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록사나가 다행이라는 듯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서둘러 아벨리오 저택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스테리온이 어떻게 말을 꺼낼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아이린이 차를 내왔다. 덕분에 그는 조금이나마 유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집무실을 장식한 꽃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보낸 꽃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아, 고마워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는데요.”
록사나가 커피 관련 물품을 카일라니 공작저에 보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보내온 꽃이었다.
“아직 시판도 안 된 커피를 계속 마실 수 있게 해 줬는데 그 정도쯤이야 당연하지. 그래서 꽃은 맘에 들어?”
아스테리온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하자, 록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왜 안 하던 짓을 하나 모르겠네.’
캠든 영지에 온 후부터 전 남편이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 정도가 유독 심해졌다.
아스테리온은 결혼 생활 중에는 정작 그녀의 마음을 필요 없는 물건을 보듯 외면했었다.
‘뚝뚝 흘러넘치도록 미련을 갖게 되다니…….’
그가 자신을 마음에 품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쁘지도 않았다.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너무나도 외롭고, 추웠다.
신이 제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준 만큼 가혹한 형벌을 내려 준 것만 같았다.
남편에게 외면받을 때마다 심장은 뜯기고 가슴은 너덜너덜해졌다.
‘다시는 혼자서 몰래 숨죽여 울고 싶지도 아프고 싶지도 않아!’
먼지까지 훌훌 다 털어 내 버렸는데도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순간 아릿했다.
이혼 후, 아스테리온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던 것처럼 다시 차가운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친구라도 만들었다면 덜 외로웠을 수도 있었겠지…….’
어릴 적에는 친구라고 칭할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그녀에게는 이렇다 할 친구 한 명 없었다.
늘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은 심정이었던지라 친구를 사귈 여력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 호의적이고 악의적인지, 이 모든 걸 파악할 심력이 부족했었다.
힘들던 시간, 그래서 미련하게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고 늘 끙끙대기만 했었다.
단 한 사람, 아스테리온은 열세 살 이후의 그녀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라면 친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록사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스테리온을 친구라는 관계로 설정했다. 그리고 전 남편의 호의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이 건넨 것들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순수하게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록사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스테리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꽃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아스테리온의 자아가 현실의 아스테리온을 타박했다.
‘솔직해져,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넌 그녀에게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닿기를 원해! 그래서 단순을 가장해 네 마음을 표현한 거잖아?!’
잠시 후, 록사나의 입가에 은방울꽃처럼 소담한 미소가 맺혔다.
“네,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바로 옆 협탁 위에 장식된 핑크빛 달맞이꽃을 손으로 살며시 매만졌다.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보내온 꽃은 종류와 색이 다양했는데, 그중에서 달맞이꽃을 골라 그녀의 집무실을 장식했다.
‘5월의 달맞이꽃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어린 날, 그녀의 창가에 시기를 잊고 놓여 있던 달맞이꽃들이 문득 떠올랐다.
보통 달맞이꽃은 7월의 밤에 피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핑크빛 달맞이꽃은 개량된 품종으로 낮에 피었다.
“온실에서 재배한 거라 가격도 비싸고 무엇보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힘들지 않았어.”
별생각 없이 인사치레를 하던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테리온이 마치 직접 꽃을 구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설마.
“이 꽃 당신이 산 거예요? 직접?”
록사나는 평소 고수하던 공작님이란 호칭을 잊어버린 채 물었다.
아스테리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연하지. 당신에게 보내는 꽃이니까.”
록사나의 초록빛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붉게 물든 아스테리온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들녘에 햇볕이 내리쬐듯 초록색 눈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아스테리온의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쿵쿵 힘차게 뛰었다. 그가 록사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스테리온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달았다.
물기가 닿으면 한순간 녹아 버리는 솜사탕처럼 사라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한편 마음속으로는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아스테리온이 밝히지 않으면 록사나는 모를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달맞이꽃을 키우는 곳. 달맞이꽃은 그가 후원하는 그 화훼 농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오직 록사나만을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록사나가 카일라니 공작저에 온 시기, 그의 소년 시절과 맞닿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아스테리온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달맞이꽃 하나로 록사나가 잠시나마 웃고, 그에게 보여 주는 그 모습이 더 소중했다.
잠시간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리 어색하거나 차갑지 않았다. 미묘한 훈풍이 주변을 감쌌다.
자신을 뜨겁게 녹여 버릴 것 같은 시선을 록사나가 은근히 비껴 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아스테리온이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승리를 거머쥐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고 정공법을 택했다.
“사교 활동을 할 때 당신 파트너로 함께하고 싶어.”
커피 잔을 막 들어 올리던 록사나가 멈칫했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그녀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건 어렵겠어요. 당신하고 함께 참석하게 된다면 이래저래 화제가 될 테니까요.”
구태여 덧붙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의 화제일 거라는 걸 그도 충분히 알 만한 내용이었다.
록사나가 속으로 삼킨 말을 짐작한 아스테리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갈무리했다.
“그럴 테지. 하지만 우리가 사업상의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하면 그리 나쁘지 않을 거야.”
“음…….”
록사나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새 아스테리온과 자주 부딪치며 마주하는 입장이라 적절한 핑곗거리가 되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가문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어제의 적과도 얼마든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족속들이었다.
이혼한 두 사람이 공개 석상에 함께 등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래도 염려되는 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재결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것이고, 황태자의 견제가 심해질 것이다.
“공작님 제안도 나쁘지 않지만 선뜻 수락하기는 어렵네요.”
록사나의 거절에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떼었다.
“그럼 두 번째 파트너로는 어때?”
아스테리온이 한발 물러섰다.
“고려해 볼게요.”
거절 비슷한 말이었지만 록사나의 얼굴에는 어떤 고민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았다.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가 나을 것이라는 생각과 두 사람이 계속 마주치는 모습을 보이며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고마워.”
희망의 불씨를 얻은 아스테리온이 남은 커피를 마시고는 이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만 다시 앉아 봐요.”
록사나가 자신을 붙잡자 기분이 좋아진 아스테리온이 냉큼 다시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록사나의 눈을 마주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며 불안했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든지 물어봐.”
아스테리온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록사나가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으며 만나면 꼭 물어보리라 별렀던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행사에 참여한 거예요?”
“……!”
아스테리온은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록사나를 만나러 오며 그녀의 의문을 각오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발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냥 빨리 도망칠걸!’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아스테리온을 록사나가 뾰족한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아스테리온은 새초롬하게 가늘어진 록사나의 어여쁜 눈꼬리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그녀를 살짝 비껴 있자, 톡 쏘았다.
“왜 말을 못 해요?”
자신보다 더 바쁜 사람이니 없는 시간을 쪼개 가며 아무 이유 없이 그림 그리는 데 시간을 낭비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록사나는 직접 그에게 이유를 듣고 싶었다.
아스테리온이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어.”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이유가 대체 뭔데요. 제게 말하기 곤란한 건가요?”
“음, 조금 곤란하긴 해. 적들을 탐색하는 중이었거든.”
아스테리온이 솔직하게 밝혔다. 코니움 후작 영식을 비롯한 메리오그 백작 영식과 라눔 자작 영식은 그에게 한쪽으로 치우고 싶은 연적들이었다.
그의 수족들이 그들에 대한 온갖 정보를 물어다 주었지만,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는 직접 그들을 가까이서 면밀히 탐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캠든 상단 주최 행사에 참석했다. 거기에 수상을 해서 록사나의 눈에 들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했었다.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하긴 했는데……. 우리 행사에 황태자나 로웰 후작 측 세작이 잠입해 있었던 거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어요. 어쨌든 별 방해나 사고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저도 방비한다고 하긴 했지만 당신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나 봐요. 고마워요.”
아스테리온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호된 질책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야기가 이렇게도 흘러갈 수도 있는 거구나!’
진득한 질투심으로 까맣게 얼룩진 사내의 순정이 곱게 포장되었다. 그는 록사나에게 사실을 정정해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사실 록사나의 말처럼 적들의 세작이 숨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잔챙이들뿐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전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적들에게 들어간 내용을 확인하기도 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