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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1)화 (101/214)

101화 

잠시 후, 백금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르얀이고, 옆에 있는 사람은 제 형입니다.”

“아르얀, 하지 마!”

“전혀 안 닮았는데.”

아르얀을 말리는 갈색 머리의 외침을 무시하며, 아스테리온이 그들을 다시 한번 쓰윽 훑었다.

한쪽은 백금발에 홍안이고, 다른 한쪽은 갈색 머리에 진노랑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체형조차도 달랐다. 아르얀이라는 자는 마르고 키가 컸으며 미인상이었다.

그와 달리 형이라는 자는 아르얀보다 한 뼘 이상 작았고, 마치 표범처럼 호리호리한 체형에 이목구비 자체가 굵고 뚜렷했다.

아무리 잘 봐 줘도 절대 형제 사이가 아니었다.

“저희는 친형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함께 자라왔으니 피를 나눈 형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르얀의 목소리에는 자신들은 형제라는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치고. 아르얀, 네 형 이름은 뭐지?”

아스테리온은 입을 굳게 다문 갈색 머리 남자 대신 이번에도 아르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당황했다.

아르얀은 모든 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이 표정을 감추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 않은 자였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형은… 이름이 없습니다. 아직 반려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반려자?”

배우자도 아닌 반려자라는 특이한 표현에 아스테리온은 물론 두 기사도 의아해했다.

그리고 반려자를 만나지 못해서 이름이 없다니. 그럼 아르얀은 이름이 있으니 반려자를 만났다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형이 이름이 없는 건 정말 사실입니다.”

아르얀은 정말 거짓 한 줌 없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너나 다른 사람들은 네 형을 뭐라고 부르지?”

“저는 형이라 부르고, 다른 이들은… 죄송합니다! 좋은 의미가 아니기에 말할 수 없습니다.”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구며, 아르얀이 입술을 굳게 앙다물었다.

아스테리온은 직감했다. 형이라는 자를 부르는 호칭에 숨겨진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두 사람을 보며 아스테리온이 다시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 힘이 형제를 막 덮치려는 찰나.

“아울!”

갑자기 은빛 늑대가 나타나 아스테리온과 아르얀 형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힘을 발휘해 아스테리온의 기운이 그들에게 쏟아지지 않도록 방어막을 쳤다.

“허! 너.”

벨루카라는 귀찮은 방해꾼에 아스테리온은 어이가 없어졌다.

반면에 아르얀 형제는 깜짝 놀란 눈으로 은빛 늑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스테리온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도 벨루카는 고개를 살짝 틀어 두 형제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걱정 말라는 듯이.

아르얀 형제는 낯선 은빛 늑대에게서 저도 모르게 친밀감이 솟아올랐다.

“벨루카 님, 지금 주군께서 일하시는 중이시니 이쪽으로 얼른 오시지요.”

두 기사가 벨루카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벨루카는 눈을 부릅뜨고, 아스테리온과의 대치 상황을 이어 나갔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법한 벨루카의 행동에 아스테리온이 이내 힘을 거두었다.

그러자 벨루카도 자신의 힘을 회수했다.

아스테리온은 말 못 하는 정령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과 평소 사이가 원만한 건 아니지만 말귀는 알아듣는 정령이었으니까.

“오늘 너의 주인이 크게 다칠 뻔했던 걸 기억하지?”

벨루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들 때문이었다. 수상한 자들이니 네 주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정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아스테리온이 손가락으로 아르얀 형제를 콕 집어 가리키자, 벨루카가 그들을 돌아보다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벨루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보다 조금 고민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비켜서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닐 텐데.”

신비한 힘을 가진 늑대와 카일라니 공작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는 아르얀 형제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형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늑대는 말 못 하고, 못 알아들을 텐데…….’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자신들과 같은 수인족일 거라고 짐작했었으나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인족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어찌 됐든 카일라니 공작에게는 불리하고, 자신들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아르얀은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늑대는 뭡니까?”

“알 것 없다.”

대번에 아스테리온이 차갑게 일별했다.

그때였다. 벨루카가 아스테리온의 바짓가랑이를 입으로 물어 당겼다.

“가자고?”

벨루카가 맞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르얀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똑같이 물고 잡아끌었다.

벨루카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챈 아스테리온이 두 기사에게 명했다.

“우선 돌아가자.”

【 수인족 형제 】

그리하여 아스테리온은 아르얀 형제를 다시 데리고 야영지 근처로 왔다.

그들보다 한참 앞서 뛰어가던 벨루카가 록사나를 불러오는 모습을 보고는 뒤돌아 말했다.

“여기서 잠시 대기하도록.”

눈으로는 기사들에게 아르얀 형제를 잘 감시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기사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아스테리온이 벨루카를 안아 든 록사나를 향해 걸어갔다.

“다 끝났어요?”

“그것 때문에 잠시 얘기 좀 나눴으면 하는데.”

“그래요.”

두 사람과 벨루카가 자리를 옮겼다. 야영지와 아르얀 형제가 있는 곳과도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좀 문제가 있어서. 그대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

아스테리온은 그동안의 심문 결과와 벨루카의 행동에 대해서까지 모든 사실을 록사나에게 말해 주었다.

“벨루카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요? 확실히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네요.”

이야기를 다 들은 록사나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벨루카를 내려다보았다.

“벨루카, 내가 저들과 이야기를 직접 나누었으면 좋겠어? 네가 느끼는 뭔가가 있는 거지?”

“아울~!”

벨루카가 확신에 가득한 목소리로 울며 꼬리까지 힘차게 흔들었다.

“내 짐작이 맞았군.”

아스테리온이 낮게 읊조렸다. 벨루카에게 정신이 팔려 이를 제대로 듣지 못한 록사나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혼잣말이었어. 그래서 당신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스테리온은 정중하게 록사나의 의사를 물었다.

“물론이에요, 공작님. 자, 어서 가시죠. 빨리 끝내고 저녁 먹어요.”

록사나가 서두르자, 아스테리온이 아르얀 형제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뒤를 록사나와 벨루카가 따랐다.

* * *

아르얀 형제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인물을 바라보다 일순간 온몸을 굳혔다.

아무도 정체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자신들 때문에 다칠 뻔했던 사람이 그녀일 거라는 걸 확신했다.

카일라니 공작 옆에 있었던 유일한 여인, 전 공작 부인이 틀림없었다.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어 화풀이를 하려고 오는 것일까?

아스테리온과 록사나가 그들 앞에 섰다.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

록사나가 아르얀 형제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자,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붙들어 자신의 옆에 바짝 세웠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아스테리온 나름대로의 조치였다. 그리고 여인처럼 곱상한 아르얀의 얼굴을 록사나가 가까이서 보지 않기를 바랐다.

감시 역할을 담당한 두 기사가 록사나에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그리했다.

록사나가 아르얀 형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다리 아프고, 저 사람들도 어디 앉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밧줄도 풀어 주세요.”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두 기사에게 눈짓을 했다.

두 기사가 무릎 꿇려진 아르얀 형제를 일으켜 세워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근처 커다란 바위 위에 형제를 나란히 앉혔다.

설마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밧줄을 풀어 줄까 싶었던 두 형제는 갑자기 자유로워진 팔의 움직임에 잠시 당황했다.

형제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두 손을 움직여 굳어 있던 팔을 스스로 주물렀다.

아스테리온이나 두 기사는 형제에게 밧줄이 풀렸다고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그 어떤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역시 카일라니 공작 혼자서도 충분히 우리를 제압할 수 있으니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건가?’

아르얀의 형이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그 역시 무력이라면 어디 가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아르얀의 컨디션이 아무리 최상이어도 카일라니 공작 한 명을 당해 낼 수 없음을 말이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역시 형제와 거리를 두며 적당한 위치의 바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록사나예요. 이쪽이 아르얀, 그리고 아르얀의 형이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아스테리온의 예상대로 아르얀이 대답했다.

“뜻밖의 사고로 만나게 되어 서로 불편한 상황이지만, 저는 두 분이 사실대로 솔직하게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 그전에 우리 쪽 상황 얘기 먼저 해 줄게요.”

록사나는 아르얀 형제에게 어쩌다 자신들이 그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사로잡아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실릴 때 기절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난 이후에 아스테리온의 성격상 그들에게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 주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감사합니다, 록사나. 사실 저희도 어쩌다 여러분들 손에 잡혀 오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했었는데 덕분에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형의 얼굴로 아르얀이 고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형 역시 표정에서 한결 의문이 가셨다.

반면에 아스테리온의 눈매는 대번에 사나워졌다. 아르얀의 행태가 몹시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록사나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못마땅함을 지그시 내리누르는 가운데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록사나와 아르얀이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두 사람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건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은 거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아르얀이 대꾸하려고 하는 찰나에 내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던 형이 말을 가로챘다.

록사나가 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나무 위에서 잠깐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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