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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9)화 (109/214)

109화 

그사이, 록사나와 휴고가 대화를 이어 갔다.

“휴고, 제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당분간 고용인 채용 걱정은 덜었어요.”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사실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휴고가 제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뭔지 상당히 궁금하네요.”

“제게 손녀가 있습니다.”

“손녀라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록사나가 화들짝 놀랐다.

휴고의 겉모습은 20대 중후반으로 보이지만, 하프 엘프인 그의 나이가 사실 꽤 많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벌써 손녀까지 있다니!’

록사나는 심지어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개인사를 이야기해 줄 의무 같은 건 없지만 말이다.

“제가 록사나 님을 꽤 놀라게 해드렸군요.”

“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손녀라니,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요.”

휴고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손녀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게는 따스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손녀가 몇 살이에요?”

“바이올렛은 올해로 열 살입니다.”

“예쁜 이름이에요. ‘사랑’이라는 뜻이라니.”

“실제로도 어여쁜 아이입니다.”

“휴고의 손녀라면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록사나의 말을 긍정하며 휴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보랏빛 긴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살짝 물결쳤다.

록사나는 휴고의 부탁이 바이올렛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여겼다.

“먼저 제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휴고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오래전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었다. 지금으로부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60여 년 전, 휴고는 상단을 이끌고 간 크로커스 왕국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 글로리아나를 처음 만났다. 만 하루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운명처럼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휴고가 눈을 떴을 때 글로리아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글로리아나를 매일같이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왕국의 거의 모든 정보 길드와 용병대에 의뢰해서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진 건 당연했다.

상단의 일정을 늦추면서까지도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상단의 일정을 지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크로커스 왕국을 떠나 다른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을 떠나기 전 그는 크로커스 왕국 내 최고 정보 길드인 까마귀에게 거액의 의뢰를 맡겼다. 반드시 글로리아를 찾아내라고.

그로부터 몇 달 후, 타 왕국에서의 상단 일정 중 급한 일들만 처리하고, 휴고는 다시 크로커스 왕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기다리는 건 글로리아나를 찾지 못했다는 답변뿐이었다.

휴고는 포기하지 못하고 몇 년을 더 크로커스 왕국에 머무르며 소득 없는 나날을 보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휴고는 까마귀에게 글로리아나를 찾는 의뢰를 지속시킨 채, 리온 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0년, 20년, 그리고 어느덧 40여 년 가까이 되어 가며 까마귀의 수장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나 소득이 없었다.

이제는 과연 글로리아나가 살아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만약 살아 있다면 예순 언저리쯤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벌써 흙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휴고의 마음속에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하프 엘프인 그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무척이나 짧았다. 평민이 예순을 넘기면 장수하는 편이었고, 귀족들이라고 하더라도 평민보다 조금 더 수명이 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고는 까마귀에게 했던 의뢰를 도저히 철회할 수가 없었다. 취소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휴고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은 정말 한순간에 기적처럼 찾아왔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석 달 전쯤이었다.

까마귀에서 최상급의 긴급을 뜻하는 붉은 리본을 매단 전서조가 문라이트 상단으로 다급하게 날아들었다.

‘의뢰 완수 임박’이라고 적힌 한 줄의 쪽지.

휴고는 망설임 없이 곧장 크로커스 왕국으로 향했다. 미친 듯이 밤낮으로 달렸다.

까마귀의 본거지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글로리아나가 이미 3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놀라운 사실들.

글로리아나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녀의 외아들 아몬 역시 휴고가 크로커스에 도착하기 약 반년 전 의문의 사고를 당해 사망을 한 상태였다.

사망 당시 아몬의 나이는 막 서른여덟 살이 지났고, 생부가 누구인지 모르나 글로리아나를 닮은 은발에 청회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고. 어쩌면 휴고의 아들일 확률이 높다고.

살아온 세월이 길어 감정이 무디었던 휴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청회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글로리아나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니……. 그 아이가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던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하물며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 품에 안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끝없는 후회가 그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렇게 휴고가 까만 어둠 속 절망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할아버지, 울지 마세요. 흐아앙.’

어린 소녀가 그를 따라 울며 작은 손에 손수건을 들고는 그의 눈가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손길이 자신의 몸에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휴고였지만 그 여린 손길조차 뿌리칠 힘도 정신도 그 무엇 하나도 없었다.

언뜻 희뿌옇고 불투명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

소녀의 정성으로 희끄무레하던 휴고의 시야가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연보랏빛 머리칼에 청회색 눈을 가진 어린 소녀. 그의 눈에 헛것이 보였다.

환상일까. 아니면 죽었다는 그녀가 살아 돌아와 갑자기 어려지기라도 한 것일까. 글로리아나를 빼닮은 소녀였다.

휴고가 정신을 여전히 못 차리는 와중, 까마귀의 길드장이 직접 앞으로 나서서 어린 소녀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소녀의 이름은 바이올렛 문 크로커스. 글로리아나의 손녀이자, 아몬의 딸이라고.

즉, 바이올렛은 휴고 문 아코니테의 손녀였다.

“글로리아나는 크로커스의 왕녀였습니다.”

“그래서 휴고가 그분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거군요.”

록사나가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슬쩍 훔치고는 시큰한 코까지 흥 하고 풀었다.

“어쨌든 마침내 그분의 소식을 알게 되고, 두 분의 혈육을 찾게 되셔서 참 다행이에요.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록사나 님.”

록사나가 긴 시간의 이야기로 목이 마를 휴고를 위해 따뜻한 물을 새 잔에 따라 주었다.

휴고가 록사나의 호의에 눈인사를 살짝 건네고, 잠시 목을 축였다.

“제 아들… 아몬이 바이올렛에게 편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그 안에 제가 궁금해하던 내용들이 일부나마 담겨 있었습니다.”

휴고는 목이 메어 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크로커스 왕실에서는 글로리아나를 그녀보다 나이가 두 배 이상 많은 늙은 백작과 강제로 혼인을 시키려고 했답니다.”

휴고가 이를 아득 갈았다. 평소에는 냉철한 성향인 휴고가 분노할 만했다. 피치 못한 사정이나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결혼을 피하기 위해 고민했고, 그 백작이란 인간 말종이 처녀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휴고의 얼굴에 잠시간 씁쓸함이 스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록사나는 백작이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놈임에 틀림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글로리아나는 저를 만나 함께 밤을 보냈고, 아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것까지 그녀가 바라던 바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원치 않던 결혼은 깨졌고, 그녀의 이복 오라비인 왕을 비롯해 왕실은 분노했습니다. 결국 왕실에서 내처지게 되었고, 그녀는 혼자 아몬을 낳아 키웠습니다.”

휴고는 말을 이으면서 침잠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홀로 당황했을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왕실의 어떤 지원도 없이 어렵게 살아야 했던 두 모자에게 자신은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들이 유언처럼 남긴 편지를 처음 손에 쥔 날부터 내려놓지 못했다. 읽고 또 읽고 한동안 가슴에 품고 다녔다.

휴고가 편지 속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어떤 거짓도 없이 록사나에게 말해야만 했다.

[…아버지, 저희 모자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어머니도 저도,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께서는 본인의 죄로 인해 아버지께 짐을 지울 수가 없어서 이름을 밝히지도, 아버지를 찾지도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꿈만 같은 그 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지니고 계셨던 목걸이를 몰래 가지고 나오셨다는군요.

덕분에 제가 이렇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징표로써, 그리고 바이올렛이 제 딸이자 아버지의 손녀라는 징표로써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까마귀를 통해 당신을 계속 찾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그 사실과 아버지께서 하프 엘프라는 사실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어려움이 닥친다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제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희 바이올렛을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아버지를 뵙고 직접 부탁드리고 싶지만, 이 편지가 전해질 때쯤이면 저는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바이올렛의 생모는 바이올렛이 다섯 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저희 부녀는 슬픔 속에서도 더욱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이올렛은 제 전부입니다.

그런데 오래전 끝난 거라고 생각했던 지독한 악연이 저희 부녀를 덮쳐 왔습니다. 선대 시베릴 백작이 어머니께 강제 결혼을 시도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아들인 시베릴 백작이 우리 바이올렛을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 바이올렛은 이제 겨우 아홉 살입니다!

그 작자가 언제 어디에서 바이올렛을 보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딸이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혼인하고 싶다고 왕실에 혼담서를 넣었고, 왕은 이를 당연하게도 승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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