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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2)화 (122/214)

122화 

귀족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한껏 졸라 가는 허리를 강조하며, 페티코트를 치마 안에 받쳐 입어 허리 아래로 풍성한 치마 모양을 유지했다.

록사나는 그와 결혼 생활 중에는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만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착용했고, 평상시에는 하지 않았었다.

캠든 영지로 가서는 그 이후로 계속 어느 때든 편한 차림을 고수했었는데, 지금처럼 몸매를 드러내는 적나라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록사나는 파티에 참석함에도 코르셋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럼에도 허리가 무척 가늘었다.

드레스는 몸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되 허벅지 아래 부분에서부터는 적당히 퍼진 형태였는데 마치 활짝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았다.

“특이한 디자인의 드레스군. 몸에 딱 달라붙어서 불편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네, 엄청 편해요. 기존 드레스들보다 천도 덜 들면서 엄청 예쁘기도 하고요.”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록사나의 몸 선을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거세게 솟구쳤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이 움찔거렸다.

아스테리온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이를 목 안 깊숙이 쓰게 삼켜 냈다.

록사나가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고 그에겐 아직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으니 별수 없었다.

다만 저 드레스를 록사나에게 만들어 준 디자이너를 속으로 열심히 저주했다.

드레스의 디자인을 구상한 이가 록사나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만약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스테리온은 오히려 록사나의 안목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실컷 저주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 이를 두고 훗날 뼈저리게 후회를 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푸른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 시선이 록사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스테리온은 디자이너를 찾아내서 이런 드레스를 다시는 록사나에게 입히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보나 마나 디자이너는 록사나와 계약을 맺었을 것이고, 그녀에게 중요한 인재일 거라는 점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 * *

대기하고 있던 그레이슬린 시종이 손님이 탑승한 마차가 멈추자 다가갔다. 정중히 노크 후 안에서 신호를 받자 문을 열었다.

긴 다리를 가진 남자가 먼저 마차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의 머리칼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더욱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남자가 안쪽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여인이 남자의 손바닥 위에 한 손을 얹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백을 든 상태에서 치맛자락을 살짝 올려 잡고 마차 밖으로 사뿐히 발을 내디뎠다.

안내를 위해 저택의 현관 앞에 자리하고 있던 그레이슬린 공작가의 집사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노련한 집사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집사는 그들에게 성큼 다가가며 시종에게 언질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에 시종이 그레이슬린 공작 부부에게 방문자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안으로 먼저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카일라니 공작님, 아벨리오 남작님.”

집사의 인사에 아스테리온과 록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집사가 앞장섰고,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손을 받쳐 들고 정성스럽게 에스코트를 했다.

그 뒤를 아이린과 앤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휴, 늦지 않게 시간 맞춰 도착해서 다행이야.’

얼떨결에 파트너 문제를 해결했다.

록사나는 수도 사교계 복귀 무대에 무사히 발을 내디딜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후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거대한 홀의 입구에 다다랐다.

아이린이 뒤에서 록사나 가까이에 몸을 붙여 조용하게 속삭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초대 손님과 동행한 고용인들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홀에 입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록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린과 앤이 방향을 틀어 멀어졌다.

홀 안쪽으로 들어서기 전 아스테리온이 마주 잡은 록사나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마치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록사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록사나의 가슴 한구석에서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퐁 솟아나 잠시 속이 울렁거렸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록사나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것일까.

록사나는 머리 위쪽에서 낮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에게서 들린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아스테리온의 인도에 따라 록사나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 발이라도 맞춘 듯 호스트인 매튜와 사브리나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며 홀 안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연필 그림 그리기 행사에 참석해 카일라니 공작을 봤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자석에 끌리는 철처럼 두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서 스르르 이동했다.

사교계 유행에 민감한 귀부인과 영애들이 록사나와 사브리나를 바라보며 홀린 듯이 연신 눈을 반짝였다.

아스테리온과 록사나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한순간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선망 또는 탐욕과 질시가 깃들어 있었다.

록사나는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처음 보는 디자인의 살굿빛 드레스를 걸치고 블랙 미니 클러치 백을 한 손에 들었다.

금빛 계열의 드레스를 착용한 그레이슬린 공작 부인은 다크 그린 미니 클러치 백을 왼손에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 미니 클러치 백이 두 사람의 패션을 완성해 주는 것은 물론 한층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양쪽에서 다가서니 홀의 중앙쯤에서 주최자와 손님은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서 오시오, 카일라니 공작, 아벨리오 남작. 그레이슬린 공작가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하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참석해 줘서 오늘 파티가 더욱 빛나네요.”

그레이슬린 공작 부부가 미소를 지으며 환대하자,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도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레이슬린 공작, 공작 부인. 이런 멋진 파티는 정말 간만이라 설렙니다.”

“안녕하세요. 초대 감사드려요. 올봄이 그레이슬린 공작가에서 가장 화사하게 꽃을 피웠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연회 홀은 생화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사람들의 오감을 만족시켰다.

“허허허. 이 사람이 신경을 많이 썼다오.”

기분 좋은 칭찬에 그레이슬린 공작이 너털웃음 터뜨리며 부인의 노고를 치켜세웠다.

옆에 선 공작 부인이 주책이라는 듯 남편을 살짝 흘겨보았다. 귀족 사회에서 보기 드문 허물없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록사나, 드레스가 너무 멋져요. 혹시……?”

“네, 사브리나. 알렉시스에서 나온 의상이에요.”

“내가 나중에 꼭 연락할게요.”

사브리나가 록사나에게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해 보였다. 그러나 드레스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진심이었다.

‘알렉시스가 뭐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당장은 궁금증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알렉시스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공작 부부는 두 사람에게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주최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다른 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처럼 두 사람 또한 어쩌다 카일라니 공작과 이혼한 전 부인이 다정하게 파트너로 참석하게 된 것인지 제법 궁금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레이슬린 공작 부부는 굳이 이를 드러내지 않는 여유를 보였다.

공작 부부에게는 급한 사항이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주변에 그녀의 것과 비슷한 미니 클러치 백을 든 부인들과 영애들이 간혹 눈에 보였다.

당당하게 미소 짓는 그들의 얼굴에는 유행을 선도하는 이라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록사나가 가진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의 것은 피닉스 제품이었고 록사나의 것은 알렉시스에서 나온 제품이었다.

록사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를 본 여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미니 클러치 백을 가진 자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출시하기 전이니 아직은 알렉시스와 피닉스의 차이를 모를 때지.’

록사나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아스테리온은 귀신처럼 그녀가 편해 할 사람들을 알았다.

홀의 중앙을 벗어나 두 사람은 한 젊은 부부에게 다가갔다.

“쿠엔틴 소백작 부부, 오랜만입니다.”

“카일라니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아벨리오 남작님, 안녕하세요.”

쿠엔틴 소백작 부인인 마가렛이 남편인 가브리엘을 따라 같이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했다.

그녀의 남편은 작위를 잇기 전이라 남작일지라도 작위가 있는 록사나의 지위가 더 높았다.

“반가워요, 쿠엔틴 소백작님, 마가렛.”

록사나는 쿠엔틴 소백작 부인을 이름으로 불렀다. 지난번 연필 그림 그리기 행사 심사 때부터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네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갔지만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기에 분위기가 전혀 딱딱하지 않고 매끄러웠다.

어느새 대부분의 대화는 록사나와 마가렛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주변 사람들 역시 무리를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네 사람을 향해 한껏 열려 있었다.

“요즘 피닉스 클러치 백이 귀부인들과 영애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인 거 아세요?”

“어머, 정말요. 피닉스가 사랑받는 것 같아서 기쁘네요.”

록사나가 활짝 웃자, 그녀의 분위기가 한층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사교계에서 웃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었던 록사나의 새로운 모습에 주변 남자들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살짝 붉어졌다.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자신의 것을 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강자 앞에서 심약한 몇몇 남자들이 몸을 움찔거리거나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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