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17)화 (117/214)

117화 

* * *

캠든 상단 본관 앞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구경을 온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혼란스럽던 광경은 미리 준비한 안내 책자와 표지판, 직원들의 안내로 차츰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본관 중앙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아동과 청소년부, 왼쪽에는 성인부 참가자가 자리했다.

그 양옆으로는 동행자나 구경을 온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비참가자는 그곳에서 대기했다.

상단 본관의 현관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캠든 상단의 상품을 구경할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이 성인부 한곳을 힐끔거리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분, 그분 아니야?”

“맞아! 카일라니 공작님.”

“아니, 저분이 왜 저기에…….”

“그러게 말이야. 모든 걸 다 가지고 계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데 참가하시는 거야?”

“상품이 그만큼 대단한 것 아닐까?”

“말 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참가 신청을 하는 건데 말이야. 아쉽군!”

“이혼까지 한 마당에 전 부인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하다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야.”

“허허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설마 두 사람 다시 재혼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참 동안 수군거렸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저기에?!’

관계자석에 자리하고 있던 록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녀가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스테리온이 성인부 끄트머리쯤에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성인 참가자 대부분이 여성들이어서 아스테리온의 큰 덩치는 단연 눈에 띄었다.

아스테리온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전혀 안 들린다는 듯 무척 태평한 얼굴이었다.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옆을 보고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가 입을 떡 벌렸다. 오늘은 헛것이 보이는 날이 아닌가 싶었다.

아스테리온에게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그의 양옆과 뒤로 낯익은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트레버, 프란시스, 마커스 경이었다.

아스테리온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밀려 세 사람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과 입에 주로 오르내리는 건 아스테리온이었다.

록사나의 절망하는 얼굴을 본 트레버가 그녀를 향해 입을 뻐금거렸다.

‘남작님,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스테리온을 말리지 못했다는 건지, 아니면 자신들도 어쩔 수 없이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

록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가 두 눈에 힘을 팍 줬다.

‘어떻게 된 건지 끝나고 해명해요!’

‘네……. 알겠습니다.’

트레버가 어깨를 움츠리며 록사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순간 아스테리온의 커다란 어깨가 움찔거리는 듯했다.

‘그럴 리가. 저 남자가 뭐가 무섭다고…….’

록사나가 반쯤 포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록사나의 눈빛이 어찌나 따갑던지 하마터면 그녀를 마주 바라볼 뻔했다.

행사가 끝나고 록사나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스테리온이 앞쪽에 자리한 세 명의 남자를 번갈아 가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사태를 만든 원흉들!

브루노, 케빈, 세브리오가 연필 그림 그리기 행사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였다. 어떻게든 록사나에게서 그 셋을 떼어 내기 위해 아스테리온의 경쟁 심리가 발동되었다.

아스테리온은 차마 혼자 참가할 수 없어 자신의 측근들을 반 협박하여 끌어들였고, 가명으로 참가 신청을 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어떻게든 상을 받아서 그 셋보다 내가 더 낫다는 걸 보여야 해!’

아스테리온이 잘못된 열의를 다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정각 두 시가 되자, 잭이 단처럼 마련된 본관 앞 계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잭에게 집중되었다.

잭이 인사와 함께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하고는 행사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미 홍보가 되었기 때문에 연필과 지우개에 대한 설명은 굳이 따로 할 필요 없었다.

“캠든 상단 ‘연필로 그림 그리기’ 행사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총 두 시간입니다. 주제는 자유입니다. 그러니 연필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그리시기 바랍니다.”

몇몇 사람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완성하시면 그림 뒤에 꼭 제목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글을 잘 모르는 아동의 경우에는 저희 직원들이 기재하는 걸 도와줄 겁니다.”

잭이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주변에 위치한 직원 중 몇 명을 가리켰다. 직원들은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일반인들과 쉽게 구분되었다.

“그림을 다 완성하지 못했더라도 두 시간이 지나면 저희 직원이 그림을 수거해 갑니다. 만약 제출을 안 하시면 당연히 심사에서 제외됩니다.”

잭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제출 시 그림에 이름을 절대 기재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저희 직원이 제출하신 작품에 대한 해당 번호표를 여러분에게 배부해드릴 것입니다. 해당 번호표는 본인 인식 마법 기능이 있어서 본인 것을 타인에게 건넬 경우, 부정 처리되니 이 점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실력이 뛰어난 이를 섭외해 부정을 저지르려고 공모했던 몇몇이 속으로 뜨끔했다.

미리 알게 되어 천만다행으로 망신을 모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을 쓸어내렸다. 수상도 중요했지만 귀족의 품위는 더 중요했다.

잭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제출 후, 두 시간쯤 뒤에 아동부, 청소년부, 성인부로 나누어 최우수상 한 명, 우수상 두 명, 장려상 다섯 명을 선발합니다. 수상한 사람들에게는 상장과 함께 특별 상품이 별도로 주어집니다. 또한 해당 작품들은 앞으로 한 달간 캠든 갤러리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참고로 캠든 갤러리는 본 상단의 본관 옆 동관에 위치해 있습니다.”

특별 상품과 갤러리 전시라는 말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을 반짝였다.

“혹여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참가자분들께는 모두 소정의 상품이 주어지니까요.”

호기심에 참가했거나 그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참가에 의미를 두었던 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해당 내용은 홍보나 사전 안내에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연필이 부러지거나 다 쓴 경우에는 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 직원이 연필을 깎아드릴 겁니다.”

혹시나 연필에 문제가 생길까 고민을 했던 일부의 마음이 이내 편해졌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잭의 말이 끝나자마자, 직원이 시작종을 쳐서 댕댕댕 세 번 울렸다.

참가자들의 앞 이젤에는 각자 두 자루의 연필과 지우개 하나, 스케치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참가자들이 일제히 연필을 들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여기저기서 사각사각 연필 움직이는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아스테리온과 세 가신도 그들의 손에 조막만 한 연필을 쥐었다. 네 사람은 각자의 실력을 유감없이 스케치북 위에 발휘하기 시작했다.

* * *

심사 위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해당 상에 적합한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다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이 작품은 정말 느낌이 좋군요. 흑백만으로도 이렇게 따뜻함을 표현할 수 있다니, 참 재능이 놀랍습니다.”

“이 그림은 조금 서투른 면이 있지만 아동이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성장 가능성이 아주 커 보여요.”

“이건 어떻습니까. 우수상까지는 아니어도 장려상으로는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사 위원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렵사리 각 수상 작품 선정을 마쳤다.

심사 위원들이 심사를 진행하는 그 시각, 참가자들과 그들의 보호자 또는 동행자, 구경꾼들은 캠든 상단 내부의 상품들을 구경했다.

한 아이가 보석으로 장식된 사각 모양의 연필깎이를 가리켰다. 연필깎이 겉면에는 역동적인 말과 마차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들 봐! 완전 멋져!”

“진짜! 갖고 싶다.”

“난 엄마가 이따가 시상식 끝나고 사 준다고 했어.”

한 아이가 으스대자, 다른 아이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난 이게 마음에 들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난 저 귀여운 토끼 필통이랑 동물 지우개가 더 좋아.”

여자아이 하나가 귀여운 동물 모양 연필깎이를 가리키자, 친구로 보이는 다른 여자아이가 한 필통과 지우개를 콕 집어 말했다.

아이들에게 캠든 상단의 상품은 별세계 천지였다. 새로운 디자인의 물건들을 발견할 때마다 다들 눈을 빛냈다.

그러다가 발걸음을 한곳에서 멈춘 아이들이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지?”

“그러게. 왜 가방 같은 것에 바퀴가 달려 있지?”

“바퀴 안 달린 것도 있어.”

바퀴 달린 책가방과 여행용 가방이었다.

특히 여행용 가방은 눈에 더욱 띄었다. 처음 보는 잠금 방식을 하고 있었으며, 열려 있는 가방 안으로 짐이 쌓인 모습이 보였다.

제국에서는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돈 있는 이들은 최대한 가볍고 튼튼한 나무 상자를 이용해 짐을 싸서 이동했다.

그랬는데 한편의 명화처럼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된 여행용 가방의 등장은 모두를 신세계로 이끌었다.

그런가 하면, 어른들은 다른 것에 푹 빠져 있었다. 남자들은 주로 마수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런 서류 가방에, 여자들은 토트백이라는 손가방에 정신이 팔렸다.

그곳은 ‘피닉스’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써져 있는 매장이었다. 타 매장과 따로 분리되어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토트백은 크기도 모양도 다양했고, 특히 화려한 각양각색의 컬러는 그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리온 제국에서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소지품 보관용으로 작은 천 주머니를 주로 사용하곤 했다.

더러 가죽으로 된 것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천 주머니에 비해 모양이 투박스럽고 색이 제한적이어서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 주머니는 치마 안쪽에 보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를 주로 애용했다.

옆으로 메는 천 가방도 있었지만 유아스러운 느낌이 강해 그런 가방은 주로 아이들이 멨다.

귀부인의 소지품은 대동하는 시녀나 하녀들이 대신 들어 주어서 이런 종류의 가방의 필요성을 그동안 느끼지 못했다.

그랬는데 대체 이 토트백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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