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반짝반짝 작은 별~”
록사나의 선창에 잠시 후, 건너편에서 장단을 맞춘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앳된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름답게 비치네.”
아스테리온의 눈가가 저절로 한결 누그러졌다.
‘이 목소리는 그 아이겠군.’
한편 록사나의 양 볼에는 볼우물이 깊게 패었다. 정령의 바람을 이용한 신호를 들었을 테오도르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이 정한 신호는 간단했다.
테오도르가 통나무집에 설치해 놓은 종을 정령의 바람으로 ‘땡~땡 땡땡’ 소리를 내면 되었다.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박수를 치는 응원에서 따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 박자를 딱딱 맞추기 어려워했다. 워낙 독특한 엇박자였기 때문이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록사나와 아이의 들뜬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고요한 밤공기를 부드럽게 갈랐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마지막 소절에서는 두 사람이 합창을 했다.
“테오 황자님, 저 넘어가려고 하는데 개구멍이 막혀 있어요.”
“아, 그게 다른 사람에게 여길 들킬 뻔한 적이 있어서 리키랑 막았어요. 대신 다른 방법이 있어요. 잠시만요.”
“네.”
반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다란 밧줄이 담을 가로질러 록사나가 있는 쪽으로 훌쩍 넘어왔다.
“내가 여기에서 단단히 잡고 있을 테니까 록사나가 그쪽 줄을 잡고 넘어올 수 있겠어요?”
“네, 그럼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정령의 바람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었다.
그녀가 힘을 잃기 전에는 몸 하나쯤은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소 무리였다.
록사나가 밧줄을 탁탁 잡아당겨 보았다. 밧줄이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저 갑니다.”
“네, 준비됐어요. 록사나, 조심히 넘어와요.”
록사나가 양손으로 줄을 붙잡고 발 하나를 벽에 디디려고 할 때였다.
록사나의 몸이 단숨에 훅 들렸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것이다.
“뭐 하러 힘들게 그래. 나를 데려왔으면 이럴 때 알차게 써먹어야지.”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을 봐주지 않는 주인에게 앙탈을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록사나?”
낯선 성인 남자의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긴장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잠시만요, 전하. 누구냐… 히익!”
아스테리온이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도약하자 록사나가 그의 목을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놀랐을 테오도르를 먼저 달래 주려던 그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착!
아스테리온이 반대편 땅 위에 안정적으로 착지를 하고는 몸을 돌려 테오도르를 마주했다.
“어……!”
툭.
아스테리온을 본 테오도르의 긴장이 깨지며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이 땅에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아스테리온을 딱 한 번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리키를 보냈을 때였다.
그때 자신에게도 제법 따뜻하게 말을 건넸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아까 들은 목소리는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 달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다른 의미로 경계의 빛이 서렸다.
록사나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여전히 아스테리온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테오 황자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럭저럭요. 록사나는 잘 지냈어요?”
테오도르가 록사나를 향해 다가서며 그녀의 한쪽 손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저는 잘 지냈답니다. 아! 내려 줘요.”
록사나가 몸을 살짝 비틀자, 아스테리온이 마지못해 그녀를 내려 줬다.
테오도르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록사나의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록사나가 마주 끌어안아 주자, 테오도르의 두 눈에 환희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얼굴이 록사나의 몸에 가려져 있어서 그녀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여우 새끼가 따로 없군.’
그 모습을 지켜본 아스테리온이 얄미웠던 친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자, 어서 가요. 록사나.”
“잠시만요. 저거 먼저 처리하고 가요.”
테오도르가 재촉을 하자, 록사나가 담 위에 걸쳐져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아, 맞다!”
록사나를 만난 기쁨에 취해 너무 흥분을 한 나머지 밧줄을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록사나와 테오도르가 밧줄에 손을 뻗기도 전에 아스테리온이 밧줄을 휘리릭 정리해 챙겨 들었다.
“이제 가지.”
아스테리온이 두 사람을 앞서 걸어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아는 자의 움직임이었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록사나와 테오도르가 손을 마주 잡고 그 뒤를 따라갔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걷는 아스테리온과는 달리 록사나와 테오도르는 두런두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었다.
별다를 것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서로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두 사람에게는 무척 알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테오도르가 그간의 일들에 대해 이것저것 말을 하면 록사나가 주로 들어 주는 입장이었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커다란 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올라가는 사다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필요치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만 안아서 옮기려 하자, 록사나가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이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양팔에 록사나와 테오도르를 사이좋게 안아 들었다.
두 사람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높다란 나무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에게 이런 일은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쉬웠다.
리키 경이 통나무집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주군. 아벨리오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리키 경.”
정작 록사나보다 리키를 더 오랜만에 보는 아스테리온은 그녀와 달리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록사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좀 다정하게 받아 주지.’
요즘 아스테리온이 많이 변했기는 했다.
하지만 록사나는 그가 자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성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간과했다.
“우리 먼저 들어갈게요.”
아스테리온과 리키 경이 따로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록사나가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통나무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늑한 굴을 찾은 다람쥐들 같았다.
아스테리온이 통나무집 외관과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가 이곳을 테오도르와 리키에게 알려 준 이후로 별달리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관리하지 않아 낡았던 부분들이 수리되어 있었고, 통나무집 문 입구 쪽에 못 보던 쇠 종이 하나 설치된 게 전부였다.
‘분위기 자체는 변했군.’
네이든과 이곳에 처음 통나무집을 만들던 추억들이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내놈 둘이 만든 곳이라 그랬었는지 그들이 찾았던 마지막까지 이곳은 메마르고 삭막했었다.
둘 다 그들의 아지트를 꾸미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거기다가 워낙 화려한 곳에서 살았기에 굳이 이곳까지 이것저것 가져다가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통나무집의 투박함 그 자체가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것이다.
아스테리온의 예민한 감각에 오러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은 청량하고 따스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록사나가 했나 보군.”
“맞습니다.”
공기처럼 자리한 채 기다리던 리키 경이 아스테리온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는 곧장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동안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보고를 이어 갔다.
리키 경의 보고가 끝나자,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바라보던 황후의 거슬렸던 눈빛을 떠올렸다.
아스테리온이 리키 경에게 새로운 명을 내렸다.
“황후를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주군.”
“그리고 황후에 대한 뒷조사는 밖의 인원에게 일임을 할 테니 협조해서 진행하도록 하고.”
“네.”
아스테리온이 통나무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리키 경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서자, 내내 화기애애하던 록사나와 테오도르의 분위기가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테오도르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앉아 있었고, 록사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린 황자를 달랬다.
“저도 록사나 따라가면 안 돼요?”
“죄송해요, 황자님. 제겐 아직 테오 황자님을 황궁 밖으로 데려갈 만한 힘이 없어요.”
테오도르가 더욱 울상을 지었다.
더욱 축 처지는 고개와 어깨가 아이의 우울한 기분을 대신 말해 주었다.
록사나가 열과 성을 다해 테오도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
“편지 자주 보낼게요. 그리고 황자님께서 자유로이 황궁 밖을 나오실 수 있게 되면 캠든으로 꼭 초대할게요. 만약 그 전에 제게 황자님을 모셔 갈 수 있는 구실이나 힘이 생긴다면 그때는 꼭 함께해요.”
“정말이죠?”
“그럼요.”
그녀의 정성 어린 설득이 통했는지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검은 먹구름이 한 겹 벗겨졌다.
테오도르는 기운을 차리고는 협상 비스무리한 것을 시도했다.
“편지는 2주에 한 번은 꼭 보내 줘야 해요.”
“그럼요,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낼게요.”
테오도르가 자수정빛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진짜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 줄 거예요?”
“물론이에요. 제 약속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아니요! 약속했어요, 록사나. 그러니까 앞으로 꼭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 보내 줘요!”
“네.”
록사나가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확답을 주자, 테오도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테오도르도 캠든에서 수도 케일라까지 마차로 2주가 걸릴 정도로 꽤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판단했을 때 최대한 빠른 시간인 2주를 말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 주겠다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록사나에게 힘이 생겼을 때 꼭 자신을 캠든 영지에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까지 야무지게 받아 냈다.
아스테리온과 리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곁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한자리에 자리한 모두에게 평온한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록사나는 황태자의 서신을 받았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보낸 걸까요?”
“보면 알겠지.”
아이린이 더러운 것을 손에 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록사나에게 서신을 건넸다.
록사나가 봉투를 바로 뜯어서 읽었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뭐라고 했어요?”
아이린은 좋지 않은 내용임을 감지했다.
“티타임을 가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자꾸 피곤하게 초대장만 보내는 황태자가 미운 아이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