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록사나가 형을 향해 악당 같은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그래요. 잠시 쉬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을 수 있죠. 근데요. 그거 알아요? 두 사람 모습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쉴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지 않아요.”
형제를 바라보는 록사나의 두 눈에는 경멸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나무 위에서 갑자기 떨어질 때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려는 행동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라면 나무 위에는 필사적으로 올라갔을 거예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뭔가를 피하기 위해서요. 그게 마물이나 산짐승은 아닐 거라고 자신해요.”
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건만, 조리 있는 록사나의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형은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르얀이 그런 형의 손을 꼭 잡았다.
“형, 우리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자.”
카일라니 공작의 심문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두 형제는 터놓고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하지만 두 형제의 짐승 같은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된다고.
공작은 세간의 평처럼 냉혹했다. 그들을 심문할 때 내뿜는 흉포한 기운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지저분한 고문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정도를 아는 이라는 판단이 섰다.
결정적으로 공작은 록사나 옆에서 자신의 음흉함을 단단히 감추며, 마치 순한 양처럼 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감은 양의 탈을 쓴 공작 앞이라 할지라도 록사나가 함께 있는 지금이 형제에게 가장 유리한 적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 형제의 시선이 맞부딪치고, 형이 결심을 굳힌 듯 얼굴을 돌렸다.
형이 록사나를 향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는 49호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단숨에 딱딱하게 굳었다. 다들 방금 들려온 단어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록사나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떼었다.
“방금 49호라고 한 거 맞죠?”
“네, 저는 이름 대신 49호라고 불립니다.”
아르얀의 형이자 49호인 갈색 머리 남자가 해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두 사람은 수인족인가?”
아스테리온은 49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간절히 거부했었던 두 남자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깜짝 놀란 49호와 아르얀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맞습니다.”
“네.”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도 속으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수인족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저희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는군요.”
49호가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를 번갈아 보았다.
“부정하지 않겠어.”
아스테리온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에둘러서 표현했다.
“형, 어쩌면 우리…….”
들뜨고 희망이 가득 담긴 아르얀의 목소리에 49호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49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아르얀과 같은 심정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잔뜩 부풀어 오르려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공작 일행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존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문제를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간 후에 다른 희망을 가져도 늦지 않으리라.
어느 정도 가슴을 진정시킨 49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두 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요.”
록사나의 유한 응답에 49호의 진노랑빛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이내 그는 용기를 냈다.
“두 분은 저희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답을 하기 전에 저도 하나만 물을게요.”
아르얀과 49호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질문의 답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나요?”
그들의 몸이 바짝 굳었다. 록사나의 녹안이 당장에라도 그들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리했다.
49후가 침묵을 깨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르얀은 없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하지만 형이 먼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고, 저희를 죽이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르얀이 필사적으로 49호를 변호했다. 그러면서도 분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록사나가 이내 한 손을 들어 올려 아르얀을 제지했다. 두 사람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을 할게요.”
49호와 아르얀은 피가 마르는 듯했다. 곧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뚫어져라 록사나를 응시했다.
록사나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이 갔다. 그들을 죽이려고 혹은 잡으려고, 뒤쫓는 자들을 피해 매번 도망을 치며 숨어 사는 삶.
형제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맞서 대항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러다가 상대방을 해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겠지.’
형제의 긴장감이 극에 달한 순간.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당신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한 위해를 가한다거나, 당신들을 뒤쫓는 누군가에게 당신들에 대한 말을 흘릴 일은 없을 거예요.”
형제의 턱이 쩍 벌어졌다. 현실이라기엔 너무나도 달콤해서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 그럼 저희는…….”
49호가 말을 더듬었다.
“당신들은 자유예요.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록사나가 몸을 일으키며 옆에 함께 선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연하게도 형제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두 사람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 봐요.”
록사나를 필두로 아스테리온과 두 기사도 몸을 돌려 자신들의 야영지로 걸어갔다.
이에 록사나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벨루카가 형제를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역시 휙 고개를 돌렸다.
록사나 일행의 모습이 형제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숲에 덩그러니 남겨진 형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참 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숲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멀찍이 떨어진 야영지에 켜진 모닥불만이 숲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형, 이거 설마 꿈 아니지?”
49호가 아르얀의 팔뚝을 세게 비틀어 꼬집었다.
“아얏!”
확 엄습해 오는 통증에 아르얀이 펄쩍 뛰었다.
“아르얀, 우리 꿈꾼 거니?”
“꿈이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저기로 가야 해! 어떻게든.”
팔뚝을 문지르는 아르얀의 홍안이 밤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반짝했다.
“어떻게든.”
49호도 뭔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 * *
한참 만에 돌아온 록사나 일행을 야영지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반겼다.
“늦으셨습니다. 한참 전부터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스가 기사가 떠 준 스튜 그릇을 네 개째 받아 들어 아이린이 들고 있는 쟁반에 옮기며 말했다.
“정말 배고팠는데 잘됐네요.”
록사나는 배식을 담당하고 있는 소렌 경 곁으로 다가섰다.
“소렌 경, 음식은 넉넉한가요?”
“네, 남작님. 충분하니까 두 그릇이든 세 그릇이든 많이 드십시오.”
“그럼 장정 기준으로 2인분 정도 따로 챙겨 놔 주세요.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소렌 경은 이유도 묻지 않고 록사나의 지시를 따랐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야겠다.”
록사나의 발걸음이 여러 개의 모닥불 중 비어 있는 모닥불로 향했다. 딱 봐도 수인족 형제를 위해 비워 놓은 자리였다. 세 사람이 그 뒤를 쪼르르 뒤쫓았다.
가는 도중에 안드레아스가 아이린이 든 무거운 쟁반을 대신 들어 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네 사람이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따끈한 스튜 한 그릇과 빵이 한 덩이씩 놓였다.
첫 스푼을 뜨기 전, 록사나가 선창하듯 모두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맛있게들 먹어요!”
“맛있게 드십쇼.”
“남작님도 맛있게 드세요.”
뒤를 이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록사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튜를 떠먹었다. 다른 이들도 자신들의 식사에 열중했다. 주변에서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음식을 섭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맛있어!”
록사나는 뜨거운 스튜를 연신 호호 불어 가며 떠먹었다. 푸짐한 고기와 야채 건더기가 빈 배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말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열정적으로 식사를 하는 록사나를 바라보며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그도 스푼을 쥐고 식사를 들었다.
스튜로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록사나는 빵을 찢어 스튜 국물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야영하면서 먹는 식사는 별미네요.”
록사나의 옆에서 아이린이 조잘거렸다.
“맞아. 아이린, 너는 이런 야영은 처음이지?”
“네. 그래서 모든 게 새로워요.”
“아이린 양, 야영도 한두 번이랍니다. 몇 번 더 해 보면 아이린 양도 아마 금세 여관방이 그리워질 거랍니다.”
한껏 신나 들떠 있는 아이린을 보며 안드레아스가 삶의 경험을 전파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야영을 좀 자주 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아이린의 긍정적인 태도에 역시 젊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안드레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났다.
“아, 잘 먹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몫을 모두 해치운 후 빈 그릇을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이를 본 아이린이 입 안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차 준비해드릴까요?”
“아니야, 아이린. 네 식사 다 끝난 다음에 천천히 준비해 줘도 돼.”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아이린은 이내 다 끝내지 못한 자신의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록사나와 비슷하게 식사를 마친 아스테리온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화제를 꺼냈다.
“두 사람을 그냥 보내 줘도 괜찮겠어?”
그의 질문은 아르얀과 49호가 로웰 후작가나 이종족 시설과 관련 있을 텐데 아무 정보도 얻지 않고 그냥 보내도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대답을 하기 전에 록사나가 힘을 사용해 자신들이 있는 모닥불 주변에 저소음 방음막을 펼쳤다.
저소음 방음막은 소리가 아예 차단되면 부자연스럽기에 두런두런 말소리를 유지하되,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그리고 시전자가 허락한 이들 눈에만 보이면서 방음막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청각이 예민할 수 있는 두 수인족이 근처 어딘가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