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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7)화 (107/214)

107화 

잭이 반색했다. 새로운 제품이 생산되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제품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잘 어필해야 한다.

그렇기에 압박감을 주기도 했지만 최초라는 커다란 자부심도 동시에 안겨 준다.

“백 마디 말보다는 직접 보고 사용해 보는 것이 좋으니까 잭이 한번 사용해 봐요. 아이린?”

“여기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던 아이린이 연필과 지우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빈 종이와 함께 잭의 앞에 놓아 주었다.

잭이 반짝이는 눈으로 연필로 글씨를 써 보고, 지우개를 사용해 그 글씨를 지워 보았다.

“필기감이 정말 부드럽습니다. 까만 글씨인데 손에 거의 묻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합니다. 잉크처럼 종이를 말릴 시간도 필요치 않으니 글씨가 번질 일도 없겠군요. 그리고 지우개라는 것으로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니……. 앞으로 비싼 종이를 낭비하는 일도 많이 줄겠습니다.”

쓴 글씨를 손으로 직접 문질러 보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잭의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맞아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우개로 지워지는 것이니까 문서 작성용이나 중요한 서류 작성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그럼 글씨 연습용 필기도구 같은, 주로 어린아이들이 사용하게 되겠군요.”

“네. 그리고 그림 그리기 용도로도 사용하면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린이 무언가 그려진 종이 여러 장을 꺼내 잭에게 건네주었다. 그림을 본 그의 얼굴에는 절로 감탄이 어렸다.

“와! 연필로 그린 그림들입니까? 정말 하나같이 다들 잘 그렸군요. 멋집니다.”

“맞아요. 이건 우리 영지의 화가들에게 의뢰해서 받은 작품들이에요.”

그림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 인물들의 초상화, 자연과 건물 등을 배경으로 캠든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아이들이 그린 거예요.”

아이린이 서툰 솜씨로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서툴지만 참 귀여운 그림입니다. 응?”

아빠 미소로 아이들 그림을 넘겨 보던 잭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 힘든 무언가를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이 그림 하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그림 하단에는 서툰 글씨로 ‘코델리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맙소사, 어떻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록사나와 아이린도 덩달아 코끝이 찡해졌다.

“맞아요. 코델리아가 직접 그린 그림이에요.”

일부러 아이들 그림 사이에 코델리아의 그림을 끼워 넣어 두었다.

코델리아의 그림은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아이들의 그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겠어요?”

“저인 것 같군요.”

“맞아요. 어떻게 본인인지 알았어요? 맞히기 어려운 거 같은데…….”

코델리아의 그림 실력을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림 속 잭과 실제의 잭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너무나도 달랐다. 도저히 잭이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만약 코델리아가 그림을 주면서 잭이라고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록사나도 정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왼쪽 귓불에 점이 그려져 있으니까요.”

잭이 부끄러운 살짝 발개진 얼굴로 사진 속 남자의 왼쪽 귓불을 가리켰다.

록사나와 아이린이 그림을 한 번 보고는 드러난 잭의 왼쪽 귓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점이 안 보였다. 둘이 잭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이에 잭의 얼굴과 귀가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아! 찾았어요. 정말 자세히 봐야 귓불에 점이 있다는 걸 알 정도로 작은데요.”

아이린의 말에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속 점은 큰데, 실제 잭이 가지고 있는 점은 깨알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록사나와 아이린은 코델리아의 관찰력에 감탄하는 것으로 그녀의 작품 감상을 마무리 지었다.

아이들의 그림 속에서 키얀과 키아의 이름이 적힌 그림까지 발견한 잭이 두 개의 그림을 들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이건 우리 마리솔과 마빈이 그린 건가요?”

찌그러진 동그라미와 선들이 난무한 작품.

“맞아요. 상단주님은 가족이 그린 걸 귀신같이 알아보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아이린의 칭찬에 잭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족들이 그린 그림들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것도 선물이에요.”

코델리아가 그려진 초상화를 받아 든 잭은 무척 기뻐했다. 화가가 제대로 그린 것이었다.

“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멋진 선물들을 챙겨 주시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잭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해 주니 나도 기분이 정말 좋네요. 가족과 떨어져 타지에서 오래 생활하느라 많이 힘들 거예요. 그래서 잭에게 오히려 미안하고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록사나는 조만간 잭에게 장기 휴가를 줄 예정이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잭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그림들을 가져오신 건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이 그림들은 연필과 지우개 홍보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혹시 그림 그리기 같은 것 말씀입니까?”

“맞아요. 아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연필로 그림 그리기 행사를 진행하는 거죠. 당연히 상품과 선물도 있고요. 입상한 작품들은 전시까지 될 거예요.”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잭이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자아냈다.

“칭찬 고마워요. 아, 그리고 이것들도 보세요.”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형태로 포장된 연필과 지우개 들이 놓여 있었다. 연필에 지우개가 달린 지우개 연필, 열두 개 세트로 된 묶음 상품, 원통형에 든 연필들, 네모난 필통에 든 연필 등 다양했다.

* * *

연필과 지우개 홍보 및 판매에 대한 전략을 논의하느라 시간은 훌쩍 지나 늦은 오후가 되었다.

잭이 간만에 만나는 아버지 필립을 보러 자리를 뜨고, 록사나와 아이린은 커피와 쿠키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영주님, 마르셀입니다.”

“들어와요.”

록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르셀이 하얀 봉투를 무더기로 안고 들어왔다.

“다른 귀족가에서 보내온 서신들입니다.”

정문에서 경비를 서던 마르셀이 서신을 들고 온 귀족가의 시종들로부터 건네받은 것들이었다.

아직 수도 저택에 서신을 관리하는 시종이 따로 없었기에 직접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에게서 서신을 넘겨받은 아이린이 하나둘씩 열어 보며 내용을 확인했다.

“마르셀, 지금 교대한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요. 커피랑 간식 좀 들고 가요.”

록사나의 제안에 마르셀이 거절하지 않았다. 냉큼 소파 한 자리를 차지했다.

“감사합니다.”

록사나가 마르셀을 위해 빈 잔에 커피를 따라 주고는, 간식도 한 접시 듬뿍 내어 주었다.

소파 옆 협탁 위에는 빈 잔과 접시 여러 벌, 간식이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잡다한 일로 아이린을 왔다 갔다 하게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법이었다.

“수도 소문은 참 빠른 것 같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것이 어제 오후인데, 다들 어떻게 알고 이렇게들 빠르게 서신을 보낸답니까.”

마르셀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내 쿠키를 집어 들고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었다.

“수도에서는 돈만 있으면 이런 정보는 손쉽게 살 수 있으니까요.”

아이린이 분류하여 정리한 서신들을 내려놓으며 마르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보좌관님은 수도 생리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수도에 여러 번 와 봐서 그 정도는 알아요.”

아이린은 록사나가 공작 부인이었을 때 수도에 따라온 경험이 제법 되었다.

“저는 수도가 이번이 처음인지라. 앞으로 저도 많이 배워야겠어요.”

휴식 시간 동안 마르셀은 경험자인 아이린에게 수도 생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수다를 조금 떨다가 자신의 몫인 간식이 다 떨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르셀이 나가고 록사나와 아이린도 휴식을 종료했다.

“보내온 서신들 대부분이 황태자 쪽 귀족가에서 온 것들이에요.”

“그럴 것 같았어.”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황태자가 사교계 시작 전부터 여기저기 말을 흘렸겠지.’

그러니 황태자파 귀족들 중에서 캠든 영지나 자신에게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오나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록사나 일행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이동했다고 해도 비어 있던 저택에 새로운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틀었으니 정체 파악부터 했을 것이다.

‘아, 그 전에 성문 통과하면서 다 들통났겠네.’

어디에서 정보가 새었을까 헤아려 보던 록사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죄다 내용들이 티타임이나 파티 초대장이에요. 아, 이건 다른 거예요. 문라이트 상단이에요.”

아이린이 따로 빼놓고 뜯지 않았던 서신 하나를 내밀자, 록사나가 펼쳐서 내용을 확인했다.

“내일 점심때쯤, 휴고가 방문하겠대.”

“어머, 저희 주방장이 아직 없는데 어떡하죠?”

“그냥 지금처럼 우리 먹는 걸로 준비하면 될 거야. 휴고도 우리 사정 뻔히 알 테니까.”

“정말 그래도 될까요?”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빈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서신을 써 내려갔다.

“이거 문라이트 상단 휴고한테 보내 줘. 휴고한테, 주방 인원이랑 저택에서 일할 사람 몇 명 빌려 달라고 하려고.”

“좋은 생각이세요. 마르셀한테 전하고 올게요.”

아이린이 반색을 하며 서신을 받아 들었다.

고용 공고를 내게 되면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세작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고용인을 뽑을 때까지 문라이트 상단에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록사나 님, 오늘은 다들 날을 잡았나 봐요. 이건 황궁에서 온 거예요.”

집무실로 돌아온 아이린이 울상을 지었다. 손에는 금빛 문양이 찍힌 서신이 들려 있었다. 발신인은 황태자였다.

록사나가 바로 서신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서신을 탁자 위로 냅다 내팽개쳤다.

“이런, 망할!”

“왜요, 록사나 님?”

“내일 오후 티타임에 참석하라고. 벌써부터 오라 가라 하다니, 귀찮아 죽겠네.”

아이린의 근심 어린 얼굴을 본 록사나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도노반이 5월 사교계 모임 초대장을 보냈을 때, 그녀는 사교 모임 20일 이후부터 참석하겠다고 답신을 보냈었다.

최대한 도노반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도노반은 록사나의 의사를 무시하는 처사를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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