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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4)화 (104/214)

104화 

사람들은 혹여나 록사나의 기분이 언짢거나 상하지 않았는지를 재빠르게 탐색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다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스테리온은 슬쩍 흘겨보았다.

반면 아스테리온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49호가 잠시 연도를 헤아렸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4월 말이었습니다.”

“음, 입궁하기 며칠 전이었군요.”

“비키가 직접 시기를 정했어요. 로웰 후작과 저택 내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과 카일라니 공작가에 집중되어 쏠릴 테니까, 틀림없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요.”

아르얀이 빅토리아의 애칭을 아무 거리낌 없이 언급했다. 탈출까지 도왔으니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을 거다.

사람들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그 시기가 로웰 후작의 눈을 피하기에 가장 적절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당시 소공작이었던 아스테리온이 로웰가의 정문에서 엄청 난리를 부렸으니 내부의 이목이 외부로 집중되었을 것은 자명했다.

“지금 보아하니 빅토리아 로웰이 로웰 후작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아닌 모양이군요.”

마커스 경은 빅토리아가 로웰 후작의 손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생각했었다.

“황궁에 들어가게 된 건 비키의 의지가 아니었어요.”

아르얀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옆에서는 49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리아 로웰에 대해 꽤 잘 알고 있고, 애칭으로 부르는 걸 보면 단순히 탈출만 도운 사이는 아니었나 보군.”

아스테리온의 지적에 아르얀이 모두에게 다시 한번 거하게 폭탄을 투척했다.

“당연하죠! 비키는 제 반려라고요.”

록사나의 두 눈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스테리온 역시 그 자리에서 경악했다.

“반려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잘못 들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린 양.”

“반려? 수인족의 반려는 우리로 치면 남편이나 아내, 그러니까 배우자 아니야?”

다들 집단으로 패닉에 빠졌다. 저 수인족이 무슨 농담을 저리 쉽게 하나 싶었다.

록사나 역시 믿기 힘들었지만, 아르얀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르얀. 빅토리아 로웰은 현재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당신의 반려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래. 반려였을 수는 있어도 반려라고 할 수는 없지.”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말을 거들었다.

“비키와 저는 서로 반려의 연을 맺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 유일한 반려예요. 그녀가 현재 누구와 함께하든 간에요.”

아르얀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에게 반려의 개념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혼란이 가중될 것 같아지자, 49호가 나섰다.

“순수 인간들은 현재의 배우자를 서로의 반려자로 본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수인족의 경우에는 종족에 따라 반려의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들이 49호의 설명에 한껏 귀를 기울였다.

“순수 인간들과 동일한 개념의 반려가 있는가 하면, 일생에 오직 단 한 번, 단 한 명만을 반려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49호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사람들은 ‘그러면 아르얀네 종족은 후자인 경우에 해당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아르얀네 종족의 반려는 순수 인간의 배우자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르얀은 종족의 룰과는 다르게 비키 아가씨 한 명만을 반려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키 아가씨가 아르얀에게 이름을 지어 주셔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벙찐 얼굴을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니까 약간 아르얀이 돌연변이라는 거지?’

‘응. 특이한 경우인 거 같아.’

‘아니, 이름 지어 줬다고 그런 거야? 정말?’

저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아르얀의 사고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하자, 49호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오해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이름을 지어 줬다고 반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르얀은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이상한 아이가 절대 아니에요.’라는 말이었다.

“아!”

“경, 이상한 생각했죠?”

“아닙니다. 경이야말로 그런 것 같은데.”

“절대 아닙니다!”

록사나 일행은 언제 아르얀을 오해했냐는 듯 서로 시치미를 뚝 떼었다.

* * *

다사다난했던 어제를 뒤로하고 세 대의 마차가 일렬로 달리며 수도를 향해 다시 나아갔다.

새벽까지 아르얀 형제와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듣느라 다들 잠이 부족했다.

마차 안에서 아이린이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머리를 본 록사나가 아이린을 이끌어 의자에 몸을 옆으로 뉘여 주었다.

잠결이라 그런지 아이린은 쉽게 록사나의 손길을 따랐다.

“그대도 피곤할 텐데.”

맞은편의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염려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난 괜찮아요.”

록사나가 간이 식탁 위의 커피 잔을 한 손에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그러곤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의 손에도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이 아메리카노라는 것을 마시니까, 확실히 잠이 확 깨는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스가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피 본연의 향과 맛을 충실하게 음미했다.

친절한 록사나는 출발 전에 일행 모두에게 아메리카노를 한두 잔씩 배급해 주었다.

“공작저에도 커피를 상시 구비해 놔야겠어.”

“적극 찬성입니다, 주군.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안드레아스가 기쁜 마음으로 일을 늘렸다.

“아직 판매할 정도의 품질이나 물량이 안 돼요. 그러니까 우선은 캠든에서 가지고 있는 물량을 조금 나눠 줄게요.”

“고마워.”

“감사합니다, 남작님.”

“별말씀을요.”

록사나가 생긋 미소 지었다.

아스테리온이 빈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두 번째 마차에 탑승한 아르얀과 49호를 떠올렸다.

형제는 캠든 성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을 캠든 영지로 보내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함께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로웰 후작의 수도 저택에서 도망쳐 나온 지 8년 만에 수도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형제를 그대 저택으로 데려갈 예정인가?”

“그렇게 할까 했는데 어려울 것 같아요.”

둘의 거처 문제가 신경 쓰였던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깜깜한 밤에 불을 밝힌 듯 단번에 환해졌다.

“그럼 우리 쪽에서 저들을 맡지.”

록사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님이나 저나 수도 저택에 도착하면 붙을 감시의 눈들을 생각해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캠든에 다시 내려가기 전까지 두 사람을 믿고 맡길 만한 안전한 곳 없을까요?”

“음.”

아스테리온이 잠시 동안 한 손으로 자신의 아래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동작을 멈추었다.

“적당한 곳이라면 그곳이 괜찮을 것 같군. 저택으로 가기 전에 먼저 그곳에 들르면 되겠어.”

“어딘데요?”

“주점과 병행하는 중소 규모 용병대인데 믿고 맡길 만한 자들이야.”

아스테리온이 믿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워낙 철두철미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고민을 덜었어요.”

“도움이 되어서 기쁘군. 그런데 우리는 현재 동맹이잖아. 친구 사이기도 하고.”

친구라는 말을 한껏 강조하며, 아스테리온이 씨익 웃었다. 그러자 그의 요요한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냉 미남이 순식간에 온 미남으로 변하며 록사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 록사나가 고개를 애써 돌렸다. 그의 모습을 시야에서 지워 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록사나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중인 마차의 창문을 절반 정도 내렸다.

안으로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오려는 찰나에 맞춰 정령의 힘을 발휘하자, 마차 안은 거짓말처럼 창문을 열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록사나가 위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벨루카, 이제 그만 내려와!”

록사나의 부름을 들은 은빛 늑대가 마차 지붕 위에서 창가 쪽으로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마차 안으로 쏙 들어와서는 당연하다는 듯 록사나의 무릎 위에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무겁지 않았다.

록사나가 벨루카의 몸을 쓰다듬어 주며, 바람에 흐트러진 털들을 정리해 주었다.

이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벨루카가 록사나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려 댔다.

두 눈 벌겋게 뜨고 그 모습을 본 아스테리온은 역시 정령이 아니고, 개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차 지붕 위가 그렇게 좋아?”

“아울~”

당연한 것 아니냐는 의사 표시였다.

벨루카는 처음 하루 이틀간 얌전하게 마차 안에서 잘 머물렀었다. 하지만 곧 지루해했다.

그러더니 간간이 밖으로 나가 마르셀이나 기사들의 품에 안겨 말 위에서의 이동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마차 속도에 맞춰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가 그곳을 터줏대감처럼 당당하게 점령했다.

달리는 마차 위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고 시야가 탁 트여서 좋은 모양이었다.

록사나는 벨루카가 마차와 나란히 달릴 때는 걱정되어서 말렸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행을 제외한 다른 행인들의 눈에 띄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걱정은 하루 만에 사라졌다. 벨루카의 힘이 커졌는지 달리면서 자신의 몸을 감추는 은신 능력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신기하게도 록사나와의 교감 능력이 높아졌다. 덩달아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양도 수직 상승했다.

“교감할수록 힘이 증가한다니, 신기해.”

딱 붙어 있는 록사나와 벨루카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던 아스테리온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정령의 힘은 정령과의 소통 능력에서 나오니까요. 조만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다를 거 같아요.”

“그날이 기대되는군.”

반어적인 표현이었다. 록사나의 능력이 지속적으로 신장되는 것이 더없이 기쁘고 반가웠다.

하지만 말을 하게 된 저것이 자신과 록사나 사이에 사사건건 끼어들고 또박또박 자신에게 말대꾸를 할 것만 같아서 달갑지 않았다.

반면 벨루카는 아스테리온의 따가운 경계를 깡그리 무시하며 록사나의 포근한 품 안에서 망중한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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