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영원히 그 입 다물어.”
아스테리온이 낮게 으르렁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록사나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정략혼 같은 게 아니라, 열애였어.”
뒤에서 에이글이 웅얼거렸다. 록사나가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에이글은 짝사랑에 빠진 채 혼자 속앓이를 하는 아스테리온을 진심으로 동정하기 시작했다.
에이글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록사나는 12년 전에 카일라니 공작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아스테리온은 그 전부터 록사나를 알고 있었던 듯한 눈치였다. 자신이 언급하려고 했던 13년 전 그때 말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자신이 찾으려고 애썼던 정령사가 역시 록사나였음이 분명했다.
‘내가 찾던 정령사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면서 알려 주지 않았다니! 못된 공작 같으니라고.’
그 당시 에이글은 상대가 원한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정말 절실했었다.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정령사들.
오직 단 한 명의 정령사만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에이글이 가족들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만큼 간절했었다.
속으로 아스테리온을 욕하던 에이글이 이내 록사나가 오랜 기간 동안 힘을 잃었다가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록사나의 정체를 알려 줬어도 힘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쨌든 힘을 되찾은 위대한 정령사, 록사나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그가 찾아내지 못했던 엄청난 정보들과 함께 말이다.
에이글의 얼굴에 사악한 악마 같은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록사나 님은 13년 전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눈치란 말이지.’
에이글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황금이 아니라 최상급 다이아몬드를 줘도 보기 어려운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와, 잘난 공작이 짝사랑이라니! 볼 만하겠어.’
처음 아스테리온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도 결국 정략혼을 했구나 생각했었는데, 그 본질은 공작의 열렬한 짝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제 손으로 이혼까지 하는 그런 바보 천치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혼 생활 중에는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을 제법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협력자나 동료로만 취급받고 있으니 공작 혼자 애가 닳을 만도 했다.
에이글은 도대체 왜 13년 전 록사나와의 인연을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아직 쿨하게 아스테리온을 용서하지 못한 에이글이었다. 그사이 그들은 비밀 출구에 당도했다.
“다음에 또 봐요, 에이글.”
“네. 록사나 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밖으로 향하는 비밀 뒷문에 도착한 에이글이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며 두 사람과 은빛 늑대 정령을 배웅했다.
* * *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요.”
“응. 그대도 조심히 들어가. 그리고 오늘은 푹 쉬었으면 좋겠군.”
아스테리온은 적어도 그녀가 오늘 밤만큼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저택 정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록사나가 대문 쪽과 아스테리온을 잠시 번갈아 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커다란 철문이 열리고, 록사나가 그 속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그때까지도 아스테리온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기감을 넓게 펼쳤다. 한참 안쪽에 위치한 저택 현관이 분주해졌다가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카일라니 공작저로 향했다.
【 휴고의 부탁 】
“저택 어때? 마음에 들어, 아이린?”
계단을 오르며 록사나가 자신을 방으로 안내하는 아이린에게 물었다. 소녀의 얼굴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마음에 들어요! 짐 정리 먼저 하느라 아직 다 돌아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보니까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춰져 있어서 따로 구입해야 할 것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꼼꼼하게 다 살펴보려고요. 안드레아스 님이 내일 마저 안내해 주기로 했어요.”
“그래? 너나 나나 신경 쓸 일들이 조금이라도 줄어서 다행이다.”
밤이라 외부는 모르겠지만, 록사나가 보는 저택 내부는 손쓸 곳 하나 없이 정갈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발걸음이 거대한 방문 앞에 다다랐다. 아이린이 문을 열어 주자, 록사나가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짜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록사나 님?”
마력석으로 환하게 밝혀진 넓고 웅장한 방에서 커다란 통창이 록사나를 정면으로 맞이했다.
창의 양옆으로는 화이트 레이스로 장식된 커튼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양쪽에 묶여 있었다.
벽과 바닥은 화사한 듯하면서도 침착한 빛깔의 아이보리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실내가 밝았다. 탁자나 소파 등 이에 어울리는 가구들도 적절히 최소한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과하지 않고 밝아서 무척 마음에 들어.”
“그렇죠? 저도요. 주인의 취향에 따라 추가적으로 꾸밀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더 좋아요.”
록사나를 따라 들어온 벨루카도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에 바빴다.
“이쪽이 침실이에요. 저쪽은 욕실, 그리고 여기는 드레스 룸으로 연결되고요.”
록사나가 오기 전에 이미 속속들이 록사나가 사용하게 될 방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피곤해할 록사나를 위해 대략적으로만 설명을 했다. 단 1분이라도 그녀의 시간을 아껴 주고 싶었다.
아이린이 록사나를 욕실로 이끌었다. 덕분에 록사나는 목욕을 하며 빠르게 피로를 어느 정도 풀어 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 머무는 일정 동안 최대한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살펴야 했다.
저녁을 들고 록사나가 집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린, 우리 도착했다고 잭한테 연락했어?”
“네! 내일 오전에 저택으로 오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네.”
“헤헤헤. 감사합니다. 보좌관으로서 당연한 일인걸요.”
그러면서 아이린이 자신이 정리해 놓은 일정 목록을 록사나에게 건넸다.
저택 구입비 지급 관련 서류를 안드레아스와 언제 진행하는지부터 이번에 올라온 인원이 적었기에 현재 각자 맡은 업무와 앞으로 저택에 충원해야 할 인원들을 뽑는 일정 등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류를 훑어보는 록사나의 얼굴에는 미소와 만족감이 한가득 피어났다.
이제는 록사나가 지시하지 않아도 아이린이 알아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 * *
다음 날, 록사나 일행의 수도 저택에서의 첫째 날이 밝았다. 록사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안드레아스와 마주 앉아 계약서를 작성했다.
저택 대금 납부 계약서는 다분히 록사나의 의견을 중심으로 반영하여 작성되었다.
“총 5만 골드를 10년에 걸쳐 연납으로 납부합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남작님?”
안드레아스가 서류를 록사나 쪽으로 내밀며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과 납부 기한, 납부 방법 모두 록사나가 정한 것이었기에 동의하냐고 묻는 것은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
“그리고 계약한 기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추가 납부 금액 또는 일시불로 전액 상환할 수 있다는 조항에도 동의하십니까?”
록사나는 안드레아스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를 본 안드레아스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아니,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남작님. 제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잖습니까. 그리고 계약은 언제나 신중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다 알고 계신 내용이라고 해도 제 질문에 답해 주지도 않으시고 사인을 하시다니요.”
“나 바빠요, 안드레아스.”
록사나가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안드레아스가 공작가로 건너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캠든 저택에서 뭉그적거리려는 수작을 진작 알아챈 그녀였다.
“어서 가서 공작님 사인이나 받아 와요.”
록사나는 나머지 하나에도 서명을 마치고는 안드레아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드레아스가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록사나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가로 넘어가게 되면 안드레아스의 상관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한 명은 바로 그의 직속 상관 트레버였다.
트레버는 한동안 공작 령에 머물렀었는데 얼마 전에 공작가 수도 저택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만큼 트레버가 지시하는 일까지 하면 그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배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감사합니다, 남작님!”
안드레아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폈다. 그에게는 고작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꿀보다 달콤한 마지막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안드레아스가 집무실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방문자가 도착했다.
똑똑똑.
“록사나 님, 캠든 상단주가 도착했습니다.”
“응. 안으로 모셔.”
두툼한 가방을 든 잭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님.”
“어서 와요, 잭.”
록사나의 손짓에 따라 잭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는 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이건 그동안 캠든 상단의 상품 판매 수익에 관한 자료들입니다.”
잭이 준비해 온 서류들을 가방에서 꺼내어 록사나에게 두 손으로 건네주었다.
“오, 기대했던 것보다 이익이 많네요!”
서류를 팔랑팔랑 넘겨 보는 록사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많은 숫자의 향연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판매량과 순수익금이었다.
“네! 동물 귀 머리띠와 날개옷 제품에 대한 반응과 열기가 귀족 자녀들과 부유층 사이에서 아주 뜨겁습니다. 물량이 달릴 정도로요. 그리고 요즘 수도에서 가면무도회가 유행하게 되면서 성인들 사이에서도 수요가 늘었습니다.”
잭이 뿌듯한 얼굴로 고객층을 분석한 자료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물론 아시겠지만 요즘 저희 제품을 모방한 위조품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네, 오면서 타 영지에도 자주 보이더라고요. 그에 대비해서 추후 고가 제품 라인과 브랜드 전략을 미리 세워 두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역으로 록사나가 그를 다독여 주자, 잭이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신제품을 조금 가지고 왔어요. 이걸 판매하면 그만큼 동물 귀와 날개옷 판매량이 줄더라도 상단 수익이 줄지는 않을 거예요.”
“아, 그 연필과 지우개 말씀이십니까? 서신으로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어떤 제품인지 정말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