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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31)화 (131/214)

131화 

“이번에는 거절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록시 님께서 원치 않으셨던 맞선도 보셨고, 황실 무도회에도 착실히 참석하셨잖아요.”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어서 고민이 되긴 해.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거든. 거기다 티 파티가 당장 내일이야.”

“무슨 그런 몰상식한 다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자기가 황태자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아이린이 용처럼 불을 뿜을 듯이 분개했다.

정말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적어도 2~3일의 시간 간격을 두고 초대가 이루어진다.

록사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자신 앞에서나 저렇게 황태자를 옆집 아무개 부르듯 호칭하며 솔직하게 행동하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는 야무진 아이였다.

“네가 나 대신에 화를 막 내 주니까 내가 열을 낼 일이 줄어들어서 좋구나.”

“아니, 제가 언제 화를 막 냈다고요…….”

자신이 너무 과하게 반응했던 게 아닌가 싶어 민망해진 아이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아이린, 네가 생각하기에 황태자가 뭣 때문에 내게 다시 초대장을 보낸 것 같니?”

“음, 돈 문제 아닐까요? 저는 황태자의 가장 큰 관심이 황좌와 돈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황좌는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요즘 돈에 엄청 쪼들리고 있을 테니까요.”

“오, 우리 아이린 많이 컸네~!”

“헤헤헤. 저야 몸도 머리도 한창 자라나고 있는 시기니까요.”

아이린은 록사나의 칭찬을 통해 자신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맞아. 내 생각에도 돈 문제로 부르는 것 같아. 돈을 직접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짓이니까 분명히 캠든 상단에 투자를 하겠다는 말을 꺼낼 거야.”

“거절하시기 쉽지 않겠어요.”

“맞아. 거절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

두 사람이 동시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록사나에게 손쉬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와 맞먹는 권력자가 그녀를 비호한다면 아무리 도노반이라고 해도 트집은 잡을지언정 눈에 띄는 보복은 하기 어려우리라.

‘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그를 자꾸 이용해 먹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별로야.’

게다가 도노반과 아스테리온은 앙숙 관계였기에 까닥 잘못하다가는 황태자의 반감을 더 살 수도 있었다.

록사나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아스테리온 역시 이 문제로 도노반을 향해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 식대로 스스로 부딪쳐 보지 뭐!’

록사나는 다소 어렵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헤쳐 나가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린,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너무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니까.”

“네.”

두 사람은 다시 서류에 고개를 파묻었다.

* * *

오후에도 록사나와 아이린의 산처럼 쌓인 서류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티타임을 가지려고 할 때였다.

복도가 쿵쿵 울렸다. 누군가 집무실을 향해 다가오는지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내 문이 부서질 것 같은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카일라니 기사단의 마커스입니다.”

“들어오세요, 마커스 경.”

록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커스 경이 집무실로 뛰다시피 걸어 들어왔다.

“독수리 용병대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록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더니 쿠당탕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부딪쳤다.

“검은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자객들로 꽤 실력이 있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카일라니 기사단 일부가 그곳에 파견 근무를 나가 있었던지라 적들을 대부분 금방 사살, 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사망자는 없으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제가 데려왔던 두 사람의 상태는 어때요? 그들도 심각한 상태인가요?”

“그들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만 조금 생채기가 난 정도입니다.”

“다행이에요.”

다리에 힘이 풀린 록사나가 쓰러지려고 하자, 아이린이 그녀를 부축해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록사나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추스를 동안 아이린이 마커스 경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커스 경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을 보며 마커스 경이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현재 부상자들은 독수리 용병대와 저희 쪽이 협력해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도착하자마자 보다 안전한 장소로 거처를 옮겼고, 조사와 전후 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자세한 보고가 전해질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마커스 경, 소식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바쁘실 텐데 이만 가 보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저는 남작님 집무실 문밖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공작님의 명인가요?”

“네, 맞습니다.”

마커스 경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록사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쫙 빠져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마커스 경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부상자들이 있다니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다 싶어.”

“맞아요. 혹시라도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슬퍼요.”

아이린이 얼굴을 몹시 찡그렸다.

독수리 용병대에서 마주친 용병대 사람들과 카일라니 공작가의 기사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이린에게 그들은 크든 작든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아이린, 이제 그만 주물러 줘도 돼. 덕분에 괜찮아졌어. 너도 많이 놀랐을 텐데 좀 쉬어.”

아이린은 록사나의 차가워진 손을 아까부터 열심히 주물러 주고 있었다.

“저야말로 록시 님 손 주무르고 있으니까 조금씩 괜찮아졌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할게요.”

그러고는 록사나가 또 괜찮다고 할까 봐 냉큼 화제를 돌렸다.

“공작님 일 처리가 제법이신 것 같아요.”

아이린은 그 누구보다도 아스테리온에 대한 평가가 박한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달랐다.

“나 지키라고 마커스 경 보내 준 것 때문에 그러는 거 맞지?”

“네.”

아이린의 솔직함에 록사나가 피식 웃었다.

록사나도 사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이 자신을 약하게 보면 괜히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 마음이 은근히 들어서 성질을 내곤 했었다.

지금은 그의 친절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마음이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음,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지? 어린 아들이 자기보다 힘센 엄마를 지켜 주겠다고 나섰을 때 이런 기분이려나.’

록사나의 이런 속마음을 아스테리온이 실제로 알게 되었다면 대성통곡할 만큼 엉뚱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지.’

록사나가 살짝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아이린, 마커스 경을 불러와 줄래?”

“네.”

아이린이 록사나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이내 집무실 밖에 있는 마커스 경을 데리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경에게 부탁을 할 게 있어서요.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현재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독수리 용병대에 지금 현재 필요한 것들이 뭔지 알고 싶어요. 확인해서 제게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람을 시켜서 바로 알아 오겠습니다.”

마커스 경이 자리를 뜨자, 궁금한 게 생겼던 아이린이 록사나에게 질문을 했다.

“마르셀 경에게 시키셔도 되지 않아요?”

“우리 쪽 사람을 움직이면 더 눈에 띌 거야. 그리고 카일라니 기사단이 일을 처리 중이니까 그쪽에 부탁하는 게 더 낫기도 하고.”

“그렇겠네요! 확실히 요즘 수상한 사람들이 저택 주변을 얼쩡거리는 게 늘었으니까요.”

아이린은 록사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자신은 한참 멀었다는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특유의 긍정성으로 열심히 배우자고 각오를 다졌다.

【 그 누구보다도 큰 수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마커스 경이 록사나가 부탁했던 일을 확인해 주었다.

더불어 암살자 침입자 배후자 캐기 진행 상황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카일라니 기사단이 생포된 세 명의 적들이 암살자 길드 ‘붉은 달’이라는 소속임을 알아냈으나 그 배후를 밝히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육망성과의 연결 고리는 찾지 못했다.

로웰 후작이나 제3 세력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독수리 용병대의 본부인 새 발 주점 3층 건물이 통째로 파괴되었다.

해당 건물에서 거주도 병행하고 있었기에 소속 용병들은 임시 거주지로 옮겨졌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새롭게 터를 잡는 것보다는 새 발 주점을 하루빨리 재건할 수 있기를 원했다.

록사나는 독수리 용병대 본부의 재건을 뒤에서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록사나의 부름을 받은 에이글 단장이 비밀리에 남작저를 방문했다.

에이글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렇지만 눈빛만은 맹금류답게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록사나는 먼저 에이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과 함께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정당한 대가를 주고 의뢰를 맡겼지만 이번 공격은 록사나나 아스테리온 쪽과 관련된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록사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고 이 일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록사나 님, 용병들은 의뢰를 받아들일 때 그와 관련해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일을 수락합니다. 형제를 맡은 건 오로지 저희 쪽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게다가 록사나 님과 더 깊은 인연으로 묶이게 된 거 같아 더없이 기쁩니다.”

에이글은 록사나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호감이 더욱 커진 상태였다. 정령사의 기운은 수인족과 잘 맞았다.

“좋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록사나가 본론을 말하기 전에 차를 들어 잠시 마른 목을 축였다.

“에이글, 독수리 용병대를 복구하는 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들었어요. 괜찮다면 용병대 재건에 손을 보태고 싶어요. 그리고 제안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도와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록사나의 말대로 독수리 용병대는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가 않았다.

돈이야 많이 버는 편인 용병대였지만, 딸린 인원들이 많아 나가는 돈도 그만큼 많았다.

게다가 가족과 동족들을 찾기 위해 지출했던 비용 역시 꽤 되었기에 적자를 겨우 면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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