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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8)화 (98/214)

98화 

‘예전부터 진작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더라면 우리 둘 사이가 많이 달라졌을 테지.’

그에 반해 록사나와의 이번 마차 여행은 무척이나 유쾌하고 즐거웠다. 아무리 들어도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아스테리온은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쫑긋 세웠다.

록사나가 무릎 위의 벨루카를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자신에게 무척이나 유해진 아스테리온이 카펫을 펴 주자, 냉큼 받아들였다.

“리온 제국뿐만 아니라 우리 서대륙에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잖아요. 물론 배나 커다란 선박은 예외로 하고요.”

“그렇죠.”

“맞아요.”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이 쉽게 공감했다.

“동대륙에서 비행 마물을 조련해 이동 수단을 삼는 것도 예외로 하는 건가?”

“아니요. 왜냐하면 마물도 어쨌든 생물이잖아요. 말처럼 건강 상태가 안 좋다면 운항이 어렵게 되잖아요.”

아스테리온의 날카로운 질문에 록사나가 가볍게 반박했다.

“그래서 남작님께서 이번에 말씀하시고자 하는 획기적인 운송 수단은 또 어떤 겁니까?”

오전부터 이어진 장시간의 대화를 통해 눈치가 빨라진 안드레아스가 미리부터 설레발을 쳤다. 그러나 결코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말 없이 마차를 끌 수 있고, 말을 타지 않고 이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조련된 비행 마물을 타지 않고 하늘길로도 오갈 수 있다면 어떨 거 같아요? 여기에 더해서 선박을 더 빠르게, 더 멀리 운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떨 거 같아요?”

록사나는 그야말로 단숨에 혁신과 변혁으로 점철된 미래를 보여 주겠다는 듯 어마어마한 질문을 던졌다.

안드레아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 게 가능하겠냐는 반응이었다.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먼저 록사나에게서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일찍 들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상상하는 것이 더 이상은 어려웠다.

마차 안에 오랜만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록사나가 던진 질문에 대해 각자 생각을 이어 가느라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반면에 록사나는 느긋하게 마차 문 안쪽에 설치된 간이 탁자를 펼쳤다. 그러고 나서는 의자 밑에 구비되어 있던 찻잔 세트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 외에도 하나둘씩 필요한 물품들을 의자 밑에서 꺼내었다. 그중 수동 그라인더를 이용해 로스팅된 커피 원두를 놓고 갈기 시작했다.

록사나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순면으로 만든 필터를 펴서 그 위에 곱게 갈린 커피 가루를 담았다. 이어서 마력 보온병에 든 따뜻한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이 마력 보온병은 너무 비싸고 마력 잡아먹는 하마란 말이야. 수도에 다녀오고 나서 하루빨리 보급용 보온병 개발에 착수해야겠어. 보냉병도 추가하고.’

캠든 성의 마도 공학자들이 모르는 사이 야근이 기정사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내 은은한 커피 향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향기에 이끌린 세 사람의 시선이 록사나에게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록사나는 네 개의 잔에 커피를 적당히 따랐다. 거기에 1:2 비율로 따뜻한 우유를 붓고 꿀을 한두 스푼씩 첨가했다.

‘머리 쓸 때는 달달한 라테가 최고지!’

나머지 하나의 잔에는 우유만 부었다.

록사나가 잔을 하나씩 들어 건넸다. 벨루카에게는 우유를, 세 사람에게는 완성된 간이식 카페라테가 각각 한 잔씩 쥐여졌다.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가 처음 맡아 보는 커피 향에 록사나를 아기 새처럼 쳐다보았다.

록사나가 잔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한 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가 넘겼다.

아이린도 자연스럽게 이를 따라 했다.

“아직은 뜨거우니까 조심하면서 마셔 봐요, 머리 회전시키는 데 제법 도움이 될 거예요.”

록사나의 조언에 두 남자도 카페라테를 한 모금씩 홀짝이기 시작했다.

“음?”

“이것 참 맛이 고소하면서도 달달하고 그러면서도 뭐라고 할까……?”

짧은 반응을 보인 아스테리온과 달리 안드레스아가 적당을 말을 찾으며 맛을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썼다.

“커피 맛이에요. 지금 마시는 건 커피 음료의 일종인 카페라테라고 하고요. 커피에 우유랑 꿀을 첨가했어요.”

“그렇군요. 커피 맛, 카페라테…….”

안드레아스가 처음 들어 보는 차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읊조렸다.

커피 이야기를 자세히 시작하자면, 베렛 공국과 종이 개발까지 말해야 했다. 록사나는 이에 대한 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해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커피 관련 이야기는 차차 알려 줄게요.”

두 사람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 개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오스카 대공자와의 협력 관계가 어느 정도 공고해질 때까지는 비밀에 부치는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신 편할 대로 해.”

아스테리온은 때가 되면 록사나가 자연스럽게 말해 줄 것을 알았기에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던진 질문들은 차근차근 생각해 보세요. 그게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문제들만으로도 서로 벅차잖아요.”

앞으로 수도에서 지내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암시였다.

“그래. 우선은 수도에서의 일정을 잘 마무리하고 무사히 귀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수도에서 당신 머물 곳이…….”

아스테리온이 다리를 꼬며 안드레아스를 슬쩍 건드렸다. 록사나와 아이린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 남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안드레아스가 거의 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업무 가방을 챙겨 들며 말했다.

“수도에서는 여관에서 머무신다고요?”

“네, 아직 수도에 저택을 마련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겸사겸사 구매할 만한 저택도 좀 알아보려고 해요.”

“그럼 이 저택은 어떠십니까?”

“네?”

안드레아스가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하나 꺼내 들어 대뜸 록사나 쪽으로 들이밀었다.

엉겁결에 록사나는 이를 받아 들었다가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이린이 궁금해서 록사나의 옆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자 록사나가 아이린에게도 잘 보이도록 서류를 위치시켰다.

두 여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안드레아스가 자신의 주군을 슬쩍 쳐다보았다. 마치 잘하지 않았냐는 듯한 눈빛을 하고선.

아스테리온은 힐끔 한 번 안드레아스를 쳐다보고는 록사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보좌관이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냉정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안드레아스는 주군의 태도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저 정도면 제법 칭찬에 속했다.

“오, 저택 정보네요. 게다가 1구역에 위치에 있다니, 위치는 완전 좋은데요!”

아이린의 말처럼 1구역에 소재한 저택의 정보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저택과 건물의 규모, 연식, 부대시설, 접근성, 심지어 포크와 스푼 개수까지 적혀 있는 서류는 누가 작성했는지 꼼꼼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모든 면에서 록사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적어도 한 번쯤은 방문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 금액만 맞는다면 당장에라도 구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록사나의 손이 마지막 장에 다다라 우뚝 멈췄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스테리온을 노려보았다.

“이게 뭔가요?”

날카로운 말투에 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건…….”

“그건! 누락되었던 남작님의 위자료입니다!”

안드레아스가 선수를 쳤다.

잠시간 마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는군. 대체 일들을 어떻게 이따위로 처리하는지 원.”

아스테리온의 급작스러운 타박에 안드레아스의 몸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계속 무탈하게 벌어먹고 살려면 순발력을 발휘해 처신을 잘해야만 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 죄송합니다. 저희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남작님께서 위자료 서류에 사인하실 당시 실제로 누락되었던 건수였습니다. 정말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 없는 트레버까지 싸잡아 말하는 안드레아스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애절했다.

카일라니 공작가만큼 넘치는 보수를 주는 귀족가는 없었다. 황제의 최측근 보좌관보다도 급여가 높으니 말해 뭐 하랴.

“하! 지금 나보고 그 사실을 믿으라고요?”

록사나가 헛웃음을 흘리며 차갑게 응수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사고 싶다 생각했던 저택 서류의 소유자란에는 록사나 아벨리오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 말이다.

즉,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사고 싶어 욕심이 났던 저택이 이미 록사나의 소유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백이면 백 옳다구나 하고 넙죽 받았을 정로도 고가의 저택이었다.

공작가 버금가는 규모의 1구역 대저택이니 못해도 5만 골드는 나갈 것이다.

평민 중산층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1골드쯤 한다. 5만 골드면 대략 4,166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재력이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 끝난 위자료 문제를 지금에 와서야 다시 덧붙이는 공작의 속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혼한 전 부인인 자신에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연모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정도가 너무 과했다. 솔직히 이혼 당시 그가 건넨 위자료도 차고 넘쳤다.

그렇다고 그녀를 동정해서 적선하듯 저택을 챙겨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록사나는 그 이유가 어떻든 그에게 더 이상 이렇게 큰 뭔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일절 없었다.

당당히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히 일어서며 독립심을 키워 가고 있는 찰나에 아스테리온의 도움은 록사나에게 독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의미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아스테리온이 준 위자료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것이었기에 완전한 독립으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혼 당시 그에게 받은 위자료만큼은 그녀 자신이 받아 마땅한 정당한 대가였다. 애초부터 상호간의 합의에 따른 거래에 의해 받은 것이므로 록사나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떳떳했다.

시간이 지나도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 록사나 때문에 세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서로의 눈치만 한없이 보았다.

몇십 분 전까지 화기애애했던 마차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가운데, 냉기는 여전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 누락된 위자료라는 명목으로 해당 저택을 공들여 준비했었다.

그 과정에서 미처 록사나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만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테리온이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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