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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13)화 (113/214)

113화 

세르지오의 보고를 다 들은 도노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첫 만남치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군. 내가 어렵게 마련한 자리일세.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영식들 중 한 명이 반드시 남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하네. 남작이랑 결혼하게 되면 영식들과 영식 집안에 좋은 일인 건 자명하고, 남작이 가진 게 그대로 다 영식들 재산이 되지 않겠는가. 캠든 상단이 요즘 제법 돈도 벌지만, 카일라니 공작이 위자료로 준 게 꽤 상당하다고 해. 그러니 다들 애써 보게.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내 기대하지.”

“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전하의 기대를 절대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세 사람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노반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들이 응접실을 떠나자, 도노반이 서랍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고 검은색 알약 같은 것을 물도 없이 입 안으로 꿀꺽 삼켰다. 이어서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도노반의 탁한 연보랏빛 눈이 순간 진한 자수정빛으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대체 언제까지 먹어야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약을 먹은 후, 잠시 동안 몸에서 희미하게 느껴졌었던 힘을 떠올리며 도노반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실에서는 리온 제국 건국 당시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감춰진 예언이 하나 있었다.

‘달빛을 머금고, 선명하고 온전한 자수정 안을 가진 자가 숨겨진 힘을 깨우리라. 그러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니.’

도노반이 은발과 자수정 눈동자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평범한 갈색 머리칼과 탁한 연보랏빛 눈에 열등감이 심했다.

물론 그나마 이 연보랏빛 눈동자 덕분에 현 황제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큰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가 빅토리아 로웰과 결혼한 이유.

귀족 영애들 중 빅토리아 로웰만이 황족의 은발과 비슷한 백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아들 막시밀리언은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에 연보랏빛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만약을 대비해 낳은 아들이었다.

도노반이 속으로 부질없는 불만을 쏟아 냈다.

‘처음부터 어머니가 은발에 선명한 자수정 안으로 낳아 줬더라면!’

이미 사망한 그의 이복동생이자, 전 황후가 낳은 네이든처럼 말이다.

7황자 테오도르 역시 은발에 선명한 자수정 안이었지만, 도노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테오도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찮은 상대라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치우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황실에서 사라졌던 그 특별한 힘을 하루빨리 얻고 싶다는 열망에 도노반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잘난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마저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아이린이 망을 보는 사이, 록사나가 덤불에 가려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담을 사이에 둔 작은 개구멍 너머에서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록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진짜 테오 황자님 맞으세요?”

“응! 큼큼.”

맞은편에서 테오도르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이어서 들려오는 노랫가락.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뒤의 한 소절을 록사나가 받은 후, 이내 둘은 합창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짧은 노래가 끝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내 테오도르와 록사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짧게 한 번 가르쳐드린 노래인데 이걸 기억하시다니.’

어릴 적 엄마가 불러 주던 자장가였는데, 테오도르와의 첫 만남에서 우리 둘만의 암호라고 하며 알려 줬었다.

“암호 확인했으니 저 지금 넘어가요.”

“응! 아니다. 네!”

록사나의 얼굴에 작은 볼우물이 패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를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을 소년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반년 사이에 테오도르의 말투가 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개의 황족들이 그러하듯 록사나에게 하대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에게 공대를 쓰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았다.

록사나가 어깨를 최대로 웅크렸다. 작은 구멍으로 머리부터 몸을 들이밀었다. 어깨가 꽉 끼었다.

“록사나!”

“테오 황자님.”

막 구멍을 빠져나오자, 테오도르가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록사나가 소년의 작은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를 이끄는 손에는 제법 힘이 있었다.

테오도르가 록사나의 모양새를 살피며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그녀가 걸친 망토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감사해요, 황자님. 못 뵌 사이에 키도 많이 자라시고, 어른스러워지셨어요.”

테오도르가 쑥스러운 얼굴로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쪽 팔을 내밀며 에스코트 자세를 취했다.

“록사나, 우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요.”

“네, 그렇게 해요.”

건너편에서 아이린이 망을 보고 있었지만,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테오도르가 머물고 있는 궁 뒤쪽의 깊숙한 숲속에 당도했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는 시각이라 숲에는 바깥보다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탁 트인 공간.

“이곳이 내 수련장이에요.”

“와, 안쪽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생각도 못 했어요.”

“교묘하게 감춰진 곳이라서 황궁의 높은 곳에서 바라봐도 눈에 안 띄어요.”

테오도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낡은 그의 궁에 딸린 이곳은 소년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울창한 이 숲은 리온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숲의 안쪽에는 수십 미터씩 하늘 높이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했다.

어떤 나무들은 십여 명의 성인이 팔을 뻗어 서로 손을 맞잡아야만 그 둘레를 겨우 온전히 감쌀 수 있었다.

테오도르가 수련장을 지나 한 거대한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처음이에요.”

테오도르가 록사나를 바라보며 눈을 별처럼 반짝였다.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꼭 뭔가 중대한 발표를 하거나 비밀을 말할 것처럼.

“록사나, 위를 봐요.”

“네?”

테오도르의 뜬금없는 요구에 록사나가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너무나 커서 목을 잔뜩 뒤로 꺾어야 했다.

“나무가 엄청 높아서 고개가 다 아프네요.”

록사나가 힐끗 옆을 보자, 테오도르 역시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있었다.

“응. 그래서 좋아요.”

테오도르가 나무 위를 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록사나의 시선이 테오도르의 손끝을 따라갔다.

“리키 경, 부탁해!”

그러자 하늘에서 밧줄 사다리가 주르르 내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디쯤인지 모를 나무 위에서 그것이 내려왔다.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두 눈과 입술이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테오도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밧줄 사다리가 두 사람의 발치 가까이까지 길게 늘어졌다.

테오도르가 밧줄 사다리의 한쪽을 단단히 붙잡았다. 발을 딛는 부분이 나무로 엮어져 있었다.

“록사나, 내가 밑에서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조심해서 올라가요.”

“나무 위에 뭐가 있나요?”

“네. 지금은 비밀이라서 말해 줄 수 없어요. 올라가면 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런데…….”

이내 테오도르가 록사나의 차림새를 보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록사나도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사다리를 오르게 되면 아래쪽에서 그녀의 치마 안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내가 두 눈 꼭 감고 있을게. 절대 위는 안 쳐다볼 거야!”

테오도르가 진지하고 살짝 초조한 표정으로 록사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록사나가 치마를 입고 있어서, 또는 힘들어서 나무에 안 올라간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반해 록사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드레스 안에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물론 속바지가 속옷이긴 했지만, 바지니까 어쨌든 큰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테오도르는 다 큰 성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라서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록사나가 자신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일부러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주셔야 해요. 그리고 제가 다 올라가서 됐다고 할 때까지는 절대 손을 떼시면 안 돼요. 아셨죠?!”

“걱정하지 말아요, 록사나!”

테오도르가 긴장을 풀고 비장한 표정으로 사다리를 잡은 손에 더욱 꽉 힘을 주었다.

이에 록사나가 허리를 숙여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 밑 부분을 묶어 정리한 후, 몸을 바로 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사다리 양쪽 줄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첫 번째 사다리 판에 한 발을 올렸다.

“저 진짜 올라가요.”

“네. 록사나 먼저 올라가요. 우리 위에서 다시 만나요. 그리고 조금만 힘내요!”

테오도르의 힘찬 응원을 받으며 록사나가 두 팔과 다리에 힘을 실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가끔 강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며 몸이 살짝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 즐겨 했던 그녀의 나무 타기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아래에서 사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많이 흔들리지는 않았고, 정령의 힘을 사용하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몇 분이 흐르고, 록사나의 발이 마지막 사다리 판을 밟았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불쑥 위에서 내려와 록사나의 양팔을 와락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단숨에 위로 확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록사나의 두 발이 단단한 곳에 내려섰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세상에나!!”

나무 위에 통나무집 한 채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록사나는 테오도르가 비밀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높은 곳에서의 경치를 보여 주고 싶어서 올라가자고 한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뒤엎었어!’

말을 잇지 못하는 록사나를 보며, 그녀를 끌어 올린 남자가 정신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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