 없어서 잘 모를 테지만.”
“그 말씀은 아벨리오 남작님께 점수를 따기 위해 투자를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돈 버는 거야 지금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하는 사업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뭐 하러 더 일을 벌입니까? 그럴수록 몸만 더 힘들고 건강만 해치지.”
“허!”
사람들은 헛숨을 훅 들이켰다. 참으로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어쩌다가 카일라니 공작이 저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카일라니 공작은 사업성 때문에 아벨리오 남작에게 투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작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투자했다는 말이었다.
끝도 없이 쌓여 있는 카일라니 공작가의 재물이 야금야금 바닥을 드러낼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그건 도노반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 여자 하나 잘못 만나서 카일라니 공작가가 패가망신하는 건 한순간이겠어. 이러면 굳이 남작을 방해할 필요가 없지.’
원래는 록사나가 자신의 투자를 거절할 경우 그녀의 사업을 망가뜨릴 생각이 다분했었다.
도노반은 까닥 잘못하다가 거액을 날릴 뻔했다며 몰래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이때 록사나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폭탄을 내던졌다.
“잘 들으셨죠?! 카일라니 공작님이 투자하시는 사업이에요. 정말 믿을 만하죠. 그러니까 여러분, 제 사업에 투자 좀 해 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흠흠, 그게…….”
“요즘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들 록사나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록사나가 아니었다.
“그러시지 마시고요. 제가 알기로는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 재력이 상당하시다고 들었어요.”
록사나가 한 명씩 돌아가며 말을 걸었다. 도노반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히 혹할 만한 옵션도 제시했다.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투자해 주신다면 그 누구보다도 큰 수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아닐세.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나도 요즘 이래저래 묶인 돈이 많아서 여의치가 않아.”
록사나의 끈질김에 도노반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등에서는 진땀이 났다.
그때 브루노의 발언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저는 남작님의 사업에 투자하겠습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스쳤다. 그의 발언이 무척 의외였기 때문이다.
“코니움 영식,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네.”
“그렇소, 신중히 다시 생각해 보시오.”
게르델 백작과 알턴 자작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몇몇은 혹여나 록사나가 들을까 봐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을 건넸다.
“내가 보기엔 수익성이 전혀 없네. 겉만 번지르르하지 평민들에게 퍼 주기만 하는 일이 되고 말 거야.”
“맞습니다.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습니다.”
세르지오는 브루노가 록사나를 사이에 둔 자신의 경쟁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설득에 열심이었다.
“말씀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어찌 아무 위험 부담 없이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위험 부담에 도박을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브루노를 열렬히 뜯어말리는 가운데 황태자의 티 파티 모임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록사나는 그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며칠 내로 아벨리오 남작저에서 투자 유치 사업 설명회를 주최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