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 *
아스테리온이 공작저로 귀가했다.
트레버가 득달같이 집무실로 달려왔다. 밤이 늦었다는 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트레버는 사건의 장본인인 아스테리온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각하, 어떠셨습니까?”
“뭐가?”
아스테리온이 집무실 책상에 자리를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 아시면서 정말 이러시깁니까? 제가 얼마나 큰 도움을 드렸는데!”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트레버를 무시하며 아스테리온이 쌓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각하?”
아스테리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 마음이 상한 트레버가 초강수를 두었다.
“이러시면 다음부터 안 도와 드립니다.”
트레버의 폭탄선언에 아스테리온이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도움과 공이 적지 않았었기에 영락없이 아스테리온의 손해였다.
아스테리온은 트레버의 도움으로 오늘 아침부터 벌였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록사나가 파트너를 로니움 후작 영식으로 정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아스테리온은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올라온 이상 그 자신이 파트너 동반인 모든 사교 활동에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록사나의 사교계 복귀 무대나 다름없는 그레이슬린 공작가의 파티에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입장하는 장면은 상상해 보지 못했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그녀의 첫 남자였던 것처럼 록사나와 관련된 그 무엇이든 그녀의 처음이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쓰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말이다.
록사나의 옆에서 그녀가 즐거운 순간에는 그 순간을 최대한 지속시켜 주고,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서도……. 저열하고 속된 욕심이라는 걸 그도 잘 알았지만 마음이 그런 걸 어찌하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군을 보며 트레버가 나섰다.
“각하, 제가 도와 드릴까요?”
“네가 어떻게?”
“다 방법이 있습니다. 도와 드려요, 말아요?”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지금의 아스테리온이라면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번에 내가 록사나 파트너가 될 수만 있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트레버의 눈에는 아스테리온이 매 전투에서 주야장천 패배를 겪은 장수처럼 보였다.
그의 주군에게는 단 한 번이더라도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트레버가 음흉하게 미소를 띠었다가 감추었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에 서명 먼저 하시죠. 휴가 요청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트레버가 빈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더니 그것을 아스테리온에게 내밀었다.
내용을 눈으로 쓱 훑어본 아스테리온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서명을 했다.
“이로써 계약 성사입니다.”
트레버가 잉크가 마르길 잠시 기다렸다가 종이를 곱게 접어 가슴 안쪽에 챙겨 넣었다.
아스테리온이 트레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제 말해 봐.”
“네, 제 계획은 말입니다…….”
트레버의 전략을 다 들은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썹이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처럼 휘어졌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귀족의 품위를 너무 떨어뜨린다.”
“각하, 사랑 앞에서는 품위고 체면이고 그딴 거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의 주군은 정치적 공작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공작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이혼 같은 걸 하셨지. 제 발등 찍고 숨통 끊는 건 줄도 모르고.’
트레버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열을 올렸다.
“각하께서 아벨리오 남작님 파트너가 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거죠.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조건 나여야 해!”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시간이 촉박하니 당장 서두르겠습니다!”
트레버가 보던 업무를 즉각 내팽개쳤다.
아스테리온이 집무실을 뛰쳐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 손이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브루노가 록사나의 에스코트를 위해 코니움 후작저를 막 나서려던 때였다.
심부름꾼 한 명이 부리나케 코니움 후작저에 당도했다. 그는 브루노가 운영하는 상단에 큰 문제가 생겼음을 알렸다.
납품받은 해산물 식재료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당장 오늘 오후에 여러 귀족가로 들어갈 것들이었다.
평소 때라면 별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들어오는 해산물들은 수도까지 운송해 오는 도중에 일부 지방에서 비가 많이 내려 원래 배송 일정보다 많이 지연되어 도착했다.
그럼에도 점점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최대한 신선도를 유지해 운송했는데, 상했다니!
제대로 된 것들마저 오늘 밤을 넘기면 많은 양을 폐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루기 까다로운 해산물 재료의 신선함과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며 긴 시간 코니움 상단을 키워 영세 상단을 겨우 벗어난 브루노로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아, 이럴 때 제대로 된 냉동고가 있었더라면.’
얼마 전 겨우 큰맘 먹고 마련한 고가의 마력석 냉동고는 모든 해산물 중 10분의 1도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작았다.
얼음 또한 더워지는 날씨에 값이 치솟고 있는 상황이라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급하게 서신을 작성했다.
이를 시종에게 들려 아벨리오 남작저로 보냈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코니움 상단으로 향했다.
브루노는 어찌저찌해서 타 상단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상했던 품목이 극히 일부라서 참 다행이야. 시간 내에 잘 해결되기도 했고.’
브루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니움 후작가의 마차가 그레이슬린 공작가를 향해 나아갔다.
길이 막히는 시간대에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그가 탄 마차 바퀴가 부서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일대에 혼잡이 일어났다.
브루노는 다시 한번 록사나에게 에스코트를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그는 오늘 하루 자신이 너무 불운하다고만 생각했다.
이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트레버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 턱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의 파트너 자리를 무사히 꿰찰 수 있었다.
회상을 마친 아스테리온은 트레버에게 가지고 있던 고마움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걸 느꼈다.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 트레버를 향한 아니꼬운 마음이 묻어났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야?”
“각하께 직접 듣고 싶어서 그렇죠.”
트레버가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성공했다. 고맙다. 됐지?!”
마치 밀린 과제를 후다닥 해치우듯 세 문장을 내뱉은 아스테리온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은인에 대한 말투가 전혀 아니었지만 트레버는 괘념치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주군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흐흐흐. 역시 저는 공작의 천재랍니다. 계약하신 대로 보너스나 두둑이 챙겨 주시죠.”
사실 돈보다는 장기 휴가가 간절했지만, 현재 공작가의 상황상 당장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이라도 챙길 수 있을 때 많이 챙겨야 했다.
트레버는 주군인 아스테리온이 일을 하기 시작했음에도 당당하게 조기 퇴근을 서둘렀다.
이미 늦은 밤이었기에 퇴근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최근 자정까지 훌쩍 넘게 일했던 것에 비하면 조기 퇴근이 맞았다.
아스테리온도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트레버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에게 오늘은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트레버는 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 어설픈 변장? 】
같은 시각.
도노반이 손에 든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잔 안을 맴돌았다.
“카일라니 공작과 전 부인이 함께 파트너로 참석을 했다라…….”
알턴 자작의 보고를 받은 황태자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카일라니 공작과 엮이면 늘 골치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코니움 영식은 왜 하필 그때 사고가 나서는.”
도노반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서 서 있는 알턴 자작에게로 향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때? 둘이 다시 재결합할 것 같아?”
“파티가 끝나고는 따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알턴 자작의 표현에 도노반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귀족이나 황족에게 가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 사랑은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도노반이 소파에 몸을 더 깊숙이 뉘였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야. 카일라니 공작이 요즘 뒤늦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 부인 주위를 맴돈다고 하더군.”
“사실입니다. 아시겠지만 아벨리오 남작은 꿈적도 하지 않더군요. 공작만 열심히 꼬리를 치는 꼴이죠. 단물 빨아 먹을 게 좀 많으니 내버려 두는 거 아닐까요.”
“그래. 어느 남자가 이혼하면서 그렇게 큰 영지를 위자료로 턱 내놓겠나. 거기다가 이번에 남작이 수도에 산 저택 값만 해도 금액이 크니까 공작의 도움이 있었겠지.”
록사나가 저택을 구입할 때 아스테리온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자세한 계약 내용을 모르는 도노반은 금전적 지원이 있었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아무튼 아벨리오 남작이 공작이랑 재결합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 뭐야.”
“맞습니다.”
알턴 자작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어딘가 불안하단 말이지…….”
손톱 위 거스름처럼 뭔가 신경이 쓰였다.
‘내게 복종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지!’
카일라니 공작에게 복수할 방법을 기막히게 떠올린 도노반이 소름 끼치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상상만으로도 통쾌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말이지.”
도노반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알턴 자작이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알턴 자작이 도노반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