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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8)화 (128/214)

128화 

빅토리아는 엄하고 차갑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풍족한 귀족 가문에서 자랐다.

평범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환상을 보여 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얀을 만났고, 깨달았다. 그녀 자신이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수인족들처럼 동물적인 특징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 중에는 자신과 같은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없었다.

기껏해야 마법을 쓰는 자들이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정령사나 이종족들이라면 모를까.

빅토리아는 얀을 만난 후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해답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쓰는 힘은 마법이 아니었다.

방대한 양의 책들을 뒤져서 확인해 본 바, 정령의 힘도 아니었고, 이종족들 중에서도 그녀와 같은 힘을 사용한 이들의 기록조차 없었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웰 후작 부부는 그녀의 친부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남도 아니었다.

그녀의 친모는 전 로웰 후작 영애이자, 현 후작인 아버지의 누나였던 셀레나였다. 셀레나는 빅토리아를 낳고는 며칠 후 산후열로 사망했다.

빅토리아의 친부는 로웰 후작뿐만 아니라, 아무도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로웰 후작은 부모 없는 빅토리아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힘이 친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로웰 후작은 다행스럽게도 빅토리아의 환상을 빚어내는 힘을 몰랐다.

얀과 아스테리온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녀의 힘을 깨지 못했으니 환상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한 명 더 늘었지.’

빅토리아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릴 적에 비해 몇 배는 늘었지만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몸의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최상의 상태에서는 지속적으로 사용했을 때 한나절 정도가 최대치였다.

그녀는 힘을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고 나눠서 사용하며 효율성을 높였다.

덕분에 빅토리아는 수많은 난관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가령 얀과 49호의 탈출을 돕고, 도노반과 잠자리를 갖는 일에 말이다. 그 밖에는 대부분 소소하게 힘을 사용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오늘은 장시간 들키지 않고 외출을 감행해야 했기에 과도하게 힘을 사용했다. 바닥을 드러낸 우물처럼 힘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가슴께에 넣어 둔 얀의 편지가 있는 위치에 한 손을 올려 감쌌다. 그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벨리오 남작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 얀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었다.

그러나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과 얀의 만남은 서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으니까.

빅토리아는 늘 되새기던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지금은 못 만나지만 모든 게 다 정리되고 나면… 그때는 원 없이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견디자.’

얀은 빅토리아가 펼친 환상을 최초로 꿰뚫어 본 이였다. 그가 조인족이어서였을까?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때 함께 있었던 49호는 그녀가 펼친 환상에 빠져들었었다.

그래서 빅토리아가 내린 해답은 간결했다.

그녀의 진정한 반려자.

빅토리아는 자신이 얀을 처음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자신의 환상을 허락했기에 얀이 환상에 속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면 아스테리온처럼 소드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했다.

‘대체 아벨리오 남작은 어떻게,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내 환상을 꿰뚫어 봤을까?’

해갈되지 않은 의문이 빅토리아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 * *

드디어 록사나가 수도에 올라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이 밝았다. 바로 도노반이 초대장을 보낸 황실 무도회 날이었다.

아이린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한껏 치장한 록사나가 마차에서 내려 그레이트 홀을 향해 걸어갔다.

마차가 그레이트 홀이 있는 궁까지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렇기에 다른 귀족들도 직접 두 발로 걸어서 무도회 장소로 이동했다.

“저기 좀 보세요.”

“어머, 어쩌다 아벨리오 남작 혼자 온 걸까요?”

“파트너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텐데……. 혼자 입장이라니.”

록사나의 뒤를 아이린과 앤이 따르고 있었지만 함께 걷게 된 귀족들의 눈에는 그녀의 빈 옆자리가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얼굴이 어둡게 변하는 아이린, 앤과는 달리 록사나의 표정은 평온했다.

‘내가 떼어 놓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록사나는 어제까지 황실 무도회 파트너 문제로 아스테리온과 설전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스테리온이 집요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은 날이었다.

그레이트 홀이 가까워지자 아이린과 앤은 때를 맞춰 다른 곳으로 향했다.

록사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레이트 홀의 웅장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고위 귀족 정도는 되어야 시종의 호명과 함께 홀에 입장을 한다. 물론 작위가 낮더라도 영향력이 크거나 본인이 원하면 호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위 귀족들은 록사나처럼 조용히 입장을 하고는 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 태반이 곳에서 관찰하고 판단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며 입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위 귀족도 아니고,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싫고.’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며 홀의 빈 곳을 채워 갔다. 고위 귀족들과 황족들, 황태자 내외까지도 호명 속에서 입장을 마쳤다.

얼마간의 시간차를 두고, 한껏 빼입은 시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제국의 태양이자 아버지이신 황제 폐하 알프레드 해롤드 마르퀴스께서 드십니다. 그리고 제국의 달이자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 크리스티나 마르퀴스께서 드십니다.”

중앙의 갈라진 길을 따라 황제가 황후의 손을 잡고 가장 높은 곳에 놓인 황좌를 향해 나아갔다.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와 무릎을 굽혀 예로써 맞이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황금빛 의자에 착석한 황제의 명에 따라 귀족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이어서 황제의 간략한 인사말과 황태자 부부가 첫 춤을 선보이며 봄 무도회의 시작을 알렸다.

황태자비로 나선 것은 당연히 본부인 이사벨이 아닌 빅토리아였다.

빅토리아는 화장으로 얼굴을 한껏 감추고 있었지만 파리한 기색을 다 숨기지는 못했다.

홀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중앙으로 나가 춤을 추었다.

록사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황제가 말을 할 때, 자신을 쳐다보던 황후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황제도 그녀 쪽으로 잠깐 시선을 주기는 했다.

캠든 영지에서 파파베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고, 캠든 상단이 수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관심을 한 번쯤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빛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대체 왜 날 그렇게 본 거지?’

록사나는 황후와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아스테리온과의 결혼 생활 중 황제와 황후의 탄신 연회에서 앞으로 나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현 황후는 가장 서열이 낮은 후궁에서 한 제국의 황후로 우뚝 올라선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도노반과는 다르게 권력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듯한 행보를 줄곧 보여 주고 있었다.

‘아, 지금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은 황후에 대해서 좀 알아보는 게 좋겠어.’

록사나가 시선을 사람들에게 돌렸다.

아스테리온이 몇몇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워낙 키가 크고 존재감이 강해서 그런지 일부러 찾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음, 오늘도 전 남편님은 한 미모 하시는군.’

순간 아스테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좀 있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걸 들킨 것만 같아 록사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록사나가 그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녀는 한동안 따가운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스테리온이 시선을 거두며 건장한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록사나가 그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다.

아스테리온도 자신의 욕심이 끝을 모르고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록사나가 그와의 만남을 피할 때는 피하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랐는데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게 되니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록사나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피했을 때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스테리온의 옆에서 귀족들이 그에게 뭐라고 말을 자꾸 시켰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쯧쯧쯧. 또 혼자 상처받으셨군.’

트레버가 자신의 주군이 땅굴을 파기 시작하며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안 되겠군.’

트레버는 자꾸 아스테리온에게 쏠려 있는 관심과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고 왔다.

이내 사람들이 트레버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롤만 백작님, 백작님께만 철광석 판매량을 늘려드리게 되면 다른 가문들에서 항의를 해 올 수 있습니다.”

그사이, 아스테리온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록사나를 발견했다.

‘어디에 가는 거지?’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이를 트레버가 곁눈질로 확인했다.

“어떻게 안 되겠소? 지금 우리 영지에는 철광석이 많이 필요해서 그렇소.”

롤만 백작이 트레버에게 떼를 썼다.

철광석이 전혀 나지 않는 영지에서는 어디든지 철 부족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에다 사용할 줄 알고.’

생활용품과 농기구 제작에도 필요하지만 무기와 같은 군수품 제작에 가장 많은 철이 사용된다.

트레버가 제게 이 무리를 떠넘기고 간 아스테리온을 속으로 원망하며 마지못해 롤만 백작에게 대꾸를 해 주었다.

어쨌든 롤만 백작은 카일라니 공작가의 거래처 중 한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많이 필요하신 타당한 이유가 있으시다면 저희 쪽으로 관련 서류를 작성해서 보내 주십시오. 공작님과 검토해 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길레르모 자작.”

마치 확답이라도 받은 듯 롤만 백작이 트레버의 손을 덥석 붙잡아 왔다. 그러자 트레버가 표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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