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 *
캠든을 떠난 지 13일째 되는 날 정오 즈음, 드디어 록사나 일행이 수도 케일라에 입성했다.
수도의 남쪽 성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벨루카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르얀과 49호도 두 사람과 함께했다. 형제는 자신들이 당분간 머무를 곳에 대한 설명을 수도에 입성하기 하루 전에 이미 들었다.
네 사람은 모두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최대한 푹 눌러쓴 상태였다.
나머지 일행은 이번에 구입한 록사나의 저택으로 먼저 가 있을 예정이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당분간 저택 보안에 신경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함께 온 기사단원들을 전부 록사나 측에 붙여 주었다.
기사단원들은 캠든 영지에서 수도로 출발할 때부터 사복 차림이었다. 아벨리오 남작가의 호위 인력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한 조치였다.
안드레아스 역시 기사들과 함께 이동했다. 록사나가 구입한 저택의 계약서 작업과 아이린에게 저택 관련 업무를 인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었고, 아무 문장도 없는 세 대의 마차가 1구역으로 떠나갔다.
“우리도 이동하지.”
아스테리온이 록사나, 잔뜩 긴장한 아르얀과 49호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벨루카는 록사나의 품에 안겨 망토로 가려졌다.
일행은 금세 대여한 품삯 마차로 갈아탔다.
그들을 실은 마차가 평민 거주 지역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30여 분쯤 달렸을까.
“도착했습니다, 손님.”
마부의 말을 신호로 록사나 일행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아스테리온이 마부에게 요금을 지불하고는 곧장 돌아섰다.
그들은 얼기설기 이어진 길을 따라 얼마간 걸었다. 이내 맥주잔과 새 발이 그려진 간판이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새 발 주점이었다.
* * *
에이글이 부하의 보고를 듣고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탕.
그 바람에 나무 의자가 뒤로 확 넘어가며 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쳐졌다.
에이글은 간만에 업무 공간을 벗어나 맥주를 한창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술에 취해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심되었다.
“정말 그가 찾아왔다고?!”
“네, 단장님. 우선 진정하십시오. 손님들은 일단 안전하게 잘 모셔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흥분은 가라앉히시고, 단장님 정신 줄 먼저 챙기시지요.”
태산같이 진중한 에이글이 잔뜩 흥분하며 이성을 잃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정말 열받았거나, 초특급으로 특별한 고객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뿐이었다.
“알았다. 후우~ 후우~ 침착, 침착, 침착.”
부하의 타박을 받은 에이글이 주문을 외우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
잠시 후, 에이글이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됐다. 가자.”
에이글이 서둘러 도착한 곳은 독수리 용병대의 초특급 고객 전용 응접실이었다. 그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이에 안에 있던 이들 중 세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 좀 살살 열지. 깜짝 놀랐잖은가.”
아스테리온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록사나를 보고는 그 원흉인 에이글을 보며 혀를 찼다.
“정말 오랜만이야. 거의 10년만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보군. 우선 앉지.”
정작 이곳의 주인은 에이글이건만, 그는 손님인 아스테리온에게 손님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어쨌든 에이글이 주인인지라 가운데 자리인 상석을 차지했다.
에이글은 자리에 앉고서야 아스테리온의 일행을 눈을 번뜩이며 살펴보았다.
“이쪽은 아벨리오 남작, 저자가 독수리 용병대의 단장 에이글이야.”
아스테리온이 상대를 대할 때 확연히 다른 말투로 록사나와 에이글을 서로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안녕하세요,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록사나가 후드를 벗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후, 에이글에게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에이글이 록사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영광이 있나. 나는 에이글이네.”
그러면서 록사나가 내민 손을 붙잡아 악수 대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귀족식 인사였다.
아스테리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록사나는 살짝 놀라긴 했으나 에이글의 말투나 행동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조금 특이하고 유쾌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스테리온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황족들조차도 대하기 어려워하는 상대인데 말이다.
록사나의 눈에 에이글은 아스테리온의 또래로 보였다. 하지만 에이글은 사실 30대 후반이었다.
한편 아스테리온의 재미있는 반응을 목격하게 된 에이글은 신선함을 느끼며 싱글벙글거렸다.
“그나저나 두 분께서 어쩐 일로 함께 귀한 발걸음을 했는지 몹시 궁금하군.”
“부탁이 있어서 왔어. 저쪽은 아르얀, 그 옆은 49호라고 불려.”
아스테리온이 건너편에 자리한 두 형제를 마저 소개했다. 그러자 아르얀과 49호가 쭈뼛거리며 후드를 벗었다.
“너희들은!!”
에이글의 부리부리한 눈이 단숨에 커졌다. 아르얀과 49호가 수인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진짜 놀랐잖아, 공작님. 이번 의뢰는 저 둘과 관련이 있겠군.”
“역시 감이 좋아. 의뢰 내용은 두 사람의 신변 보호와 숙식 제공이야. 기간은 약 한 달 정도.”
“수락하지.”
에이글이 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공작님, 나한테 더 할 말 있지 않아?”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에이글의 주황빛에 가까운 노란 눈은 기대감과 흥분을 품고 몹시 반짝거렸다. 또한 마치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커다란 몸이 자꾸 들썩거렸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옆에 앉은 록사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록사나가 품에 숨겨 두고 있던 벨루카를 밖으로 꺼내 그녀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귀엽고 늠름한 은빛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글의 두 눈이 앞으로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다.
“아!”
아까부터 그가 희미하게 느끼고 있는 청명한 기운이 은빛 늑대에게서 더욱 짙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글은 눈부시게 빛나는 털을 가진 은빛 늑대를 안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이 은빛 털끝에 닫기 직전, 벨루카가 그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에이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이내 자신이 하마터면 결례를 범할 뻔했다는 걸 깨닫고는 바로 손길을 거두어들였다.
자꾸만 손이 근질거렸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를 대신 긁적이다가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정령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니, 꿈만 같아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정령인가?”
“당신은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더 잘 알지 않아?”
“맙소사! 진짜야. 진짜 존재했어!”
아스테리온의 말을 듣고서야 에이글은 제대로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손안의 모래처럼 사르르 흩어져 가던 희망이 형태를 갖추어 다시 선명하게 잡히는 것 같았다.
에이글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산처럼 거대한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는 그런 그를 잠시 내버려 두었다. 49호와 아르얀은 그가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에이글의 행태를 수수방관했다.
한참 후,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스른 에이글이 록사나에게 자신의 숨겨진 정체와 사연을 하나둘씩 풀어 놓기 시작했다.
자신은 한 조인족의 수장이며, 독수리 용병대는 수인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용병대라는 것.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찾고 진실을 알기 위해 뒤쫓고 있다는 것 등을 밝혔다.
13년 전에 정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 힘을 사용한 정령사를 찾으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막 하려던 때였다.
아스테리온이 교묘하게 에이글이 말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에 에이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사이, 대화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에이글은 지금까지 자신이 얻은 정보들을 두 사람에게 공유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알맹이가 담긴 정보들은 아니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에이글에게 아낌없이 풀었다.
록사나가 정령사라는 중요한 사실은 물론 현재 몇 명의 수인족을 데리고 있으며, 이종족 실험 시설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이에 에이글은 당장에라도 캠든 영지로 달려갈 듯이 굴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자신의 종족들이 그 곳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서였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현재 갇혀 있는 이종족들에 대한 구출 작전을 언급하며 그를 한참 동안 뜯어말려야 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독수리 용병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하늘 중앙에 떠 있는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해가 지고 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저희는 이게 그만 가 볼게요.”
록사나가 벨루카를 안아 들었고, 아스테리온이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르얀, 그리고 아르얀 형님.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시다가 한 달 뒤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록사나 님.”
형제의 얼굴은 더없이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자신들이 머물게 된 곳에 수인족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아스테리온과 록사나가 응접실을 나가자, 그 뒤를 에이글이 따랐다.
문밖으로 나오니 용병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앞장서 걸어가며 밖으로 향하는 비밀 문으로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을 안내했다.
아스테리온이 살짝 걸음을 늦춰 뒤따라오는 에이글의 팔을 한쪽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에이글이 의아한 눈빛으로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13년 전 그 이야기는 록사나 앞에서 절대로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왜 그래야 하지?”
아스테리온이 낮게 읊조리며 협박을 하자, 에이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번개처럼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맞아, 그런 거였어.”
눈치 빠른 조인족의 반응에 아스테리온의 잘생긴 얼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설마, 공작. 내가 생각한 그거 맞아? 그런 거지? 맙소사!! 보아하니 자네 전 부인께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군.”
에이글은 미친 듯이 웃어 젖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아스테리온의 살벌한 눈빛 앞에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