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설마 그럴 리가요. 다 작전이죠.”
록사나가 가볍게 웃었다.
“괜찮다면 그대의 작전을 좀 미리 듣고 싶은데. 그래야 나도 장단 맞춰 거들기 쉬울 거 같아.”
“공작님은 어느 정도 다 짐작하고 있으시잖아요, 뭐.”
“짐작만 할 뿐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이 식사 중인 와중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요. 이런 일은 서로 정확히 공유하는 게 좋겠죠. 두 사람을 쫓는 자들은 분명 로웰 후작이나 육망성 표식과 관련 있는 자들일 거예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리고 현재로서는 우리가 가진 정보를 두 사람에게 명확히 밝힐 수 없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제 발로 우리에게 와서 가진 정보를 직접 털어놓게 하려고요. 쫓기고 있으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죠.”
아스테리온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도 염두에 두고 있던 내용이었다.
두 사람의 심문이나 처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안드레아스가 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그냥 놓아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지금은요.”
“자세한 상황 설명은 내가 이어서 하지.”
록사나의 피로가 우려되었던 아스테리온이 그동안의 이야기를 각자의 보좌관에게 공유했다.
덕분에 록사나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마음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록사나가 옆에 있는 벨루카의 털을 쓸어내렸다.
‘음, 언제쯤 오려나. 너무 늦은 시간 말고, 조금이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배도 엄청 많이 고플 테니까.’
그래서 아까 소렌 경에게 식사를 따로 2인분 챙겨 달라고 부탁한 거였다.
아르얀과 49호의 행색은 그대로 최악의 빈민가에 던져 놓아도 아무 위화감 없이 녹아들 정도로 피골이 상접했다.
록사나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얇은 손톱 모양의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별들이 총총 수놓아져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 별들이 당장에라도 땅으로 쏟아져 내릴 듯 장관을 이루었다.
아르얀과 49호는 록사나 일행이 저녁 식사 뒷정리를 모두 마칠 때까지도 야영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록사나는 아이린이 준비해 준 차를 마시며 모닥불 곁을 지켰다. 아스테리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스테리온이 기감을 넓게 펼쳤다.
“더 이상 안 기다려도 되겠어.”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 * *
부스럭부스럭.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뭔가가 야영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근처까지 다 와서는 그 소리가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머뭇거리는 기척이 걸려들었다.
마치 미리 알아 달라고 하는 것처럼.
참다못한 마커스 경이 아스테리온이 있는 모닥불 쪽으로 다가갔다.
“주군, 어떻게 할까요?”
마커스 경이 야영지 경계 부분들 중 한곳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스테리온이 숨을 길게 한 번 내쉬었다.
“데려와.”
“알겠습니다.”
마커스 경이 자리를 뜨고, 록사나가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아이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 내가 아까 소렌 경에게 부탁했던 음식들 좀 준비해 줘.”
“네, 록사나 님.”
아이린이 몸을 일으켜 소렌 경을 찾아갔다.
잠시 후, 마커스 경의 뒤를 따라 두 명의 사내가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의 앞에 섰다.
“어머. 아직 안 떠났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희를……?”
록사나가 시치미를 뚝 떼고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뜻밖이라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아르얀과 49호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거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49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했다.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군. 자리부터 앉지.”
“네? 아, 네!”
객이 주인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라 아스테리온이 이를 지적했다. 한껏 고개를 치켜든 록사나의 목이 아플 터였다.
49호와 아르얀이 쭈뼛거리며 의자 대용으로 놓인 기다란 통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식사는 했어요?”
“아직…….”
아르얀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볼은 움푹 파여 홀쭉했다.
마침 아이린이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왔다.
“식사부터 먼저 하고 이야기는 그다음에 해요. 아이린?”
“네!”
록사나가 왜 음식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대번에 이해한 아이린이 두 사람 앞에 스튜가 가득 담긴 그릇과 빵, 물잔을 놓아 주었다.
록사나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스튜를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스테리온도 그녀를 따라서 일어났다.
“천천히 많이 들어요. 부족한 게 있으면 여기 있는 아이린에게 말하고요.”
록사나는 두 사람을 도와주라며 아이린을 자리에 남겨 두고 아스테리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아이린의 곁에는 안드레아스와 마커스 경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49호와 아르얀이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 꿀맛이었다.
쫓겨 다니느라 오랫동안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굶는 날이 다반사였다. 형제의 몸은 그만큼 야위었고, 수척해진 상태였다.
형제가 식사를 끝마쳤을 때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그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형제의 얼굴은 한결 생기가 넘치고 화색이 돌았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형제의 사연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로웰 후작과 육망성 세력에 의해 납치와 감금을 당했었던 이들이었다.
“제가 일곱 살, 아르얀이 다섯 살 때 시설에서 후작가 수도 저택으로 옮겨졌었습니다. 그 이후는 8년 동안 저택 내에 숨겨진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록사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긴 감금 기간에 혀를 내둘렀다.
“좀 어릴 때라서 그전에 갇혔었던 시설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로웰 후작 령 내였던 거 같은데……. 하지만 시설 내부 구조나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 정도는 기억합니다.”
49호가 오래전 기억들을 더듬었다.
“우리 둘은 로웰 후작가로 옮겨지게 되어서 그나마 좀 덜한데 아직도 그곳에서는 실험당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거예요.”
아르얀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49호보다 더 어릴 때라서 그의 기억은 희미했지만 끔찍했던 광경들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시설이 두 사람이 갇혀 있던 곳일 거예요.”
“저희가 갇혀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안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하는 눈빛이었다. 형제의 눈동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로웰 후작 령 북쪽 경계선과 가까운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이종족 시설이 하나 존재하지.”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북쪽의 블랑카 왕국과 리온 제국 사이에 끼어 있는 거대한 숲이다. 일종의 완충 지역 같은 곳이었다.
또한 카일라니 공작 령인 레드포드의 서쪽 경계선과 겹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마물들의 서식지로 양 국가에서 접근 금지 구역이기도 했다.
아르얀과 49호가 화들짝 놀랐다. 사회 경험이 적은 그들이라도 자이언트 포레스트가 얼마나 위험 지역인지 잘 알았다. 그런 곳에 시설이 있었다니!
“철저히 은폐된 곳이라서 찾기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그걸 찾아냈다니! 대단하네요.”
아르얀이 아스테리온과 록사나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열렬하게 두 사람을 응시했다.
“워낙 삼엄한 곳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하고, 똑똑한 자들이라도 탈출에 성공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49호의 말에 록사나가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있었으니까.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우선이었기에 이 사실은 차차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록사나가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맞아요. 그래서 우리도 찾아보려고 했었어요. 어떻게든 그곳에 갇힌 사람들을 돕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로웰 후작 령으로 갈 수는 없었어요.”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그들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49호와 아르얀이 로웰 후작 령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어쩌면 그곳이 저희가 처음 지냈던 시설일 거 같습니다.”
모닥불 주변에 자리한 다른 사람들도 그 시설이 확실할 거라고 여겼다.
록사나가 화제를 돌렸다.
“로웰 후작가도 보안이 삼엄할 텐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어요?”
“…후작가 내부에서 도와준 이가 있었습니다.”
말투가 조심스러워진 49호가 아르얀을 슬쩍 바라보았다.
첫 심문 때는 아르얀이 49호 눈치를 보았었다. 반대로 지금은 49호가 아르얀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상황이었다.
아스테리온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사람이 누구지?”
“…….”
아스테리온이 직접적으로 캐물었다.
그러자 49호의 눈이 몇 번 끔뻑거렸다. 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49호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탈출을 도와준 은인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 사람은 로웰 후작의 딸이에요.”
아르얀이 아스테리온의 질문에 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아르얀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들 놀라서 귀를 의심했다. 그건 록사나와 아스테리온도 마찬가지였다.
경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음흉한 늙은이인 로웰 후작의 딸이 탈출을 도왔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로웰 후작에게 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바로 빅토리아 로웰 말이다. 그녀는 황가에 들어가 현 황태자 도노반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정말 그 빅토리아 로웰?”
안드레아스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었다가 급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얀의 입가에 미소가 부드럽게 흘렀다. 얼굴에는 그리움이 떠올랐다.
그 뒤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다들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스테리온과 록사나 앞에서 빅토리아를 화제로 올리기에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이혼하게 만든 원흉,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스테리온의 전 약혼자. 그리고 적의 딸.
“후작가를 탈출한 시기가 정확히 언제죠?”
모두의 침묵을 깨고 록사나가 먼저 입을 열자, 일행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휙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