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 *
록사나가 연회장을 막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더티 블론드 머리색을 지닌 남자가 록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랜만입니다, 아벨리오 남작님.”
“안녕하세요, 메리오그 영식.”
자신의 맞선 상대 중 한 명이었던 케빈 메리오그를 기억해 낸 록사나가 마지못해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케빈은 대뜸 자신의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제가 여러 번 서신을 드렸었는데요. 매번 거절만 하시고 초대 한 번을 안 해 주시니 무척 섭섭했습니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많이 바빠서 티 파티나 사교 모임을 주최할 여력이 없었어요.”
자신에게 마치 초대를 약속받은 것처럼 말하는 케빈의 행태에 록사나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케빈은 눈치도 없이 말을 더 시켰다. 허영심이 강한 성격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럴 만도 하십니다. 캠든 상단이 요새 장사가 참 잘되더군요.”
“네, 뭐. 다행히도요.”
“아, 이러고 얘기할 게 아니라, 저와 한 곡 추시지요.”
케빈이 록사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음, 저는…….”
록사나가 케빈을 어떻게 떼어 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벨리오 남작은 나와 이미 선약이 되어 있네. 그러니 영식은 이만 물러나게.”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손목을 강제로 낚아채려던 케빈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윽!”
아스테리온의 무지막지한 아귀힘에 손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케빈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가, 각하, 제발 손 좀……!!”
“이런, 미안하군. 내가 요새 힘 조절을 잘 못 해서 말이야.”
아스테리온이 더러운 걸 만졌다가 손을 떼는 것처럼 케빈의 손을 순식간에 뿌리쳤다.
케빈이 자유로워진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붙잡고는 끙끙거렸다.
손이 붙잡혔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아파 겨우 참고 있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직도 여기 있었나?”
“가, 갑니다.”
아스테리온의 살벌한 눈빛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케빈이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뭔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를 들은 록사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뼈가 부러졌을 거예요.”
“내 알 바 아니야. 그리고 부러졌다면 본인이 어련히 알아서 잘 붙일라고.”
한겨울의 꽁꽁 언 얼음보다 더 차가운 반응에 록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남자가 요새 자신에게는 봄바람이 불 듯 살랑거리고 있으니 그 간극이 하늘과 땅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아벨리오 남작, 저와 한 곡 춰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록사나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두 사람에게 쏠리는 시선들을 느꼈다. 그녀가 아스테리온의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엄청 작아.’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딱딱한 손바닥에 놓인 보드랍고 말캉한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잡고 무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서로의 따듯한 체온이 맞닿은 곳을 시작으로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그의 심장까지 퍼져 나갔다.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됐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가슴팍보다 조금 위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과 머리 위쪽에서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이 신경 쓰였다.
“내 정수리 뚫어지겠어요.”
“그러면 안 되지.”
아스테리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록사나는 긴장됐던 몸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춰서 그런 거야.’
아스테리온과는 작년 추수절 무도회 이후로 처음 춤을 추는 것이었다.
“아까는 어디에 가려고 한 거야?”
“그건 왜 물어요?”
록사나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그와는 키 차이가 크게 나서 한참 시선을 위로 향해야 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낮추었다. 고개가 아플 록사나를 위한 배려였다.
‘한 번도 이런 배려 안 해 줬으면서.’
속으로 투덜거린 록사나가 한쪽 손을 놓고 턴을 돌았다.
아스테리온이 온전하게 록사나를 지탱해 주며 멀어졌다 가까워진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다시피 했다.
“정원에 나가려고 한 거야?”
“제 질문에 대답 아직 안 했어요. 그리고 제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대가 가는 곳에 나도 따라가고 싶어서 물은 거야. 게다가 많이 어두워져서 위험하니까.”
자신에게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던 록사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웬만한 위험에서도 제 한 몸 지킬 수 있다는 걸 아스테리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위험을 언급하는 그의 염려 가득한 마음이 느껴졌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장 위험한 곳은 황궁이니까.’
록사나는 애써 자기 좋을 대로 합리화를 시키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아스테리온은 놓치지 않았다.
‘귀여워.’
록사나의 입술이 새 부리처럼 살짝 튀어나온 것을 보자, 자신의 입술로 쪽쪽 쪼아 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아스테리온은 이곳이 사람 가득한 연회장이라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애꿎게 몸 안의 피만 펄펄 끓어올랐다. 그의 체온이 훅 높아졌다.
“더워요?”
“조금.”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얼굴 피부가 살짝 붉어진 걸 발견했다.
“춤 끝나면 바람 쐬러 나가요.”
“응, 좋아!”
록사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대번에 확 밝아졌다.
안 되면 어떻게든 달라붙으리라 마음먹긴 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마지막 동작을 마무리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와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노반이 연회장을 나가는 그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이 썩은 사과처럼 변했다.
그는 자신이 큰일을 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기대에 보답하지 못한다 여기면서 이죽거렸다.
“참으로 애석하군. 다리를 잘 놓아 줬는데도 코니움 영식 말고는 아벨리오 남작과 제대로 교류가 없으니 말이야.”
아까부터 오랜 시간 도노반의 옆에 머무르고 있던 세브리오 라눔 자작 영식이 몸을 움찍거렸다.
“아니지. 코니움 영식이라도 남작과 가까워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겠군.”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하지만 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벨리오 남작이 수도에 머무는 내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습니다.”
세브리오가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수도에 있을 때만?!”
“네?”
“쯧쯧쯧. 이렇게 뭘 몰라서야. 수도에서 마음을 얻었다 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야.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
“영지 내려갈 때 따라가야지요?”
대답이 아니라 질문 형태가 되어 버렸지만, 세브리오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게!”
“네, 알겠습니다.”
세브리오는 남작의 마음을 얻어야 캠든 영지에 같이 내려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황태자는 수도에서 못 했으니 쫓아가서라도 해내라고 할 위인이었다.
“이만 가 보게.”
“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에 세브리오가 몸을 뒤로 물렸다.
세브리오는 자신이 후작가의 사생아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분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도노반이 자신의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시종이 몸을 낮춰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황태자 궁이 최근 한 차례 물갈이가 되고 도노반이 근래 들어 가까이 두기 시작한 이였다.
“일은 제대로 처리했겠지.”
도노반이 홀의 출입구에 시선을 두고서는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그러자 시종은 무엇을 묻는 건지 그 의미를 잽싸게 알아채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물론입니다. 이번 일을 담당한 공작가의 하녀가 찻주전자가 빈 채로 나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카펫이 젖어 있었던 걸 발견한 하녀가 약속받은 보수를 받지 못할까 봐 이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켰지만 시종이 알 리 만무했다.
도노반의 얼굴이 전보다 조금 더 펴졌다.
“증상이 나타나게 하려면 무엇보다 지속성이 중요해. 알아서 잘하도록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 아벨리오 남작가 고용인들은 워낙 충성심이 남달라서 매수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노반이 표정을 확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보수를 배 이상 얹어 주면 될 거 아니야?”
“이미 그리했는데도 잘 넘어오지 않습니다.”
“되게 하는 게 네 일 아닌가?”
“무, 물론입니다! 꼭 해내겠습니다.”
시종이 서슬 퍼런 역정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남작가 고용인은 매수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은 몸에 더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오늘 밤은 모니카를 내 방에 들여.”
“네!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이 황태자의 정부인 모니카를 황태자 궁으로 대령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때 도노반이 눈을 번뜩였다.
“내가 그동안 이 생각을 왜 못 했지?! 그렇게 하면 새 먹고 알 먹고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이거야말로 가장 완벽하지 않은가.
도노반의 머릿속에 황금빛 미래가 주르륵 끝없이 펼쳐졌다.
* * *
록사나가 그레이트 홀을 벗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점점 깊숙하고 으슥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그 뒤를 아스테리온이 조용히 따랐다. 그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했다.
풀벌레 소리가 배경 음악이 되어 주었고, 밤하늘의 달과 별이 그들의 발밑을 밝혀 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정원의 끝에서 한참을 벗어나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이곳에는 별다른 게 없는데……. 설마?!’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스테리온의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아니야, 속단하지 말자.’
아스테리온은 십 대 소년 시절처럼 자꾸만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대까지 버리지는 못했다.
아스테리온이 눈을 빛내며 록사나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록사나가 높은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아스테리온도 옆에서 그녀를 따라 바짝 다가섰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록사나가 담벼락에다가 대고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이 처음 들어 보는 노랫가락이었다.
그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고운 목소리를 열심히 두 귀에 담았다.
동시에 아스테리온은 그녀의 노랫말을 속으로 따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