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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11)화 (111/214)

111화 

“다들 좋은 때지요.”

위즐리 공작이 맞장구를 쳤다. 이들 중 유일하게 부부 동반 참석자였다. 그 뒤를 이어 다소 몸에 살집이 있는 티슬 자작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가 자리를 비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 저희가 눈치가 없었네요.”

“저는 다른 용무가 있어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

“나도 업무가 바빠 오래 못 있겠군. 먼저 일어나지. 남작, 좋은 시간 보내게.”

황태자가 몸을 일으켰다. 진득한 눈빛과 함께 그의 왼팔은 화사한 은발을 지닌 모니카 튜베의 허리에 단단히 둘러져 있었다.

록사나는 그런 도노반의 모양새가 퍽 우스웠다. 황궁 업무가 바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업무로 바쁠 예정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앳된 얼굴의 모니카는 도노반의 여러 정부 중 한 명이었고, 남작가의 영애였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었다.

도노반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모니카와 함께 후원에서 멀어져 갔다.

‘하고 많은 황제의 자식들 중에 저런 자가 어떻게 로웰 후작을 사로잡아 황태자까지 되었을까?’

도노반의 인성이나 능력을 봤을 때 그는 결코 황태자 감이 아니었다.

이내 다른 귀족들도 이후에 약속이 있다거나 다른 일정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우르르 후원을 벗어났다.

후원에 남게 된 사람은 당연하게도 록사나와 세 영식들뿐이었다.

시종들이 재빨리 네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새 차와 다과를 가져와 네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록사나가 시종이 새로 따라 준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가향된 향이 너무 강해 그녀의 취향과 안 맞았다.

적갈색 머리칼의 세브리오가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아벨리오 남작님과 함께 마셔서 그런지 차향이 무척 좋군요.”

“동감입니다. 역시 황실에서 즐겨 마시는 차라 그런지 다르군요.”

케빈이 더티 블론드색 머리칼을 우아하게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칼 색은 그의 자랑이었다.

‘한쪽은 말이 번지르르한 게 아부에 능할 것 같고, 다른 한쪽은 허영심이 강한 것 같네.’

과연 나머지 다른 한 명은 어떨까.

“제 차 취향은 아니군요. 향이 너무 강해서 머리가 조금 아플 지경입니다.”

브루노의 솔직한 발언에 록사나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흠흠, 그렇지요.”

케빈과 세브리오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의 경쟁자이자 어쨌든 록사나의 관심을 끌어내야 하는 동지였다.

반면에 브루노는 차를 평하는 것에서 말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다.

“남작님은 차가 입에 맞으십니까?”

“아니요, 저도 취향이 아니네요.”

딸깍.

록사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들과 상반되는 록사나의 반응에 세브리오와 케빈의 표정이 동시에 확 굳었다.

록사나와 브루노는 이를 모른 척했다. 잠시간 그들 사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요.”

이내 록사나가 조금 전 케빈이 했던 말을 되읊었다. 점점 딱딱해지려던 분위기가 그녀의 한마디에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네, 맞습니다. 남작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차를 좋아하십니까?”

“영지 경영으로 바쁘실 텐데 차 마실 시간이나 있으실까요?”

세르지오와 케빈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거기에 브루노 역시 가세했다.

“캠든 상단이 요즘 수도에서 많이 뜨고 있더군요. 지금 판매하시는 상품 말고도 조만간 다른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 있으십니까?”

모두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질문들이었지만 한꺼번에 받으니 정신이 없었다.

록사나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참에 홍보나 잔뜩 하고 가자.’

도노반의 초대에 응한 것이 그녀에게는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렇게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록사나가 하나씩 차근차근 그들에게 답을 해 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세 남자의 눈이 처음 듣는 용어에 동그래졌다.

“저는 커피를 가장 좋아해요.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커피는 꼭 하루 서너 번 이상 챙겨 마신답니다. 그 낙에 일하기도 하지요.”

“커피가 뭡니까? 새로운 차입니까?”

“커피요? 처음 들어 보네요.”

“커피? 그게 뭐죠?”

세 남자가 동시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록사나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커피는 제가 요즘에 즐기는 음료 중 하나인데, 차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하지만 아직 판매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나중에 출시된다는 이야기군요. 그 커피라는 것도 캠든 상단 상품인 겁니까?”

“아니에요. 저도 우연히 접하게 된 거라……. 제가 건너 듣기로는 조만간 커피 음료가 다양하게 출시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가 되면 영식들께서도 커피를 접해 볼 기회가 오겠죠.”

록사나가 모든 정보를 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브루노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커피는 이 정도면 됐어.’

록사나는 커피 판매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제공한 커피 레시피에 대한 로열티를 지급받기로 했다.

커피 원두의 공급과 판매, 유통은 전적으로 오스카 대공자가 전담한다.

만약 대공자와 문라이트 상단 사이에 계약이 성사된다면 리온 제국에서는 문라이트 상단이 커피 판매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록사나가 잠시 목을 축였다. 그녀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코니움 영식께서는 저희 캠든 상단에 대해 관심이 참 많으시네요.”

“제가 장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요즘 캠든 상단이 수도뿐만 아니라, 타 영지에서도 한창 뜨고 있어서 저절로 눈이 갑니다. 특히 동물 귀 머리띠랑 날개옷, 어찌 그런 상품을 판매할 생각을 하셨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브루노의 눈빛은 날카로우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했다. 실제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의 눈빛만은 진실해 보였다.

“저는 자금만 대고 모든 건 상단주가 다 알아서 했답니다. 제가 참 운 좋게 좋은 상단주를 만났지 뭐예요.”

“그렇군요.”

브루노가 사실을 가늠하듯 살짝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가 이내 넘겼다.

“그리고 조만간 필기구를 하나 출시하는데 잉크 없이 간단하게 사용하는 필기구예요. 그 필기구를 사용한 그림 그리기 대회를 연다고 하더라고요.”

“잉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요?”

“잉크 없이 필기를 어떻게 합니까?”

세르지오와 케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브루노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필기구는 단연 잉크와 펜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캠든 상단에서 뭔가를 홍보하던데, 그 필기구였나 보군요. 그것이…….”

세르지오가 며칠 전 상업 지구를 지나다가 귀로 흘려들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물건의 이름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에 록사나가 대신 말했다.

“연필하고 지우개요.”

“그겁니다, 연필, 지우개!”

“시간 되시면 세 분도 한번 캠든 상단에서 열리는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여해 보세요. 참가비도 전혀 없고, 새로운 필기구를 처음으로 직접 사용해 보실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유쾌한 경험이 되실 거예요.”

록사나가 넌지시 말했다.

세 남자는 그녀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남자와의 맞선(?)은 그렇게 록사나에게는 캠든 상단과 제품을 홍보하는 쓸모 있는 시간으로 변모되었다.

* * *

제법 시간이 흘러 자리를 파했다. 세 남자는 자신들은 조금 더 머무르다 갈 거라고 말했다.

‘도노반에게 경과를 보고하려는 거겠지.’

록사나가 혼자서 황태자 궁을 빠져나왔다.

입구 밖에서 아이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영주님.”

아이린이 록사나의 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내 뒤에 뭔가 있어?”

【 저 사람이 왜 저기에?! 】

록사나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황태자 궁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건물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그녀의 뒤에 아무도 없었다. 록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아니요. 그냥요.”

아이린이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그녀는 록사나의 맞선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혹시나 그 상대가 뒤따라 나오는 건 아닐까 해서 자신도 모르게 보인 행동이었다.

“가자, 아이린.”

“네, 남작님. 그런데 저… 돌아가기 전에 장미 정원 좀 잠깐 구경하고 가면 안 될까요? 이맘때쯤 정말 아름답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아이린은 황궁이 처음이지?”

“네! 그래서요, 저는 황궁에 언제 다시 와 볼지 모르잖아요. 꼭 한번 그 유명한 장미 정원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남작님 시간 많이 빼앗지 않을게요.”

아이린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록사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잠깐만 들렀다 가자.”

“네! 정말 감사해요, 남작님.”

두 사람의 발걸음이 황궁 서쪽에 위치한 장미 정원 쪽으로 향했다.

사실 록사나는 은밀히 들를 곳이 있었다. 그래서 사전에 아이린과 말을 맞춰 둔 것이다.

두 사람이 막 장미 정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오는 한 무리의 여자들과 마주쳤다.

무리의 선두는 빅토리아였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물론 한 번쯤은 자연스럽게 마주쳤으면 하고 바라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빅토리아의 옆에서는 말로리 백작 부인이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정 거리를 두고 록사나의 앞에서 딱 멈추었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

촤악. 말로리 백작 부인이 부채를 펼쳐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에 따라 레이스 부채가 살살 흔들렸다. 드러난 눈빛은 매서웠다.

“안녕하세요, 로웰 영애. 그리고 말로리 부인, 오랜만이네요. 다른 부인들과 영애들도요.”

록사나는 마음 같아서는 인사 따위 집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괜한 시비거리는 만들고 싶지 않아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빅토리아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고, 말로리 백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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