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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5)화 (125/214)

125화 

* * *

다음 날이 되었다. 수도 케일라에서 록사나의 바쁜 일상은 여전히 이어졌다.

약속대로 오후에 사브리나와 마가렛이 저택에 방문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알렉시스의 의상 담당 직원들이 두 귀부인의 드레스 제작을 위해 신체 치수를 재고, 디자인을 설명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록사나의 통 큰 선물에 사브리나와 마가렛은 각각 세 벌의 알렉시스 드레스를 가지게 되었다.

황족은 물론 귀족들 여인들 중에서 최초였다.

두 사람의 마음에 쏙 들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아이들 옷은 출시하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에 록사나는 유아동복과 청소년을 대상으로까지 의류를 확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의 생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두 사람이 아벨리오 남작저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브루노가 방문했다.

브루노는 화사한 보랏빛 수국 꽃다발을 록사나에게 건넸다.

수국은 ‘진심’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진심을 전할 때 이용되곤 했다.

브루노는 록사나에게 정중한 사과를 건네며, 자신이 그녀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얻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록사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황실에서 만났을 때 록사나가 언급했던 커피를 드디어 맛보게 된 브루노는 눈이 살짝 돌아갔다.

그는 커피 관련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이미 낙점된 곳이 있다는 대목에서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실망을 했다.

록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브루노가 상품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되면 그와 사업 하나 정도는 벌여도 괜찮겠다 싶었다.

브루노에게 방문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록사나가 사과를 받아들였음은 물론 커피 원두를 한 아름 안겨 주었다. 간단하게 카페라테 만드는 법도 전수해 주었다.

록사나와 브루노의 만남은 아스테리온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꽝! 쩍.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스테리온의 주먹 한 방에 책상이 깔끔하게 반 토막이 난 것이다.

“감히 수국을 건넸다고?!!”

“이런. 각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트레버가 잔뜩 흥분한 아스테리온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달맞이꽃을 좋아해 여러 가지 꽃말을 공부했었다.

수국은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 즉 사랑을 고백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순간의 아스테리온은 수국이 사과할 때도 활용된다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

아스테리온은 정황상 한편으로는 브루노가 진심으로 사과하고자 록사나에게 수국을 건넸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가슴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용납 자체를 할 수 없었다.

트레버가 주군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나서며 아스테리온과 함께 머리를 맞대었다.

두 사람은 향후 록사나 공략과 접근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심도 있게 펼쳤다.

트레버가 이런저런 조언을 고명처럼 얹으면 아스테리온이 이를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그다음 날 공작의 집무실에 몇십 년 놓여 있었던 마호가니 책상이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 * *

쿠엔틴 백작저로 들어서자, 시녀장이 나와서 록사나를 정중히 맞이했다.

오늘은 아이린 대신 앤이 록사나를 보필했다.

시녀장의 눈에 록사나의 손에 들린 가방이 확 들어왔다.

색상 자체가 강렬한 건 둘째치고 귀족의 손에 물건이 들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들고 나르는 건 그 아랫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었으며, 귀족의 개인 물품이나 손가방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시녀장이 앤을 한번 쳐다보았다. 하녀의 양손에 물건이 들린 걸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벨리오 남작님, 토트백을 제게 편히 맡기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건 내가 들어야 의미가 있거든요.”

“네? 아, 그렇군요.”

순간 반문했던 시녀장이 당황했던 표정을 추슬렀다. 록사나가 들어야 의미가 있는 토트백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한 것이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요즘 새로운 형태의 손가방인 토트백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오늘 록사나가 한 손에 든 가방은 알렉시스의 토트백이었다.

그런데 시녀장은 그저 색상만 다르고 얼마 전 작은 마님인 마가렛이 구입한 피닉스의 토트백과 같은 건가 보다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록사나는 시녀장의 안내에 따라 티타임이 열리는 장소인 정원으로 향했다.

록사나를 발견한 마가렛이 빠르게 다가왔다. 평소보다 가볍고 물이 흐르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록사나, 어서 와요.”

“초대 고마워요, 마가렛.”

두 사람이 가볍게 포옹을 했다가 풀었다.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려요.”

“이렇게 멋진 드레스를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록사나. 아름다운 것은 물론 정말 편해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마가렛은 오늘 아침 전달받은 첫 번째 드레스를 입어 보고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가볍고 부드럽게 몸에 착 감기는 드레스는 착용자의 외양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고도 옷맵시가 살았고, 옥죄여 오는 통증이 전혀 없어 움직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마가렛은 앞으로는 절대 기존의 드레스를 입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분간은 보류해야만 했다.

다른 드레스들이 완성될 때까지 단 세 벌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마가렛이 잔뜩 들뜬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드레스 밑단이 푸른 물결을 이루며 활짝 펼쳐졌다가 마가렛이 멈추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다들 예쁘다면서 엄청 부러워하더라고요. 그리고 이것 봐요, 구겨짐도 덜해서 손도 덜 가요.”

마카렛이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탁탁 털어 내며 정리를 하자, 록사나가 까르르 웃었다.

마가렛의 모습이 귀여운 말괄량이 십 대 소녀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웃음이 잦아들고, 록사나가 자신의 옆에 있던 앤에게 눈짓을 했다.

“이건 제 작은 성의예요.”

앤이 마가렛의 시녀에게 포장된 선물을 건넸다.

“저번에 드린 것이 아직 남아 있긴 하겠지만 갓 로스팅한 원두로 만든 커피는 더 맛있답니다.”

“어머, 정말 고마워요. 오늘 차 대신 커피를 준비해서 사실 가진 원두가 거의 동났거든요.”

마가렛이 두 눈을 반짝반짝했다.

“아!”

마가렛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양 손바닥을 맞대어 박수를 짝 쳤다. 미안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미안해요, 록사나.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했는데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뭐가요?”

록사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커피요. 록사나가 커피를 따로 소개하는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제가 멋대로 일을 저질러 버렸어요.”

“전 또 뭐라고. 괜찮아요. 그럴 마음이 없거든요.”

“진짜요?”

록사나가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이라 생각한 마가렛이 실례인 줄 알면서도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록사나.”

록사나가 부드럽게 웃음을 짓자, 마가렛의 굳어 있던 표정이 자연스럽게 스르륵 풀렸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 * *

마가렛은 록사나가 원두나 커피를 직접 판매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관련자이긴 하니까 커피 홍보를 하는 것이 좋은 거 아닌가?’

마가렛은 록사나의 생각이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왜요?”

“커피 사업을 진행하는 쪽에서 할 일이니까요.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커피를 지인들과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요.”

“그렇군요. 내 정신 좀 봐. 너무 오래 붙들고 서 있었네요. 이리 와요.”

마가렛이 록사나에게 가볍게 팔짱을 껴 걸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테이블에는 이미 대부분의 초대 손님이 착석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혼 여성이었다.

부인들의 시선이 록사나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록사나는 저번처럼 신선한 형태의 드레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전에는 허리에서 허벅지까지 몸에 달라붙는 머메이드식 드레스였다면 오늘은 마가렛과 같은 A라인 형태의 다크 블루 드레스였다.

거기에다가 핫 핑크 토트백을 들고 있었는데 옷차림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록사나가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토트백은 자신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초대된 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록사나 아벨리오는 사교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흔치 않게 여자의 몸으로 작위를 이어 영지를 운영했고, 캠든 상단의 실질적인 소유주였다.

캠든 상단에서 쏟아 내는 상품들은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매출이 고공 행진 중인 데다가 유행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섰다.

또한 사랑은 어떠한가.

전 남편인 카일라니 공작이 이혼을 후회하며 지극 정성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그 무뚝뚝하고 냉정한 카일라니 공작이 직접 꽃다발을 사는 걸 목격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카일라니 공작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좇으니 으레 아벨리오 남작저에 다다랐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록사나 아벨리오는 일과 사랑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부인들은 쿠엔틴 백작가 티타임에 초대받은 것이 무척 기쁘고 반가웠다.

파티에서와 달리 록사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티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모두 감사해요.”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답니다.”

“서로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니 제가 돌아가면서 소개를 하도록 할게요.”

티 파티 호스트인 마가렛의 말에 다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여기 제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은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님이세요. 그 옆에 계신 분은…….”

록사나를 시작으로 다들 앉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자, 부인들은 다들 록사나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열심히 대화에 참여했다.

록사나를 오늘 처음 보는 부인들도 그녀와의 대화를 전해 어색해하지 않았다.

캠든 상단에서 출시된 상품들이 충분히 좋은 대화 주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록사나는 귀부인들의 선망과 뜨거운 관심 속에서 유익하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난생처음으로 마음 편히 즐겨 본 사교계의 티 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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