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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1)화 (121/214)

121화 

‘뭐야, 내가 고맙다고 했다고 놀란 거야? 이래 봬도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실제로 전에 아스테리온에게 도움받았을 때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었다.

그래도 괜히 쑥스러워진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들고는 애꿎은 빈 커피 잔만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아스테리온의 붉은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함지박만 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놓쳤다.

록사나가 화제를 돌렸다.

“바쁘지 않아요?”

“맞아. 더 함께 있고 싶지만 그래서 지금 일어나려고.”

아스테리온은 혹여라도 아까처럼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될까 봐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거기다 값진 승리를 거두었으니 오늘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록사나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배웅했다. 겨우 집무실 문 앞까지였지만.

아스테리온이 올 때처럼 홀연히 떠나고, 록사나는 미처 시작하지 못했던 답장을 작성했다.

아벨리오 남작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서신은 인편으로 코니움 후작저에 보내졌다.

록사나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파트너 제안을 수락해 줘서 고맙다는 답신을 받았다.

에스코트를 수락해 줘서 고맙고 무척 영광이라는 갖은 미사여구가 덧붙여져 있었다.

브루노가 록사나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록사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브루노가 온전한 황태자의 수족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와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뒷조사했을 때 걸리는 점은 없었지만 지금으로써는 확실하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만나 보면서 신중하게 조금만 더 지켜보자.’

* * *

사흘 뒤, 그레이슬린 공작가 파티 날이 밝았다.

치장을 마친 록사나가 아이린, 하녀인 앤과 함께 현관 로비에 내려왔다.

그때 마침 시종 한 명이 그들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역시 시종으로 보이는 외부인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남작님, 코니움 후작저에서 시종이 왔습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시종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록사나의 시선이 코니움 후작저의 시종에게로 향했다.

“아벨리오 남작님을 뵙습니다. 브루노 코니움 도련님께서 보내시는 급한 서신입니다. 바로 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번거로우실 테니 구두로 답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후작저 시종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고급스런 서신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린이 먼저 서신을 받아 록사나에게 건넸다.

서신을 펼쳐 든 록사나가 내용을 훑어보았다.

급한 용무가 생겨 모시러 갈 수가 없어 정말 죄송하다며 그레이슬린 공작가 정문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록사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록사나가 서신을 아이린에게 건네고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알겠다고 전해 줘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후작저 시종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무슨 내용인지 여쭤도 될까요?”

“중요한 일이 있어 데리러 오지 못하니 그레이슬린 공작저 앞에서 만나자고 하는구나.”

록사나가 아이린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사이 눈치 빠른 앤이 조그만 목소리로 시종에게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시종이 마구간으로 향했다.

“남작님 에스코트보다 중요한 일이란 게 대체 뭘까요?”

“글쎄.”

록사나는 뭔가 큰일이 생겼나 보다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늘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웬만한 큰일이 아니고서는 파트너의 에스코트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록사나는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아이린과 앤이 따랐다.

곧 마차는 아벨리오 남작저를 벗어나 그레이슬린 공작저를 향해 나아갔다.

* * *

그레이슬린 공작저 가까이에 당도한 마차는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파티 시작 시간이 코앞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코니움 후작 영식께서 안 오시는 걸까요?”

초조함에 아이린이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린은 주군의 사교계 복귀 파티가 처음부터 어그러질까 봐 염려되었다.

이대로 브루노가 안 오는 건 아닌지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늦게라도 온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입장이 늦어지게 된다면 그 역시 주최자에게는 실례를 저지르는 일이었고, 참석자들에게는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아이린.”

록사나가 아이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아이린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록사나가 혼자라도 늦지 않게 입장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똑똑.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필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코니움 후작 영식 측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록사나가 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앤이 마차 문을 살짝 열자, 시종이 문 가까이 다가왔다.

“아벨리오 남작님, 저는 브루노 코니움 후작 영식의 시종 피터입니다. 도련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다가 마차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파트너 동반 입장이 어렵다는 도련님의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도련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추후 따로 찾아뵙고 정식으로 사죄를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놀란 록사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코니움 영식의 상태는 괜찮아요?”

“네, 다행히 경미한 사고인지라 다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수도 경비대에 진술을 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남작님의 에스코트를 못 하시게 되었습니다.”

브루노에게 충실한 시종은 이 상황이 결코 주인의 잘못이 아님을 어필할 줄 아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록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나지막이 내쉬었다.

자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서둘러 오다가 사고가 난 건 아닌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겁기는 했지만.

“안 다쳤다니 참으로 다행이에요. 마음 쓰실 것 없다고 코니움 영식에게 전해 주세요. 그리고 다친 곳이 없다고 하시더라도 의원에게 진찰을 한번 받아 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마지막은 상처가 없더라도 주인의 몸을 돌보라는 의미로 피터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이를 바로 파악한 피터가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피터가 바람처럼 물러가고 마차가 막 출발하려던 때였다.

똑똑똑.

굵직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록사나의 두 눈이 살짝 커지고 고운 눈썹이 위를 향해 올라갔다. 마차 문을 직접 두드린 이번 노크는 필립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문자가 있을 때 보통은 마부가 먼저 말을 전했다.

록사나의 예민한 반응에 아이린과 앤도 몸을 움찔하며 덩달아 긴장했다.

의심을 가득 담은 록사나의 시선이 마차 문 쪽으로 스르르 향했다.

이곳은 적이 가득한 수도 한복판이었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릴 적 마차 사고가 떠오르며 트라우마처럼 그녀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똑똑똑.

다시 한번 힘찬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적이 정중하게 노크를 할 리는 없겠지만 방심해서 당할 수는 없었다.

‘벨루카를 데려올걸.’

록사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한 손을 치맛자락에 감추고 정령의 힘을 모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로 힘이 풀렸다.

“록사나, 나야. 잠시 문을 열어 주겠어?”

아스테리온이었다.

빠르게 뛰던 록사나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박동을 되찾았다.

순간 간이 떨어질 뻔했던 록사나는 심술이 샘솟았다. 손을 뻗어 신경질적으로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슨 일인데요?”

말투마저 바늘처럼 뾰족했다.

모습을 드러낸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향해 봄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마차가 공작가로 안 들어가고 서 있길래 혹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긴 건 아닌가 해서.”

마치 그런 일이 생긴 걸 알고 있고, 자신이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는 뉘앙스가 살짝 묻어났다.

평상시의 록사나였다면 그 미묘함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간 벼려졌던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별일 아니에요.”

“곧 입장 시간인데 그대 파트너는 대체 어디에 있지?”

서슬 퍼런 파란 눈이 마차 안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훑었다. 심지어 마차 의자까지 까뒤집을 것 같은 기세였다.

“마차 사고가 나서 못 와요.”

“그래. 참으로 안됐군.”

마차 사고가 난 코니움 영식이 안됐다는 건지, 아니면 파트너를 잃은 록사나가 안됐다는 건지 참으로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붙잡았다.

“나랑 같이 입장하는 건 어때? 나도 파트너가 없거든.”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는 아스테리온을 보며 록사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막대한 부와 뛰어난 무력을 가진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파트너가 있든 없든 사교 활동에서 늘 환영받는 존재였다.

아스테리온의 제안은 파트너 없이 홀로 등장할 그녀를 배려한 것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나중에 맞을 매 미리 맞는 게 나을 거라는 하늘의 계시일지도?!

“그렇게 해요.”

록사나의 허락에 아스테리온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마치 구름 속에 가렸던 태양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빛났다.

아스테리온이 냉큼 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그러더니 록사나의 옆자리에 둥지를 단단히 틀었다.

그의 생을 통틀어 아스테리온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또 한 번의 값진 승리의 순간이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를 봤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오늘 하늘에서 여신이 강림하셨군.”

“새삼스럽지 않네요. 아이린과 앤이 이미 한 말이거든요.”

사실이었다. 출발 전 록사나의 성장을 보고는 어찌나 감탄과 찬사를 보내던지 낯간지럽고 민망해 혼났었다. 천사니 여신이니 해서 말이다.

록사나는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아스테리온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팩 돌렸다.

감춘다고 했지만 발그스름하게 물든 그녀의 한쪽 볼이 아스테리온의 시선을 강탈했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생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한 입 깨물어 봤으면.’

아쉬웠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생각이 더 깊어지려 하자 아스테리온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아스테리온의 관심이 록사나가 착용한 살굿빛 드레스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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