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빅토리아가 신기한 동물을 보듯 록사나를 바라봤다.
“남작은 모르는 게 없군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필요한 만큼은 알아요. 그러는 로웰 영애는 독을 어떻게 알아본 건가요?”
“우연히 알게 됐어요. 황태자 궁 시종들이 다른 궁보다 자주 바뀌는 편이에요. 도노반의 눈 밖에 나서 내쳐지는 경우도 있지만 몸이 안 좋아져 죽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이런 빛깔의 색의 차를 자주 마시던 사람들이었더군요.”
황태자가 궁인들에게 자주 하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나서부터 빅토리아는 노란 빛깔의 차를 멀리하게 되었다.
“색만으로는 독이라는 걸 확신하기 어렵잖아요? 더군다나 찻잎과 섞인 이 독초, 파세는 제국에서 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독초를 다루는 사람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 은으로도 검출되지 않죠.”
록사나가 파세를 알 수 있었던 건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약초를 조금이나마 다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가 독을 구분해 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노란빛이 다 같은 노란빛은 아니죠. 남작이 말한 파세라는 게 들어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독이 섞인 찻물은 자세히 보면 아주 미세하게 흙빛을 띠어요.”
록사나가 고개를 내려 찻잔 속의 찻물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집중했다.
빅토리아의 말처럼 노란빛에 흙빛이 감돌았다.
록사나는 빅토리아의 뛰어난 관찰력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빅토리아는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색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로써 어느 정도 서로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 록사나의 말이 빨라졌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제게 진짜로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요.”
빅토리아가 초조하게 자신의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빨갛던 입술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내게 전달한 그 편지, 정말 그 사람이 쓴 건가요?”
사실 빅토리아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의 글씨체를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녀를 위해 그는 종이 대신 땅바닥 위에 그림을 그려 주고, 편지를 써 주곤 했었다.
들킬까 봐 바로 지워 내야 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오롯이 박제되어 있었다.
빅토리아는 편지의 진위 여부에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꿈만 같아서.
록사나가 그녀가 받은 편지가 현실임을, 그리고 그가 무사히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줄 것 같아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애와 제가 아는 사람이 동일하다면, 맞아요.”
빅토리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얀은 아프지 않은가요? 잘 지내고 있나요? 제발 사실대로 말해 줘요.”
“종종 긴 시간 동안 잠에 빠져들기는 하지만 아프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빅토리아는 스스로 얀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거겠지.’
록사나는 자신의 휴식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체하지 말고 곧 파티 홀로 돌아가야 했다.
“로웰 영애, 당신은 황태자의 사람인가요?”
“절대 아니요!”
빅토리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강력하게 부정했다.
“제가 가정했던 최악이 아니라서 다행이군요. 잘 들으세요, 로웰 영애. 저는 영애가 추후 황태자 쪽으로 돌아서도 얀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힘쓸 거예요. 이걸 믿고 말고는 온전히 영애의 선택이에요.”
빅토리아의 불안정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 말을 먼저 꺼냈다. 그녀의 긴장된 표정이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믿을게요. 아니, 믿어요. 내게 해를 가하려 했다면 그 사람의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얀을 이용해 나를 무너뜨리려고 했겠죠. 그리고 고마워요, 내게 그 사람의 편지를 전해 줘서요.”
록사나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요?”
“나는 그 사람과…….”
빅토리아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황궁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이미 포기한,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록사나는 빅토리아가 드러내지 못한 의중을 눈치챘다.
‘얀과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겠지. 그런데 도노반과 로웰 후작을 처리하고 나면 막시밀리언 황손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찌 됐든 막시밀리언은 빅토리아의 아이였다.
이걸 지금 당장 묻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빅토리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로웰 후작이나 후작저에 대해서 영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 거래를 하도록 해요. 영애는 제게 황태자와 로웰 후작가 정보를 제공하고, 저는 영애가 지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게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빅토리아가 곧장 답했다. 록사나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돕겠다고 했으면 믿음이 약해졌을 것이다.
거래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이 역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빅토리아는 록사나의 올곧은 눈과 아스테리온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방법을 짧게 논의하고는 헤어졌다.
록사나는 빈손으로 휴게실을 나가려는 빅토리아의 손에 빈 찻주전자를 들려 내보냈다.
* * *
파티 홀에 들어서자마자 위즐리 공작 스테판이 곧바로 록사나에게 다가왔다.
“아벨리오 남작, 몸은 괜찮으시오? 코니움 후작 영식에게 전해 들었소.”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즐리 공작님. 휴게실에서 쉬었더니 좀 나아졌습니다.”
위즐리 공작가는 다른 공작가에 비해 위세가 약한 편이었다. 재력도 그저 그랬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의 초대 손님 중 가장 주목받는 이는 록사나다.
그녀의 참석 소식이 퍼지자, 위즐리 공작가의 홀이 몇 년 만에 꽉 들어차 스테판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그녀가 오자마자 휴게실로 직행해서 한참 동안 안 나타나니 애가 좀 탔던 모양이었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오. 에밀리.”
스테판의 부름에 십 대 후반의 영애가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위즐리 공작 부인인 패트리샤도 함께였다.
록사나는 패트리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미 파티에 입장할 때 인사를 나누었었다.
“이 아이가 내 맏딸인 에밀리라오. 올해 열일곱 살이되었다오. 에밀리, 이쪽은 아벨리오 남작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벨리오 남작님. 에밀리 위즐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위즐리 영애. 아벨리오 록사나예요. 영애는 부친의 화사한 머리칼과 모친의 아름다운 눈동자 색을 물려받으셨군요.”
에밀리는 적갈색 머리에 짙은 녹안,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하하. 제 딸이 우리 부부의 장점만 쏙쏙 빼닮았다오. 그래서 어떤 놈이 채 갈까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아버지도 참…….”
수줍게 웃는 에밀리를 스테판은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신경 쓰실 만하세요.”
록사나의 기분 좋은 호응에 스테판이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위즐리 공작가는 어쩌다 현 황태자 편에 서게 되었을까?’
스테판이나 패트리샤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중립 세력에 더 가까워 보였다.
지금까지 특별히 도노반을 두둔하거나, 로웰 후작처럼 뭔가 음흉하게 공작을 펼치지 않았었다.
‘그랬다면 평소에도 지금처럼 위즐리 공작가는 사람들로 넘쳐났겠지.’
록사나는 머릿속으로 위즐리 공작가를 도노반의 세력에서 떨어뜨려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도노반의 자금줄을 틀어막고, 그의 손발을 쳐 낸다면 힘이 급격히 약화될 것이다.
“에밀리, 나는 네가 아벨리오 남작의 당찬 성격을 본받았으면 좋겠구나.”
“네. 노력해 볼게요, 아버지.”
록사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자신을 당차기보다는 겁이 많은 성격이라고 자평하곤 했다. 가끔 어디로 튈지 몰라 엉뚱하기도 했지만.
“어머, 남작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박한가 보네요.”
패트리샤가 록사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콕 집었다.
“아, 그게. 음.”
순간 당황한 록사나가 어버버하다 이내 패트리샤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발견했다.
“위즐리 영애.”
“에밀리라고 불러 주세요.”
이런 걸 보면 에밀리가 자신보다 더 당찬 것 같은데 위즐리 공작은 대체 자신의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요, 에밀리. 저는 그리 당차지 못하답니다. 에밀리가 보기에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생각하는 아벨리오 남작님은 배울 점이 많으신 분이세요.”
“어, 고마워요.”
대놓고 면전에서 듣는 칭찬은 늘 록사나를 낯간지럽게 했다.
“에밀리 밑으로 아들 둘이 있는데, 열 살, 여덟 살 코흘리개들이라 소개시켜 주기 어렵겠구려.”
“저야말로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공작님. 제가 영지 경영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남자아이들이랑 놀아 줄 체력이나 여력이 전혀 없거든요.”
스테판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록사나는 정색을 했다.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패트리샤와 에밀리가 폭죽이 터지듯 웃음보를 왈칵 터뜨렸다.
* * *
빅토리아가 아모르 궁에 들어왔을 때는 저녁 식사 시간쯤이었다.
너무 피곤했던 그녀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위에 가지런한 자세로 누워 있던 존재가 산산조각 나며 빛으로 화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궁을 빠져나가며 빅토리아가 자신의 모습으로 빚어 놓았던 환상이었다.
똑똑똑.
“황태자비 전하, 저녁 식사를 하실 시간입니다.”
시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고했다. 빅토리아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나갈게.”
약간의 간격을 두고 빅토리아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가느다랗고 나지막한 소리였다.
숨 막히는 궁에서의 생활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겼다. 그래서 그런 걸까.
빅토리아는 오늘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가 힘들었지만 간만에 식욕을 느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 벗어 놓은 옷은 비밀 공간 안에 다시 숨겼다.
빅토리아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무척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미약하게나마 환상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자각을 하기 전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