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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8)화 (108/214)

108화 

‘이혼했다고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내일 점심때 문라이트 상단주님과 약속이 있으시잖아요.”

아이린은 록사나의 점심 약속과 오후 티타임 시간 사이에 간격이 촉박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래서 거절하려고.”

록사나가 다시 펜과 종이를 집어 들고 서신을 작성해 나갔다. 잉크가 마르자마자 서신은 그녀의 손을 떠나 황태자 궁으로 향했다.

* * *

이른 아침부터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찾아왔다. 일전에 작성했던 집 구매 대금 지불 계약서를 들고서였다.

“안드레아스를 통해서 보내면 될 것을요.”

“안드레아스가 바빠서.”

계약서를 받아 들고 아스테리온의 사인 여부와 변경된 내용은 없는지를 살피던 록사나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는 표정으로.

아스테리온은 머쓱해졌다. 이내 사실을 고백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보고 싶어서.”

“네? 뭐라고요?”

록사나는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그녀가 아는 이 남자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라도 안 오면 그대 얼굴 보기가 힘들 거 같아서 겸사겸사 내가 온 거야.”

말하면서도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감추기가 힘들었다.

아스테리온이 직설적으로 이유를 밝히자, 이번에 곤란해지는 쪽은 록사나였다. 그녀의 눈이 옆으로 도르륵 굴러 그의 얼굴을 비껴났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스테리온의 말 한마디에도 자신은 이리저리 찔리곤 아파했었다.

그래서 거절을 하더라도 자신만은 상처가 되는 말을 피하고 싶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솔직함에 곤란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아스테리온이 화제를 돌렸다.

“황태자가 티타임 초대장을 보냈다면서.”

“제가 거절 답장을 보냈다는 것도 알겠네요.”

록사나는 그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았다.

당장 아스테리온에게 적절하게 거절 의사를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응할 때까지 계속해서 보내올 거야.”

“알고 있어요. 한 번은 응할 생각이에요. 그래야 황실 사교 무도회 때까지는 그나마 덜 귀찮게 할 테니까요.”

아스테리온은 나쁘지 않은 대처법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실제로 그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지만.

자신이 막아 줄 테니 참석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다 거절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록사나의 선택을 존중했다.

“황실 무도회 파트너는 정했어?”

“아니요.”

록사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파트너를 알아볼 시간도 없었거니와 마땅한 사람도 없어서요. 이제부터 찾아볼까 봐요.”

아스테리온의 눈에 푸른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누군가 그녀의 옆에 선다고 생각하니 목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록사나의 파트너는 그 하나였다. 앞으로도 그 옆자리는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욕심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온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스테리온은 오늘 방문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사나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그에 맞게 대처법을 세우면 된다.

* * *

“어서 오세요, 휴고.”

“안녕하세요, 록사나 님. 수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록사나가 일어나 휴고를 맞이했다.

“아니에요. 먼저 연락을 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먼저 청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휴고와의 인사가 끝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부단주에게 록사나가 다가갔다.

“프리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록사나 님.”

록사나가 프리다를 꼭 끌어안자, 그녀도 록사나를 마주 안았다. 프리다의 키가 훨씬 컸기에 록사나가 그녀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정말 많이 자라셨네요.”

프리다의 말에 록사나가 웃음을 왈칵 터뜨렸다. 그녀 나이가 올해로 스물다섯이 되어 갔다. 다 큰 성인한테 많이 자랐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록사나는 프리다가 말한 바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 만나기 전까지 프리다는 소녀 시절의 록사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그 이후로는 둘이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마주 앉자, 때마침 아이린이 대접할 차를 내왔다.

록사나는 아이린을 자신이 보좌관이라고 알리며 프리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휴고는 전에 캠든 영지를 방문했었기에 아이린과는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둘은 눈인사를 가볍게 나누었다.

“차향이 독특합니다.”

“저도 이런 차는 처음 마셔 봐요.”

“커피 음료예요. 커피 원액에 물을 섞었는데 이건 아메리카노라고 해요.”

휴고와 프리다가 관심을 보이자, 록사나는 그들에게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경청했다.

“음. 베렛 공국의 오스카 대공자에게 리온 제국에서의 커피 사업에 대해 제안을 해 봐야겠군요.”

“아마 휴고가 제안하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제가 넌지시 이야기를 전해도 되죠?”

“그래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문라이트 상단은 대륙에서 이름 있는 상단이었다. 또한 휴고나 프리다의 사업 수완은 뛰어났다.

오스카 대공자 입장에서도 리온 제국에 사업 파트너를 두는 게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대공자라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거야.’

록사나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문라이트 상단을 만나면 하려고 했던 중요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전 대륙에 발이 넓은 문라이트 상단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문라이트 상단에서 꼭 찾아 줬으면 하는 작물이 있어요.”

“그게 뭔지 궁금하네요.”

“목화라고, 대충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록사나가 휴고와 프리다에게 목화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을 했다. 사실 그녀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작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세계의 정보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기에 백 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부족한 정보로나마 부디 반드시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영지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몽글몽글하게 그려진 꽃 한 송이.

프라다가 록사나가 그린 목화꽃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록사나 님, 흰색이 확실한가요?”

“네. 정확히 말하면 꽃이 지고 꼬투리가 생기는데, 이게 익어 터지면 몽실몽실한 솜이 보여요. 이 목화솜이 흰색이에요. 왜요? 뭔가 짚이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든 이야기해 주세요.”

“아주 오래되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색이 흰색이 아니라 회색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회색이었다고요?”

“네. 이런 모양이었는데 확실해요. 결코 흰색은 아니었어요.”

“음, 색이 다르다니……. 어쨌든 이 목화솜 형태는 비슷하다는 거죠?”

프리다가 목화솜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맞아요. 교목의 일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쓸모가 거의 없어서 나무조차 구하기 어려운 평민들이 어쩌다 땔감용으로만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좀…….”

“어떤 문제요?”

프리다가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다는 듯 망설이자, 록사나가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악마가 깃든 나무라고 다들 꺼려 했어요. 목화솜의 색깔이 잿빛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완전 검지는 않아도 회색빛이 섞여 있으니까요. 그 나라에서는 식물에 검은빛이 섞여 있으면 악마나 죽음이 깃들었다고 믿었어요.”

“음…….”

정말로 악마나 죽음이 깃든 나무인 걸까?

록사나가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프리다와 휴고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그게 아니고, 단지 편견에 불과하다면 인식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생각을 마친 록사나의 초록색 눈이 반짝거렸다.

“아, 그나저나 목화솜을 봤던 거긴 어디에요?”

“트플랜 왕국이요.”

“트플랜 왕국이면 저 멀리 남서쪽에 있는 나라를 말하는 거죠?”

“네. 가는 길 자체가 난관이 많아요. 저도 딱 한 번 가 봤답니다. 다시 갈 일도 없을 거 같고요.”

육지로 트플랜 왕국에 가려면 두 개의 나라를 거쳐 지나가야 할 정도로 너무나도 멀었다.

거기다가 첫 번째 나라를 지나 두 번째 나라로 넘어갈 때는 험준한 산맥을 타야 했다.

캠든 영지와도 연결된 알렉산드리아 산맥의 본맥이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육지로 너무 머니까 배를 이용해서 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록사나는 목화씨나 솜을 구하려다가 일이 왕창 늘어날 것 같다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목화나무 이름은 그곳에서 뭐라고 불렸어요?”

“그게 뭐였더라, 악마 뭐였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 프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에서 찻잔 손잡이가 주르르 빠지며 미끄러지려고 했다.

휴고가 익숙하다는 듯 프리다의 손에서 찻잔을 무사히 받아 내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프리다는 무엇인가에 골몰하기 시작하면 손에 든 것이 무엇이든 단번에 잊어버린 채 이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녀의 버릇이었다.

록사나는 한참 동안 프리다를 쳐다보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시선을 거두었다.

추가로 한 잔의 커피를 비워 낼 때쯤, 프리다가 갑자기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다행이 모두의 잔이 비어 있던 상태라 커피가 튀는 일은 없었다.

“데빌스 블랭킷!”

프리다의 두 눈에 희열과 뿌듯함이 가득 들어찼다. 그녀가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강아지처럼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데빌스 블랭킷이에요. 확실해요!”

“기억해 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프리다.”

트플랜인들은 데빌스 블랭킷이 섬유의 원료로 쓰일 운명이라는 걸 알았던 것일까. 악마의 이불이라니. 악마라는 단어만 빼면 제법 완벽했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는 듯 프리다가 당 보충을 하기 위해 달달한 간식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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