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어느덧, 숲에 어둠이 거의 내려앉아 록사나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많이 아쉬워하는 테오도르를 위로하며, 떠나기 전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록사나는 통나무집이 지어진 나무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도록 결계를 넓게 둘렀다. 혹시나 모를 다른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테오도르와 리키에게 정령의 표식도 새겨 주었다. 표식을 가진 자만이 나무와 통나무집에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식이 없는 자 중에서 이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단 세 가지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표식을 가진 테오도르나 리키가 사람을 직접 데려온 경우, 아스테리온과 같은 소드 마스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어도 록사나와 동격이거나 그녀보다 더 뛰어난 정령술사.
* * *
간만에 많은 힘을 썼더니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그럼에도 록사나의 마음은 가볍고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록사나가 작은 구멍을 지나 무사히 장미 정원으로 발을 디뎠다.
“남작님?”
“아이린?! 마차에 가 있으라니까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이린이 작게 속삭였다. 록사나 역시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이린에 대한 미안함과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장미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록사나의 마음을 눈치챈 아이린이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딱 좋은 날씨에 정성스레 가꾸어진 장미 정원의 장미는 아름다워 보는 재미를 선사했고, 향긋한 장미 향도 실컷 즐겼다.
그러다가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며 정원 여기저기에 마력 등이 켜졌다.
이내 아이린은 예상보다 늦어지는 록사나가 걱정되었다. 이곳은 살벌한 황궁이었으니까.
“아무튼 고생했어. 어서 돌아가자.”
“네, 남작님.”
록사나와 아이린이 정원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미 정원을 완전히 벗어나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스윽.
그러자 그때까지 울창한 장미 덩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영 역시 이내 발길을 재촉해 자리를 떴다.
* * *
“황태자비 전하, 제인입니다.”
“그래, 들어와.”
제인이 방으로 들어선 후, 바로 빅토리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약간 파리한 표정으로 빅토리아가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빅토리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처음 장미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벨리오 남작은 안 보이고, 남작의 시녀만 있었어요. 그래서 남작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떠나기 직전까지 시녀 혼자서만 정원을 구경했고요.”
“그게 다야? 대체 남작은 어디로 가고 시녀 혼자만 그곳에 있었던 거야?!”
빅토리아의 가녀린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최고급 가죽 소파에 그녀의 손톱자국이 깊숙이 새겨졌다.
빅토리아의 표정이 신경질적으로 변하자, 제인이 살짝 몸을 움츠렸다.
빅토리아가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번 화가 나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제인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남작이 밀회를 즐기느라 시녀 혼자 정원을 구경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빅토리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제인을 보았다.
제인이 재빠르게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장미 정원은 밀회 장소로 유명하잖아요. 한번 작정하고 숨으면 어지간해서는 쉽게 찾기 힘들죠.”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살 보며 제인이 말을 이었다.
“밀회가 아니라면 그곳에 뭔가 중요한 볼 일이 있었다는 건데, 사실 워낙 그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별한 일을 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약간 찝찝하기는 했지만, 빅토리아의 잔뜩 찌푸리고 있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제인의 말처럼 장미 정원은 밀회 장소로는 최상이었다. 그리고 이맘때쯤에는 은밀한 만남을 위해 정원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남작이 다른 귀족가에 접촉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긴 한데……. 오늘 도노반이 티 파티에서 영식들을 소개했다고 하니까, 그들 중 한 명을 따로 만난 건가.’
그런 거라면 다행이었다. 자신을 은근히 겁박하던 록사나의 모습을 떠올린 빅토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태자비 전하, 추우세요? 제가 가서 바로 숄을 챙겨 올게요.”
“아니야, 나가 봐.”
제인의 호들갑에 빅토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네, 그럼 저는 이만…….”
“아, 잠깐! 수고했어. 이거 가지고 가.”
“감사합니다, 전하.”
빅토리아가 작은 보석 귀걸이 한 쌍을 건네자, 제인이 기쁜 얼굴로 넙죽 이를 받았다.
“알지?”
“네, 물론이에요. 입단속 잘할게요!”
제인은 겁이 많은 만큼 조심성도 많았다. 그리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빅토리아는 제인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며 은밀하고 개인적인 일을 맡기곤 했다.
보석을 주머니에 잘 갈무리한 제인이 빅토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된 빅토리아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대체 남작이 어떻게 아르얀을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답답함에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더라면 록사나의 발언을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록사나가 콕 집어서 ‘은백색 깃털에 붉은 눈’을 가진 새를 언급했을 때만 해도 많이 놀라긴 했지만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가 황궁 쪽으로 날아갔다는 발언을 했을 때는 온몸의 피가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어!’
빅토리아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르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분명해!’
록사나가 아르얀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빅토리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황궁 쪽으로 날아, 갔다……. 오, 안 돼! 아르얀, 제발!”
아르얀이 황궁으로 오고 있다, 혹은 그가 수도에 있다는 말이 된다.
빅토리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끔찍하게 싫은 도노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오로지 아르얀을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힘이 없는 자인 그녀의 선택은 성공했다. 아르얀과 49호는 무사히 수도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이후, 큰 위험을 무릅쓰고 49호가 가끔씩 황궁에 잠입해 소식을 전해 주곤 했었다.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 빅토리아는 아르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랬는데 얄팍한 그녀의 평화가 오늘 파사삭 깨져 버리고 말았다.
빅토리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 당장 49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는 이상 먼저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다.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꼬리를 잡힐까 봐 연결 고리를 만들지 않은 탓이다.
‘아, 아르얀. 어쩌자고 수도에 다시 온 거야.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지!’
빅토리아의 밝은 갈색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르얀과 49호의 탈출 이후, 그녀의 아버지 로웰 후작은 수도와 제국의 모든 이름 있는 용병단에 두 사람에 대한 수배를 내렸다.
빅토리아가 막시밀리언을 낳고 일 년 후쯤, 로웰 후작은 타 영지 용병단에 했던 수배 의뢰를 취소했다. 그러나 수도 내 수배는 취소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아르얀과 49호가 지금 수도에 있는 거라면, 조만간 두 사람은 로웰 후작의 손에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빅토리아가 손을 들어 눈물을 쓰윽 닦았다. 지금은 마냥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록사나 아벨리오를 다시 만나서 진실을 들어야 해!’
도노반이 록사나에게 중매를 선 상황이라 그녀를 만날 자리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아버지와 도노반이 그녀의 돌발 행동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창밖으로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올 때까지도 빅토리아는 잠들지 못했다.
* * *
이른 아침부터 캠든 상단 수도 지부가 사람과 물품으로 북적거리며 몹시 분주했다.
그 사이를 잭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과 물품, 자리 배치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최종 점검을 했다.
“다들 빠진 것 없이 잘 챙겼죠?”
“네, 상단주님.”
“오늘 사람들이 많이 모일 테니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이내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이동했다.
잭이 상기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캠든 상단의 새로운 주력 상품인 연필과 지우개의 첫선을 보이고, 연필 그림 그리기 행사를 개최하는 대망의 날이었다.
그림 그리기 행사는 오후에 개최되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미리 방문하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매장 오픈 시간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잭이 창문 너머로 상단 정문을 막 통과하는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가 서둘러 현관 앞으로 나갔다.
마차가 본관 앞에 멈춰 섰다. 마르셀이 마차 문을 열어 주자, 록사나와 아이린이 내려섰다.
록사나의 캠든 상단 수도 지부 방문은 오늘로써 두 번째였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이른 시간부터 수고가 많아요, 잭 상단주.”
“별말씀을요. 이리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손님이 있을 때 오면 제대로 둘러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안으로 드시지요.”
“네, 잠시만요. 아이린, 나한테도 하나 줘.”
록사나가 잭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아이린은 마차에서 바구니들을 꺼냈다. 이를 마르셀이 돕고 있었다.
“어서 와요, 아이린 보좌관. 그런데 이게 다 뭡니까?”
잭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안녕하세요, 잭 상단주님. 이건 상단 식구들 먹으라고 남작님이 준비하신 아침 식사에요.”
이내 잭이 감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아직 아침 식사 전이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록사나는 살짝 멋쩍어졌다.
“아니에요. 이른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느라 아침 챙길 정신이 없었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큰 건 아니고 간단하게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 정도예요. 어쨌든 아침에 속이 든든해야 오늘 하루도 힘이 나죠. 자, 배고프니까 어서 들어가서 같이 먹어요. 우리도 아직 아침 안 먹었거든요.”
“네, 어서 들어가시죠.”
록사나가 묵직한 대나무 바구니 하나를 야무지게 챙겨 들었다. 그러자 잭이 록사나의 손에서 냉큼 그것을 빼앗아 들고서 앞장섰다.
어쩔 수 없이 록사나는 빈손으로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양손에 바구니를 든 아이린과 마르셀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