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시벨린 백작은 그 아비보다 더한 인물로 폭력적이고 방탕하며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는 문란하고 비도덕한 작자입니다.
그리고 왕은 바이올렛에게 공주에 준하는 대우와 교육을 해 주겠다는 명목하에 제 딸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어머니 같은 일이 발생지 않도록 바이올렛이 성인이 될 때까지 궁 안에 가두겠다는 심산입니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막아 내고 있으나 점점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무척 간절합니다. 제 옆에 계셔 주셨더라면……. 원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댈 이 하나 없는 것이 참으로 서럽습니다.
아버지, 제발 우리 바이올렛을 살려 주세요. 크로커스 왕과 왕실, 시벨린 백작의 손에서, 더 나아가 크로커스 왕국에서 제 딸을! 아버지의 손녀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바이올렛에게 절대로 어머니와 같은 상황과 아픔을 겪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부디 못난 이 아들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마시고, 제발 들어주십시오!
이 대륙 어딘가에서 아버지께서 여전히 살아 계실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언제 언제나 건강하시길 신께 기도합니다.
추신 : 혹시 몰라 두 통의 편지를 작성합니다. 한 통은 바이올렛에게 맡기고, 다른 한 통은 제가 직접 들고 까마귀를 찾아갈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들고 가는 서신에는 혹시 몰라서 어디로 향하고,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중요한 정보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당신의 아들, 아몬 올림]
아몬은 바이올렛에게 비밀 편지를 남기며 휴고의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었다.
그리고 아몬은 까마귀 길드로 향하는 도중에 정체 모를 이들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아들의 죽음을 말하는 휴고의 얼굴은 비통했다.
록사나의 손수건은 어느덧,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프리다 역시 이미 한 번 들은 내용이었음에도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럼 휴고가 까마귀 길드에 도착했을 당시 바이올렛은 어떻게 해서 그곳에 있었던 거예요?”
“하늘이 도왔습니다. 아몬이… 죽어 가는 와중에 한 아이에게 돈을 쥐여 주며 까마귀 길드에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까마귀 길드에서는 그 편지를 받고 곧바로 바이올렛이 있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바이올렛은 왕궁으로 끌려간 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똑똑한 바이올렛이 그들이 한눈을 판 틈에 도망을 쳐서 제 발로 직접 까마귀 길드까지 찾아왔답니다.”
엄숙하고 경직되었던 휴고의 입꼬리가 손녀의 대견함에 위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참으로 영특하네요.”
록사나와 프리다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떠오르며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크로커스 왕국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바이올렛을 찾고 있습니다. 철통 보안을 유지하며 최대한 빠르게 리온 제국으로 넘어왔지만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케일라는 제국의 수도인 만큼 드나드는 외지인들이 많은 곳이지요.”
휴고가 시선을 들어 록사나를 직시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록사나 님, 제 손녀 바이올렛을 캠든 영지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휴고가 소파에서 장신의 몸을 일으켜 록사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기사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처럼.
록사나는 휴고가 자신을 주군으로 모실 마음으로 하는 간곡한 부탁임을 알았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하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소중한 혈육을 간신히 찾고, 손녀의 안전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인데 어찌 아니 그럴 수 있으랴.
록사나가 마주 일어나 휴고의 커다란 몸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물론이에요, 휴고. 휴고와 바이올렛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제 힘닿을 때까지 할 거예요. 그러니 어서 다시 자리에 앉으세요. 이제 휴고는 할아버지라서 손녀랑 오순도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몸을 항상 잘 챙기셔야 해요.”
휴고와 프리다가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20대 외모라지만 이제 휴고는 손녀를 둔 할아버지였다.
“록사나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저는 아들의 죽음을 파헤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에요. 반드시 그들을 찾아내 빠른 시일 내에 휴고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요.”
록사나와 휴고는 그녀가 캠든 영지로 내려갈 때 바이올렛을 함께 데려가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전에 휴고가 바이올렛을 데리고 인사차 저택에 한 번 방문할 예정이었다.
휴고와 프리다가 떠난 이후에 저택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록사나의 부탁으로 휴고가 데려온 파견 고용인들이 곧바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록사나를 대신하여 그들이 머물 임시 숙소를 안내하고, 근무 위치와 업무를 배정했다. 몇 시간 후, 저택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 * *
며칠 뒤, 록사나는 아이린과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노반에게서 티 파티 모임 초대장이 다시 왔기 때문이다.
황태자 궁 앞에 당도하자, 시종 한 명이 록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린은 시녀 전용 공간으로 안내되었고, 록사나는 시종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내된 곳은 꽃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후원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이 도착했습니다.”
록사나의 등장에 일순 사람들의 소리가 멎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록사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록사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도노반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제국의 미래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남작. 귀한 얼굴을 이제야 보게 되는군.”
거만한 자세로 상석에 자리하고 있던 도노반이 고개만 아주 살짝 까닥였다.
“송구합니다.”
도노반은 일부러 록사나를 인사하던 자세 그대로 잠시 동안 세워 두었다.
그녀의 기를 초장에 꺾고 기선 제압을 하려는 수작임을 록사나는 단번에 간파했다.
‘역시 속 좁은 자야. 날 이용해 먹으려면 환심을 사도 모자랄 판에 권력으로 찍어 누르다니.’
게다가 테오도르 황자와 막시밀리언 황세손 사이의 누명 사건을 도노반은 깔끔하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 자신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더랬다.
‘아마도 내 효용이 아쉬우니까, 쿨한 척하는 거겠지.’
록사나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전혀 느끼지 못할 정령의 힘을 미약하게 운용했다.
그래서 자세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은 힘들어 보이도록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게.”
“감사합니다.”
록사나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빈자리로 향했다. 오직 한 곳이 비어 있었는데 가장 말단이었다.
슬쩍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역시나 도노반에게 붙은 10여 명의 귀족파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로웰 후작이나 빅토리아는 없었다.
록사나가 자리에 착석하자, 그녀의 앞에도 찻잔이 놓이며 찻물이 따라졌다.
“그래, 남작. 오랜만에 수도에 오니 어떤가?”
“수도는 너무 번잡해서 한적한 제 영지가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네가 있는 수도는 오기 싫었다는 말을 돌려서 했지만 도노반이 이를 알 턱이 없었다.
“역시 아벨리오 영애는 이혼 후 시골로 가더니 그곳이 적성에 맞나 봅니다.”
게르텔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록사나를 남작이란 공식적인 호칭 대신 영애라고 칭하며, 시골이 딱 네 수준에 맞는 것 아니겠냐는 사교계 언어를 구사했다.
“어머, 사교계 소식이 빠른 수도에서 게르텔 백작 부인께서는 제가 남작 위를 이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시나 봐요. 소식에 어두우시면 그럴 수도 있죠.”
록사나가 생긋 웃으며 순진한 얼굴로 응수했다.
게르텔 백작 부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동안 사교계 참석이 드물었고, 하녀 출신 하급 귀족이라는 배경 때문에 사람들은 록사나를 쉽게 보았다.
그렇다면 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록사나는 그들의 뜻대로 꼭두각시 인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노반의 경계심을 높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당히 만만하게 보이되, 또 적당히 까다롭게 굴 예정이었다.
“아벨리오 남작이 이제는 혼자가 되었고, 아직 한창 젊고 아름다우니 게르텔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것 같네요. 영애 시절의 남작을 만난 적은 없지만 왠지 지금 못지않게 예뻤을 거 같은데 말이에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호호, 호호호.”
도노반의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위즐리 공작 부인이 슬쩍 말을 보탰다.
그러자 게르텔 백작 부인이 망신당할 뻔하다가 겨우 살았다는 표정으로 냉큼 이에 호응했다.
“자자,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남작을 위해 특별하게 마련한 자리가 아니던가.”
도노반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캠든이 아무리 작은 영지라고는 하나 여자 혼자서는 적잖이 힘들지. 이럴 때 좋은 사람을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면 큰 힘이 될 걸세. 그래서 이 자리에 훌륭한 영식들을 초대했다네. 남작보다 다들 두어 살 정도 어리네. 이왕이면 배우자가 젊은 게 좋지. 암, 그렇고말고. 게다가 모두 결혼한 적이 전혀 없는 미혼들이야. 어서 서로 인사들 나누게.”
도노반은 은근한 시선으로 록사나의 이혼 전적까지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자비로운 척 굴었다.
이때만을 기다린 듯 세 명의 영식이 록사나를 향해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제법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적당히 멋을 낸 차림새였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브루노 코니움입니다.”
그는 코니움 후작가의 셋째 아들로 사생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케빈 메리오그입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저는 세브리오 라눔입니다.”
록사나가 그들의 신상을 떠올렸다.
케빈은 백작가의 둘째, 세브리오는 자작가의 다섯째였다. 세 사람은 록사나보다 작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다.
또한 모두 작위를 잇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집안이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귀족 사회에서 세력이 약했다.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드는 록사나의 얼굴에 아무도 모르게 냉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허허, 선남선녀들끼리 참 보기 좋습니다.”
록사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저스티샤 백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