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안녕하세요, 마님. 앗, 록사나 님. 아니, 남작님……?”
그제야 록사나가 그녀를 다양한 호칭으로 호명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그녀를 붙잡아 끌어 올렸을 때,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하지만 사다리가 내려오기 전 테오도르가 리키라는 이름을 불렀던 걸 그 순간 기억해 내고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리키인가 보네.’
록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카일라니 공작가 쪽 사람인가 보군요. 이름은 리키고요.”
마님부터 시작해서 그녀를 휘황찬란하게 부를 만한 사람들은 그쪽밖에 없었다.
남자가 깜짝 놀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맞습니다. 제가 리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까 밑에서 테오도르 황자님이 리키를 불렀잖아요.”
“아!”
그때였다. 테오도르가 나무 위로 막 올라섰다. 록사나가 다 올라갔다고 생각될 때쯤에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뒤를 따랐었다.
“록사나, 어때요?!”
테오도르가 양손으로 밧줄 사다리를 서둘러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사이 리키가 다가가 테오도르를 거들었다.
잠시도 못 참겠다는 듯한 소년의 행동에 록사나가 활짝 웃어 보였다.
“완전 깜짝 놀랐어요. 나무 위에 멋진 통나무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록사나야말로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무 위 통나무집은 어린아이 놀이 수준의 규모가 아니었다.
무려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지붕 바로 아래에는 창문이 있어서 다락까지 딸려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내가 만든 건 아니에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요.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요.”
다시 꼬마 신사가 된 테오도르가 록사나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통나무집은 아주 오래전, 그의 형인 네이든과 아스테리온이 소년 시절에 만든 것이었다.
네이든이 사망한 후 통나무집은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아스테리온의 명을 받고 리키가 오게 되면서 테오도르에게 통나무집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테오도르의 비밀 기지가 되었고, 리키가 황궁에서 머무는 숙소이기도 했다.
테오도르의 안내를 받아 다락방까지 샅샅이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온 록사나가 감탄을 연발했다.
“전 황태자님과 카일라니 공작님은 참 대단하시네요. 정말 순수하게 두 분이서 지은 거라고요?! 그것도 삼 일 만에요?”
아직도 믿기지 않아 록사나가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테오도르보다 아스테리온을 더 오랜 시간 알아 온 리키가 나서서 대답했다.
“완전 괴짜에 괴물들이시네요.”
“맞아요! 나도 록사나랑 똑같이 생각했어요.”
테오도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도 이제는 또래들보다 힘이 많이 세져서 통나무 하나쯤은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집을 짓기 위해 통나무를 나무 위로 모두 옮기려면 최소 몇 주는 걸릴 거다.
통나무집의 주재료인 나무통의 굵기는 장난 아닐 정도로 두꺼웠다. 들어간 나무 양도 상당했다.
‘이걸 다 직접 손으로 옮겼다니!! 지금만이 아니라 십 대 때도 인간 외의 규격이었나 봐.’
록사나가 속으로 경악하며 혀를 내둘렀다.
“록사나, 여기로 앉아요.”
테오도르가 의자 하나를 빼 주었고, 록사나가 거기에 착석했다.
그사이 리키가 차 세트를 들고 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십시오.”
자신이 직접 차를 우리고 싶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리키가 선뜻 양보했다.
테오도르가 정성스럽게 차를 우리는 사이, 록사나가 리키 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경은 테오 황자님의 검술 스승이신 거죠?”
“네, 맞습니다.”
“언제부터요?”
“반년 정도 되었습니다.”
“음, 꽤 되었네요. 그런데 테오 황자님의 편지에는 경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는데…….”
캠든 상단이 수도에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전부터 록사나와 테오도르는 상단을 통해 남몰래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록사나, 그게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요. 그 카일라니 공작과 비밀로 하기로 약속을 해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록사나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테오도르가 안절부절못했다.
록사나는 소년을 조금 더 놀릴까 하다가, 점점 울상을 짓는 테오도르를 보고는 이내 포기했다.
“장난이에요, 황자님. 그리고 정말 잘하셨어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중요한 것들은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록사나. 그리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록사나가 표정을 원래대로 풀었음에도 테오도르는 움츠린 어깨를 펴지 못했다.
“아니에요, 황자님. 그나저나 카일라니 공작님과 약속을 못 지켜서 어떻게 해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얼마 전 공작님한테 허락을 받았거든요. 아, 그리고 캠든 상단으로 편지 보내고 받아 오는 걸 리키 경이 해 주고 있어요.”
록사나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비밀은 없다는 듯 리키 경이 해 주는 일을 덧붙였다.
“황자님, 차요.”
“아, 맞다!”
다 우려진 차를 리키가 가리키자, 테오도르가 세 개의 찻잔에 맑은 연두 빛깔의 찻물을 따랐다.
각자의 앞에 찻잔이 놓이고, 세 사람이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황자님, 차 우리는 솜씨가 뛰어나시네요.”
타국에서 건너온 그린티는 잘못 우리면 비린내가 나거나 떫은맛이 나기 쉬웠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우린 차 맛은 산뜻하면서도 그윽했다.
테오도르가 록사나의 칭찬에 기뻐했다.
“칭찬 고마워요, 록사나. 리키 경이 가르쳐 줬어요. 다양한 차를 접해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사실 이 차만 제대로 우릴 수 있어요.”
“다른 차도 배우고 싶으시다면 캠든 상단을 통해 보내드릴게요. 그 외에도 구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캠든 상단에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말해 놓을게요.”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테오도르는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록사나의 배려가 기꺼웠기 때문이다. 소년은 속으로 다짐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다음에도 록사나에게 맛있는 차를 대접해야지.’
찻물을 보며 록사나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두 사람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높아서 물을 떠 나르는 것도 일이겠어요.”
“주로 마실 물만 날라 와요.”
“그 밖에 사용할 물은 빗물을 받아 큰 통에 모아 둔 걸 사용합니다.”
테오도르와 리키의 말에 록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용할 물만 그때그때 옮겨 온다면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양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날이 점점 더 더워지고 여름이 되면 물통에 모기 유충이나 벌레가 잔뜩 꼬일 텐데요.”
“그렇겠지요. 그때는 물통의 물을 하루 주기로 자주 교체하려고 합니다. 여름에는 비도 자주 내리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다소 번거로운 일이기는 했다.
“리키의 말처럼 해도 괜찮겠지만, 더 편한 방법이 있다면 그게 더 좋지 않을까요?”
“뭔데요?”
“도와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록사나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 황자님, 제가 전에 드린 목걸이 지금 지니고 계시죠?”
“네!”
테오도르가 목에 건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내 보였다.
“그걸 잠시만 제게 주시겠어요?”
록사나의 요구에 테오도르가 스스럼없이 목걸이를 벗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령 목걸이를 받아 든 록사나가 두 손에 쥐고 힘을 모았다. 일부러 두 사람의 눈에 보이게끔 힘에 색깔을 입혔다.
록사나의 손안으로 푸른 기운이 모여들었다.
테오도르와 리키가 몹시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심지어 리키는 자신의 두 눈을 비빈 후, 다시 그것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로서는 태어나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반면에 테오도르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추운 겨울날, 차가운 물을 따뜻하게 만들려고 정령의 목걸이를 사용할 때마다 느꼈던 기운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걸이를 통해서가 아닌 사람이, 그것도 록사나가 직접 힘을 사용하는 건 테오도르도 처음 보았다.
‘정령의 목걸이 없이도 쓸 수 있는 힘이었다니.’
무척 신기해서 테오도르의 두 눈이 록사나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른 머리 크기만큼 둥그런 모양으로 뭉쳐진 힘이 순식간에 목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기운의 움직임에 세 사람의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가 가라앉았다.
“방금… 그 기운은 뭡니까? 주군께서 사용하는 오러와 어딘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성질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리키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록사나와 목걸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령의 힘이에요.”
“정령사? 아!”
리키가 단번에 알아듣고는 감탄했다.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하다니!’
한편으로는 이런 힘을 함부로 보여 준 록사나가 심히 염려되었다.
황자님한테만 중요한 건 말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녀야말로 함부로 힘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자신이 아스테리온의 사람이라도.
록사나는 태평하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지금 본 건 당연히 절대 비밀인 것 알죠?”
테오도르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키도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사의 예를 취했다.
“그냥 대답만 해 줘도 되는데요. 어서 일어나 자리에 앉으세요.”
“물론입니다.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주군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푸하하하!”
록사나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리키 경은 참 충직한 신하였다. 자신의 주군에게 비밀을 만들까 봐 염려하는 기사라니.
“카일라니 공작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리키 경이 죄책감에 시달릴 일은 없겠네요.”
“다행입니다.”
웃음을 멈춘 록사나가 해답을 건네자, 리키 경의 굳어 있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테오도르가 잘됐다는 듯 그런 리키 경의 팔을 두드리며 다독여 주었다.
“어쨌든 이 목걸이에 정화의 힘을 담았어요. 물통에 잠깐 넣었다가 빼면 통 자체에 힘이 깃들어서 석 달 정도는 위생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최소 1년간 사용할 수 있고요.”
“록사나,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록사나와 테오도르는 그 뒤에도 한참 동안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다.
록사나는 주로 자신이 하는 일과 캠든 영지를 중심으로 벌이는 정책들을, 테오도르는 훈련과 호아 궁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