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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9)화 (99/214)

99화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어, 아벨리오 남작. 부디 화를 풀고 너그러이 용서해 줘.”

그가 한 템포 간격을 두고 호흡을 조절했다.

아스테리온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록사나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덩달아 안드레아스와 아이린도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내심 아이린은 록사나가 그냥 저택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수도 저택은… 어차피 필요한 상황이잖아. 그러니 우선은 사용하는 방향으로 하고 저택 구입비를 추후 분납하거나, 아니면 사용료를 매달 또는 연납으로 지불하는 건 어떨까? 사용하지 않아도 유지 관리비는 드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저택에 거주해 준다면, 공작가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이득이 될 거야.”

아스테리온의 진심 어린 사과와 새로운 제안을 다 들은 록사나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생각해 볼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표정만은 한결 부드러웠다. 실내 공기도 한층 가벼워졌다.

“고마워.”

록사나는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 눈길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아스테리온은 그런 그녀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역시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둘의 대화에 숨죽이고 있던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가는 듯한 상황에 각자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은 은근히 깐깐한 상사를 모시는 서로에게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그리고 네 사람은 각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록사나 일행은 콘테 자작 령의 첫 번째 마을에서 수도행 첫째 날 밤을 보냈다.

다사다난했던 첫째 날을 제외하고는 마차 안에서 네 사람의 동행은 평온하고 무난했다.

주로 수도의 동향을 공유하며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머무는 마을마다 카일라니 공작가 정보부가 보내오는 통신용 새가 큰 도움이 되었다. 큰 시차 없이 수도의 동향과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일째 되는 날 저녁에는 별 탈 없이 카우슬립 후작 령에 도착했다. 수도를 3일 정도 남겨 둔 거리였다. 평균 도착 예정일보다 이틀이나 단축된 셈이었다.

* * *

록사나 일행은 카우슬립 후작 령의 중심 도시인 우슬립 중앙 거리에 위치한 적당한 등급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최고급 여관에 머물게 될 경우,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고위 귀족들과 마주칠 수 있었기에 일부러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귀족들과의 만남은 수도에 온전히 도착하기 전까지는 피하고 싶었다.

록사나 일행은 각자 배정된 방에서 휴식을 먼저 취하기로 했다.

아무리 편하게 이동했다고는 해도 장장 9일 동안이나 마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심적으로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때는 말을 타고 가야겠어.’

록사나가 창가로 다가서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사이 벨루카는 넓은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 제 자리를 잡았다.

록사나가 머무는 방은 여관에서 가장 높은 층인 3층이었다. 커튼 한쪽을 걷어 내자, 노을이 지고 있는 우슬립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수도에서 가까운 영지라 그런지 시내 규모가 꽤 크네.’

번화한 거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만큼 계층들도 다양했다.

카우슬립 후작 령은 북서부에 위치한 영지들이 수도로 향할 때 대부분이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주요 관문이었다.

그 덕에 외부인을 통해 벌어들이는 부가 수익이 꽤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카우슬립 후작가는 무역 사업을 기반으로 리온 제국 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유했으며 황제파였다.

어찌 보면 캠든의 경쟁 상대 중 한 곳이었다.

록사나는 시내를 지나오며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 부유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머리에 동물 머리띠를 쓰고 있는 걸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캠든 상단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론 여지없이 모조품도 더러 눈에 띠었다. 하지만 록사나는 이를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색상과 디자인, 품질 등 모든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모조품의 등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미리 대비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조품을 착용한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가격대의 오리지널 제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조차 주머니 상황이 넉넉하지 않아 저렴한 모조품을 사 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선물을 받고 기뻐할 것이다. 록사나는 그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앗아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울~”

벨루카가 창밖만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 록사나를 재촉했다.

“그래, 알았어. 쉴게.”

록사나가 몸을 돌렸다. 침대로 다가가 벌렁 드러누웠다. 하지만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벨루카가 고개를 치켜들고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점점 수도가 가까워지는 상황 속에서 록사나의 마음은 무거워졌고, 이 상태라면 눕는다고 해도 편히 쉬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록사나는 그동안 내내 그녀를 괴롭히며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던 문제를 꺼내 들었다.

“있지, 벨루카. 그 수도 저택을 받아야 할까?”

“아울!”

늑대 정령은 망설임 한 번 없이 바로 답했다.

“네 대답은 참 칼이구나. 내 자존심이 문제지.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내게는 이득인데 말이야.”

록사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녀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아스테리온의 얼굴은 나날이 어두워져 갔다. 양쪽 보좌관들도 계속해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록사나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래, 결심했어! 어차피 공짜로 살 거 아니니까, 사 버리자! 5만 골드는 당장 마련하기 어려우니까 까짓것 할부로 사지 뭐.”

벨루카가 잘했다는 듯 그녀의 손에다가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고는 비벼 댔다.

록사나가 다른 한 손으로 벨루카의 몸을 쓸어내렸다. 짐을 덜어 내니 심리적 안정감이 몰려왔다.

* * *

다음 날 아침, 별다른 문양이 없는 세 대의 마차가 우슬립 시내를 벗어나 다시 수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마차 안에서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에게 말을 건넸다.

“그 저택 말이에요.”

보고서를 살피려고 머리를 숙이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록사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아스테리온에게서는 불안정해 보이던 이전의 기색과는 달리 어떤 결과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함이 엿보였다.

“결정했나 보군.”

“네. 구입할게요, 할부로.”

록사나를 제외한 마차 안 모든 일행의 표정이 단번에 화악 밝아졌다.

“편한 대로 해.”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저도 축하드려요.”

아스테리온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은 수도에 멋진 저택을 구입하게 된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고마워요, 여러모로요. 계약서는 수도 저택에 도착해서 작성하는 걸로 해요.”

“나야말로 받아 줘서 고마워. 계약서 작성은 그대 말대로 할게.”

아스테리온의 청명한 두 눈이 사르르 접혔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의해 그의 금빛 머리칼이 한층 더 반짝였다.

20대 중반의 아스테리온이 순간 해맑은 소년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윽! 뭐야?’

순간 록사나의 심장이 두근거릴 뻔했다.

아스테리온의 모습이 눈이 부셔서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비켰다.

한층 누그러진 마차 안 분위기에 아이린과 안드레아스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사람의 마음속에도 간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대화가 끊겼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아이린은 손뜨개를 했고, 안드레아스는 서류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스테리온도 보고서를 살피는 데 열중했다.

반면 록사나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는 벨루카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독서를 하기에는 간혹가다 마차 멀미를 했고, 손뜨개를 하자니 손재주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마차가 급작스럽게 멈춰 섰다.

“악!”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록사나와 아이린의 몸이 앞쪽으로 확 쏠렸다.

벨루카가 마차 바닥에 착지하며 순간적으로 마차 전체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는 두 사람의 몸을 붙잡아 주었다. 덕분에 두 사람이 바닥을 구르는 상황은 모면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가녀린 몸을 꽉 부둥켜안은 채 물었다.

“난 괜찮아요.”

록사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바로 옆에서 안드레아스가 자신들도 무사하다고 알려 왔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마부석과 연결된 문을 통해 필립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네, 안 다쳤어요.”

아이린이 모두를 대신에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마차 밖에 있던 마르셀이 다급히 창가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모두 무사합니다.”

이번에는 안드레아스가 마르셀에게 응답했다.

“무슨 일이지?!”

아스테리온이 마르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사가 대체 몇 명인데 호위를 이따위로 하느냐고 눈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마차 앞으로 떨어져서 급하게 멈췄습니다!”

마르셀이 바짝 군기가 든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아스테리온이 내뿜는 살기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모골이 송연했다.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떨어졌다고? 똑바로 말하게! 그리고 몇 명이나?”

“네! 그게 갑자기 떨어진 게 맞습니다. 위에서요! 하늘에서인지 나무 위에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모두 두 명입니다. 지금 다른 기사들이 보다 정확한 상황을 조사 중에 있습니다.”

마르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본 록사나가 자신의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한 아스테리온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놔줘요.”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팔을 두드렸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향해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록사나는 여전히 자신의 품에 갇혀 있었다.

“아직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빨리요.”

록사나의 재촉에 아스테리온이 마지못해 팔의 힘을 풀며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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