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수상을 하지 못한 참가자들에게 참가상 명목으로 주어진 상품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수상자들이 받은 부상에 비해 고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아쉬움을 날릴 만큼 예쁘고 유용한 필기도구 세트였다.
참가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소정의 기념품이 증정되었다.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캠든 상단의 신제품 출시와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본 행사에 초청된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호외를 발간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기자들의 머릿속에는 행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캠든 상단에서 출시한 제품들에 대한 설명과 극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 * *
사람들은 모두 기분 좋게 귀가를 서둘렀다.
아스테리온 일행도 기사인 마커스 경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한 마차에 탑승했다.
마차는 캠든 상단의 정문을 통과해 카일라니 저택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 유능한 집사에게 이런 대단한 재능이 있을 줄 미처 몰랐는데 말이지.”
어색한 공기를 깨고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눈빛에서는 그의 불편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났다.
“송구합니다, 주군.”
프란시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품에는 상패와 부상을 가득 끌어안은 채였다.
“이제라도 꿈을 찾아 전직하는 것이 어떻겠나?”
“아닙니다. 저는 카일라니 공작가에 뼈를 묻을 겁니다.”
“그럼 재능 있는 그림은 어쩌고요. 이렇게 상까지 수상하셨는데요.”
트레버가 아스테리온을 거들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수상을 간절히 열망하던 그들의 주군은 장려상조차 수상하지 못했고, 가신인 프란시스는 최우수상을 떡하니 받았다.
아스테리온의 성정상 가신이나 주변인들의 성공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번 캠든 행사의 참가에는 주군의 원대한 뜻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스테리온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은 취미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프란시스가 절절맸다. 그가 연신 아스테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트레버가 살짝 몸을 프란시스 쪽으로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 그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공작님 앞에서는 절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스테리온의 사나운 눈길이 프란시스가 꼬옥 끌어안고 있는 상패와 상품 쪽으로 향했다.
프란시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옹송그리며 창가 쪽으로 바짝 붙었다.
“왜 내가 61번으로 접수가 되지 않았던 거지?”
아스테리온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마치 번호 때문에 자신이 수상하지 못한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아니, 각하. 수상자는 제비뽑기가 아니라 실력으로 선발한 것이지 않습니까!’
트레버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검은 아우라를 마구 풍기는 아스테리온의 재촉에 그가 식겁하여 부랴부랴 입을 열었다.
“그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각하께서 61번이 아니라, 62번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하겠습니다.”
트레버가 직접 접수한 것이 아니라 밑의 부하 직원을 시킨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소관이었다.
“됐어.”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팩 돌렸다. 수상하지 못한 것도 속상한데 쪼잔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트레버와 프란시스가 순간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신호가 오고 갔다.
‘프란시스, 저거 삐진 것 맞죠?!’
‘그런 거 같습니다, 트레버.’
아스테리온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그가 삐진 걸 보게 되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아스테리온을 저 상태로 놔두게 된다면 한동안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프란시스와 트레버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각하, 그 세 명도 수상자에 들지 못했잖습니까.”
“제가 얼핏 봤는데, 실력이 영 아니더군요. 만약 상이 한 자리 더 있었다면 필히 각하께서 수상하셨을 겁니다.”
트레버가 말할 때는 아무 반응이 없던 아스테리온이 프란시스의 말에는 고개를 슬쩍 그들 쪽으로 돌렸다.
아스테리온은 프란시스가 얄미웠다. 하지만 성인부 최우수상을 수상한 실력자인 만큼 그의 말에는 신뢰가 갔다.
“프란시스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림 전시회 때 인기상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트레버의 아부에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돌며 살아났다.
수상식이 모두 끝났지만, 전시회 기간 동안 미수상작을 대상으로 관람객들의 투표를 통해 인기 작품을 선정한다고 행사 말미에 캠든 상단주 잭이 말했던 걸 떠올린 것이다.
“그래, 그게 있었지.”
아스테리온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수도의 카일라니 공작저 고용인들과 기사들은 난데없이 이틀의 휴가와 함께 캠든 상단 전시회 안내장을 받게 되었다.
* * *
록사나가 한가롭게 커피를 음미했다.
‘음, 좋다.’
큰 행사 중 하나였던 제품 출시와 연필 그림 그리기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갖는 여유였다.
캠든 상단 직원들에게는 두둑한 보너스와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3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연필로 그린 작품 전시회는 연일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홍보를 별도로 하지 않았던 토트백은 연일 판매 신기록을 갱신 중이었다.
이와 더불어 첫선을 보인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캠든 상단의 토트백과 신제품에 대한 복제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흐음. 복제품이 늘어나는 만큼 오리지널의 가치는 올라가기 마련이지. 다만, 그로 인해 우리 제품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더 써야겠어.’
휴식 시간이 슬슬 끝나 가고 있었다. 록사나의 옆에 있던 아이린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이린. 휴식 시간에는 하지 말라니까 참. 그거 이리 줄래?”
아이린의 앞에는 방금 전 분류를 마친 서신과 초대장이 쌓여 있었다. 아직은 아이린의 선에서 처리하기에 애매한 것들이 존재했다.
“여기요.”
우편물을 받아 든 록사나가 그것들을 하나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캠든 상단의 명성이 높아지며 록사나에게 쏘아진 초대장들이 너무 많아졌다.
애매한 것들이 그녀의 손에서 최종적으로 걸러지기 시작했다. 모두 합해 마지막에 중요하게 남은 것은 록사나의 앞에 몇 개 되지 않았다.
“참석하실 곳은 정하셨어요?”
“응. 우선 여기 세 군데는 확실하게 참석할 거야.”
록사나가 세 개의 초대장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레이슬린 공작가, 쿠엔틴 백작가, 위즐리 공작가였다.
“위즐리 공작가는 황태자파 쪽인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더 눈에 띌 수 있으니까. 위즐리 공작 부부는 저번 티 파티에서 한번 본 사이니까 적당해.”
“네.”
아이린의 염려에 록사나가 가볍게 응수했다.
앞선 두 곳은 중립파였고, 어느 정도 록사나와 친분을 쌓은 귀족가였다.
반면에 위즐리 공작가는 록사나가 황태자의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여 참석하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약간의 다른 의도도 있었다.
‘빅토리아 로웰의 측근 중 적어도 한두 명은 위즐리 공작가 파티에 참석하겠지.’
록사나가 수도에 머무는 기간은 짧았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빅토리아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남작님, 파트너는요?”
“응?”
아이린이 록사나가 그동안 등한시했던 문제를 콕 집었다.
록사나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렸다.
“반드시 파트너와 동반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작 위를 받으신 후 처음으로 사교계에 참여하시는 건데 파트너도 없이 가신다니, 말도 안 돼요.”
아이린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 펄쩍 뛰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 파트너를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관례였다.
만약 혼자 참석하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딱 좋았다. 파트너 없는 참석자는 인간관계가 좁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파트너를 부탁할 마땅한 사람이 없잖니.”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절대 혼자는 안 되세요!”
순간 아이린의 머릿속에 아스테리온이 떠올랐지만, 그것이야말로 사교계에 구설수와 먹잇감을 동시에 던져 주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린은 자신의 주군을 사교계에 홀로 참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브루노 코니움 후작 영식은 어떠세요? 셋 중에 그나마 가장 낫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린이 록사나의 맞선남 중 한 명을 떠올렸다. 록사나가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지만, 아이린도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했었다.
“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도노반 쪽에 보여 주기 식으로 적당한 상대였다.
“그럴까?”
“네, 마침 여기 파트너를 청하는 편지를 코니움 영식이 보냈잖아요.”
아이린이 한쪽에 정리되어 있던 서신 중 하나를 뽑아 록사나 앞으로 내밀고는 편지지와 펜, 잉크도 디밀었다.
“그래. 생각난 김에 처리하자.”
참석하려는 모임 중 가장 날짜가 빠른 곳은 그레이슬린 공작가였다.
똑똑똑.
록사나가 막 서신을 쓰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손짓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남작님,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기별도 없이 오시다니.”
아이린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록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깃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래, 응접실로 갈게.”
“내가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이미 문밖에 서 있었는지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바로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손님이 방문하면 으레 응접실로 먼저 안내하는데 그녀의 집무실까지 오다니, 급한 일인 건가 싶었다.
아스테리온이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 아이린이 탁자 위에 널려 있던 서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건너편 자리에 앉다가 한 서신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파란 두 눈동자에 초조함이 깃들었다가 자취를 감췄다.
“그럼 저는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아이린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혹시 독수리 용병대에 무슨 일이 있어요?”
록사나는 아르얀과 49호에 대해서 주기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니고.”
“그럼 캠든에 다른 문제가 생겼나요?”
캠든 상황에 대해서도 매주 보고받고 있었다.
그녀가 놓친 뭔가가 있는 것일까?
록사나가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아스테리온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것도 아니야……. 내가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그대의 걱정을 키운 모양이군. 어느 곳에서도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