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감히 황태자비 전하께, 로웰 영애라니!!
말로리 백작 부인은 록사나가 공작 부인일 때는 카일라니 공작의 뒷배를 믿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낱 쥐뿔도 없는 이혼녀인 주제에 뭘 믿고 저러는가 싶었다.
그때 말로리 백작 부인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꼴좋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작 부인이 아니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다른 영애와 부인들의 얼굴에도 비웃음이 잔뜩 서렸다.
“아벨리오 남작이라고 칭하시면 됩니다.”
록사나가 웃으며 똑 부러지게 맞받아쳤다. 말로리 백작 부인의 도발은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런데 다들 돌아가시는 길이신가 봐요.”
록사나가 영애와 부인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빅토리아와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빅토리아가 사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록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은백색 깃털에 루비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을 가진 새 한 마리 못 보셨나요?”
순간 빅토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록사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내 록사나의 시선이 빅토리아의 손으로 향했다.
록사나가 자신의 손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빅토리아가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며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빠르게 감추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이 대답을 해 주었다.
“못 봤는데요.”
“은백색 깃털에 붉은 눈이라니. 그런 새의 외양은 처음 들어 봐요.”
“저도요.”
한 영애가 은백색과 붉은 눈을 다시 한번 언급하자, 빅토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선이 모두 록사나를 향해 있었기에 아무도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록사나 말고는.
‘빅토리아, 당신은 아르얀을 알고 나도 아르얀을 알지.’
록사나가 말한 새의 특징은 아르얀의 머리와 눈동자 색이었다. 빅토리아라면 절대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록사나가 실망했다는 듯 살짝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군요. 제가 그 아름다운 새를 밖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 새가 자꾸 생각이 나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황궁 쪽으로 날아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황궁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를 했는데…….”
“그런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라면 황궁의 어느 귀한 분께서 기르시는 새겠죠.”
말로리 백작 부인이 록사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말로리 부인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네요. 어느 분께서 키우시는 새인지 알기라도 하면 한번 보여 주십사 하고 청이라도 드려 볼 텐데요.”
록사나가 빅토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새를 당신은 잘 알고 있지 않냐는 눈빛을 보내며.
록사나의 의도를 모르는 말로리 백작 부인이 빅토리아를 대신해 대답했다.
“우리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그런 새 같은 거 안 키우세요. 그렇죠, 비 전하?”
말로리 백작 부인은 빅토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비 전하, 어디 편찮으세요? 갑자기 이리 식은땀을 흘리시다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세요, 비 전하?”
“어의를 부를게요.”
말로리 백작 부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몹시 놀라며 빅토리아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밖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더니…….”
빅토리아의 파리한 입술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 전하, 어서 궁으로 돌아가시죠.”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오래 비 전하를 붙들고 있었던 바람에……. 이를 어째.”
그들이 수선을 피우며 빅토리아를 이끌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록사나의 존재는 잊은 채였다.
다만, 오직 두 사람만은 록사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찔리는 게 있는 빅토리아였다.
다른 한 사람은 말로리 백작 부인으로 이 사달이 모두 록사나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여기곤 그녀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떠나갔다.
‘눈치가 빠른 거야, 뭐야?’
핀트가 맞지는 않았지만 정확했던 말로리 백작 부인의 감들을 떠올리며 록사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내 록사나의 생각이 빅토리아에게로 향했다.
빅토리아는 침착함을 잃는 반응을 보였고, 그로 인해 록사나는 아르얀이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아주 가끔씩 빅토리아에게 아르얀의 소식을 전했다고 했었지.’
49호가 록사나에게 밝힌 사실이었다.
‘도노반과의 혼인이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진짜 속내를 모르겠어.’
빅토리아는 권력에 취한 사람처럼 황실과 사교계에 군림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황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 단둘이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가져야겠군.’
“영주님, 장미 정원 조금만 더 구경하고 가면 안 될까요?”
조용히 록사나의 옆을 지키던 아이린이 아직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다며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어, 그래. 저쪽으로도 가 보자. 확실히 5월의 장미는 예쁘네.”
잠시 멈춰 있던 록사나와 아이린의 발걸음이 정원 안쪽 깊숙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 * *
수도 카일라니 공작저.
록사나가 황태자 궁 티 파티 모임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스테리온은 안절부절못했다. 오후가 되자,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아스테리온에게 하나의 결과물이 당도했다.
아스테리온의 손길이 분주하고 거칠게 종이를 넘겼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주변에 냉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이 세 명이라고?!”
“네, 각하.”
트레버가 천연덕스럽게 외알 안경을 벗었다. 이내 손수건을 꺼내어 안경알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그의 주군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차분한 행동이었다.
“피라미에 잔챙이들만 모아서는 들이밀다니!”
아스테리온이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서류가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한 장이 나풀나풀 트레버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트레버가 말끔하게 닦은 외안경을 다시 눈에 걸쳤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밭 밑의 종이를 주워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눈으로 그것을 훑었다.
종이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인적 사항이 반듯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브루노 코니움, 케빈 메리오그, 세브리오 라눔.
“잔챙이들이니 처리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록사나 옆에 갖다 찍어 붙이려면 적어도 그녀보다 재산이 열 배 이상은 많고, 번듯한 후계자여야 할 것 아냐!”
아스테리온이 반듯하고 멋들어지게 매고 있던 에스콧 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리온 제국 내에서 미혼만을 추렸을 때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들이었다.
‘음, 인성까지 고려하면 다섯 손가락 안으로 줄어들겠군.’
트레버는 한참 기대에 못 미치는 세 영식들을 아스테리온이 앞으로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며 주시할 거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다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들의 목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원래도 무서운 남자였지만, 질투의 화신이 된 아스테리온은 무시무시한 집착남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혼을 왜 하셔서는!’
트레버는 차마 대놓고 내뱉을 수 없어서 마음속으로 아스테리온을 흉봤다.
“그자들이 록사나에게 부린 수작질도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각하의 기준을 통과하는 자들이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아스테리온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트레버가 한 발 뒤로 몸을 뺐다.
이럴 때는 직방으로 듣는 특효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특효약을 써먹을 절체절명의 타이밍이었다.
“록사나 님께서 로스팅한 커피 원두를 새로 보내오셨습니다.”
자꾸 깐족거리는 트레버에게 던질 무거운 것을 찾아 주변을 훑던 아스테리온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바로 라테로 가져와. 그리고 보답으로 꽃을 보내야겠군. 어떤 꽃으로 보내냐면… 아니야, 내가 이따 직접 가서 고르도록 하지.”
빨리 커피나 내오라는 듯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휘저었다. 이에 트레버가 커피를 핑계 삼아 집무실 밖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후, 프란시스가 쟁반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데워진 커피 잔에 따뜻한 우유를 적당히 붓고, 커피 원액을 그 위에 따랐다.
은은한 라테 향이 집무실을 채우며 날카롭던 공기를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아스테리온이 프란시스가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 록사나에게서 풍겨 오던 향을 맡으니 들끓고 있던 그의 속이 차츰 안정을 찾아 갔다.
사실 아스테리온의 입맛에는 깔끔한 맛의 아메리카노가 더 입에 맞았다. 하지만 그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은 록사나가 즐기는 라테였다.
* * *
“그래,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지?”
도노반은 반쯤 헐벗고 있었다. 느슨하게 묶은 긴 가운을 걸친 상태에서 그가 의자에 눕다시피 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손에는 붉은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세브리오가 다른 두 사람보다 재빨리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차 이야기를 시작으로 캠든 상단에서 곧 출시될 상품인 새로운 필기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커피라는 처음 들어 보는 차와 연필과 지우개라는 잉크 없는 필기구 등 네 사람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세세하기 보고했다.
그 옆에서 케빈은 혼자서만 모든 내용을 보고하는 세브리오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브루노는 그저 자신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브루노의 아버지인 코니움 후작은 도노반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아들인 그도 자연스럽게 도노반을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덕분에 캠든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인 록사나를 만날 기회를 손쉽게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황태자파는 아니었다.
‘과연 아버지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브루노가 보기에 코니움 후작은 겉만 번지르르한 부실한 배에 올라탄 것처럼 보였다.
도노반은 황태자로서뿐만 아니라, 황자로서도 눈에 띄는 능력이 없었다. 브루노는 사생아로서 눈칫밥 먹으며 살아온 자신의 감을 믿었다.
‘황태자보다는 아벨리오 남작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훨씬 이득이야. 마침 구혼한다는 적절한 구실도 있으니 제격이고.’
브루노는 코니움 후작가가 흥하든 망하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