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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6)화 (126/214)

126화 

* * *

위즐리 공작가에서의 파티가 열리는 날, 홀은 초대 손님들로 북적였다.

록사나와 브루노가 서로의 파트너가 되어 참석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저번처럼 브루노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아스테리온과 트레버의 소소한 다툼이 존재했다.

불건전하고 비합법적인 일에 한번 맛을 들인 아스테리온이 저번처럼 브루노가 록사나의 파트너가 되는 것을 다시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트레버가 이를 극구 말렸다.

황태자의 눈 밖에 나게 되어 경계를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되면 록사나에게 자연히 피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에스코트만 하고 춤을 추지 못할 정도로만 브루노의 다리를 손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트레버는 브루노에게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록사나가 필히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주군을 진정시켰다.

의도치 않게 트레버가 성심성의껏 브루노의 다리를 지켜 준 셈이었다.

록사나는 발목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어 브루노와의 춤을 일부러 피했다.

오늘 계획하고 확인할 일들이 있어서 체력을 지나치게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쾌한 선율이 흐르고 사람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는 가운데, 록사나가 파티장에 잠시 머물다가 얼마 안 있어 개인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 전에 안에 사람이 안에 있다는 걸 알리는 글자 푯말을 걸어 놓고 약간의 장치를 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러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일반 휴게실에 비해 개인 휴게실은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쉴 수 있을 만큼의 규모로 간단한 차와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서 쉬면서 좀 기다리면 입질이 오겠지.’

며칠 전 록사나는 얀이 작성한 편지를 받아 빅토리아의 수중에 들어가게 조치를 했다.

‘직접 움직이기 힘들 테니 수족을 보내겠지.’

록사나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평상시라면 더 편하게 쉬고 싶어서 구두를 벗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대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에 걸어 둔 정령의 힘이 흔들렸다.

노곤하게 깜박 졸고 있던 록사나가 두 눈을 번뜩 떴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며 공기 중에 긴장감을 더했다.

문밖에 선 상대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록사나는 그저 기다렸다. 연약한 짐승이 지레 겁먹고 놀라서 도망가지 않도록.

록사나가 문을 뚫어져라 계속 바라보았다.

이대로 상대방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싶을 때쯤 둥근 문손잡이가 서서히 돌아갔다.

낮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조금씩 열리고, 한 인영이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달깍.

이내 문이 닫혔다.

한여름의 울창한 나무를 닮은 녹안과 개암 빛깔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다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록사나가 들여다본 여인의 눈동자는 바람 앞의 촛불보다도 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어서 가벼운 숨결만으로도 스러질 것 같았다.

가녀린 어깨는 잔뜩 움츠린 채 떨리고 있었다.

“일단 앉으시겠어요?”

록사나가 먼저 입을 떼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티 세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그녀는 숯불이 담겨 있는 미니 화로에 종이째 자잘한 불쏘시개를 더 집어넣었다. 그 후, 화로 위에 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록사나의 침착한 행동이 여인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준 것일까.

땅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꼼작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여인이 다가와 록사나의 건너편에 조용히 자리했다.

록사나가 차를 우리는 동안 여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록사나도 애써 말을 걸지 않았다.

쪼르륵.

차가 다 우려지자, 록사나는 두 개의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한 잔을 여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나머지 한 잔은 자신의 앞에 놓았다.

찻물은 노란 빛깔의 따스한 수색을 띠었다.

여인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녀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여인은 차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록사나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때 여인이 갑자기 록사나를 향해 손을 확 뻗어 왔다.

탁! 쨍그랑!

록사나가 들고 있던 찻잔이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찻물은 다 쏟아져서 얇은 카펫에 흉측한 얼룩을 만들었다.

“음. 로웰 영애는 좀 과격하시군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빅토리아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눈은 커다래졌다.

록사나의 손에 들린 찻잔을 쳐 냈던 이유를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설마 본인이 변장을 잘하셨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록사나가 빅토리아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렸다.

빅토리아는 머리에 하녀용 모자를 써서 눈에 띄는 백금발을 감추고, 하녀복과 하얀 에이프런을 착용하고 있었다.

‘머리색만 감추면 뭐 해. 눈썹 색이랑 눈 색이 그대로인 데다가 손은 너무 곱고. 어휴! 게다가 누가 봐도 딱 신발은 하녀가 신을 만한 게 아니라는 게 다 티가 나잖아.’

록사나가 낮게 한숨을 내쉬자, 빅토리아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내,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요?”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하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전혀 하녀 같지가 않아요. 눈썹은 백금발에 눈동자는 개암색이군요.”

“어떻게!! 어떻게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죠?!”

“…제 앞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변장이 어설퍼서요.”

빅토리아가 입만 벙긋거리자, 록사나가 다시 한번 그녀의 어설픈 변장 기술을 상기시켰다. 충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 도움을 받아서 한 거라면 다음부터는 그 사람한테 맡기지 마요. 실력이 너무 형편없으니까요. 로웰 영애의 백금발과 눈동자 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애를 떠올릴 거예요. 안 하느니만 못한 변장이에요. 설마 혼자 한 건가요?”

“네, …아니요?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빅토리아가 횡설수설하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뜻 모를 혼잣말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록사나의 조언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빅토리아는 록사나에게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록사나의 눈에 어설프게 보이는 이 변장은 가장 완벽한 변장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는 환상을 구현해 내는 힘이 있었다.

이대로 휴게실 밖으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면 다들 그녀의 외모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보이도록 그녀가 자신에게 환상을 걸었으니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환상을 이용한 자신의 변장을 꿰뚫어 보는 이는 없었다.

아니, 두 명이 있었다.

그 둘을 제외하고는 빅토리아가 마음먹고 환상의 힘을 쓰면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거지? 나처럼 뭔가 숨겨진 힘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록사나에게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거냐고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자신이 가진 힘을 먼저 밝혀야 했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내 힘을 밝히지 않는 게 좋겠어.’

빅토리아는 자신이 직접 록사나를 만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상기했다.

한편 록사나 역시 빅토리아가 특별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환상 쪽과 관련된 모양이네. 스스로 밝힐 때까지 굳이 불편하게 물어볼 필요는 없지.’

잠시 후, 록사나가 차를 다시 다 우리고는 자신의 몫으로 새 찻잔에 찻물을 담아냈다.

이를 본 빅토리아가 찻잔을 집어 들려는 록사나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마시지 마요!”

록사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빨갛게 변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왜요? 나 차 좀 마시고 싶은데.”

“차에 독이 들었어요.”

빅토리아가 록사나의 얼굴을 살폈다.

록사나는 표정 변화 없이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당신, 알고 있었군요?! 어떻게요? 혹 당신이 한 건가요?”

‘오늘은 질문만 왕창 받는 날인가 보네.’

빅토리아가 자신에게 궁금한 게 많듯이 록사나 역시 그녀에게 물을 것들이 있었다.

빅토리아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앞서 그녀가 질문한 것들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하자면, 네, 이 차에 독이 들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찻물이 아니라 찻잎에 문제가 있어 독이 물에 우려진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게요. 피차 감추는 게 있잖아요?”

록사나가 찻물이 독물이라는 것을 안 것은 약초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정령의 힘으로도 판별할 수가 있었다.

다른 이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정령의 힘에 반응한 찻물은 새까맸다.

찻잔을 정령의 힘으로 감싸면 그 안에 든 내용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독의 양은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다만 지속적으로 복용할 경우 중독되었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생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찻잎의 검은 기운을 감지한 그녀는 다른 휴게실에도 같은 찻잎이 놓였는지 바람의 힘을 풀어서 확인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곳의 찻잎은 멀쩡했다.

록사나가 있는 개인 휴게실의 찻잎만이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도 정상적인 찻잎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록사나가 잠시 혼자 있으면서 잠에 빠진 척했을 때 하녀 한 명이 찻물을 교체하러 들어왔었다. 그때 찻잎 통을 몰래 바꾼 것이다.

“제가 독을 준비한 거냐고 물었는데 그 질문에 답할게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중간에 하녀가 몰래 찻잎 통을 바꿨어요.”

록사나가 모든 대답을 마치자, 빅토리아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믿어요.”

서로 신뢰하기 힘든 관계인데 록사나를 믿는다는 말이 생각 외로 쉽게 나왔다.

“그럼 대체 누가 독 찻잎을……?”

이내 빅토리아가 번개처럼 범인을 깨달았다.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도노반.”

“황태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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