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7)화 (97/214)

97화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계단을 내려오자, 마르셀이 맨 앞의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록사나가 그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마차에 올랐다.

그녀의 뒤를 이어 벨루카가 훌쩍 뛰어올랐고, 아스테리온, 아이린, 안드레아스가 함께 탑승했다.

나머지 다른 마차 중 한 대는 일행의 짐용이었다. 세 번째 마차에는 캠든 영지의 개발품과 특산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영주와 공작이 두 명씩이나 움직이니 원래라면 더 많은 짐을 챙겨야 했다. 그러면 그만큼 마차 수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록사나는 빠른 기동성을 위해 최소한의 짐만을 챙겼다. 더 필요한 물품은 수도에서 구입할 예정이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에 비해 챙길 짐들이 훨씬 적었다. 수도 저택에 다 구비되어 있어서 여행 중 사용할 여벌의 옷 위주로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안드레아스가 마부석과 연결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노련한 마부 필립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럼 출발합니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콜트가 두 번째 마차를 몰았고, 카일라니 기사단원 한 명이 세 번째 마차의 마부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셀은 말을 탄 나머지 카일라니 기사단원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기사단은 상하좌우로 마차 주변을 감싸며 속도를 맞춰 나아갔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마차가 한 점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까지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영주의 수도행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 역시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너도나도 잘 다녀오시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에 록사나 역시 창밖을 바라보며 손 인사를 해 주었다.

시내를 벗어나 쿠엔틴 백작 령과 연결되는 캠든 영지의 주요 도로를 따라 마차가 힘차게 달렸다.

조용한 가운데 아이린이 말문을 열었다.

“길이 고르니까 확실히 흔들림이 적어서 편하고 좋아요!”

“그렇지?”

록사나 역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지의 주택 정비 사업과 함께 시작한 도로 정비 공사는 바로 그 효과를 입증했다.

“길이 제법이군.”

“제가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승차감이 최곱니다!”

맞은편에 역방향으로 앉은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도 기꺼이 호응을 해 주었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수도의 최상급 도로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길은 왕복 4차선으로 넓고 고르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제대로 완공된 길은 아직까지 이 도로 하나지만 두고 보세요. 이것과 같은 형태의 도로가 조만간 캠든 영지 전역에 퍼질 테니까요.”

“역시 남작님은 남다르시군요!”

록사나의 원대한 계획에 안드레아스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이린은 제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뿌듯해했다.

한참 동안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테리온이 시선을 돌려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뭔데요?”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질문을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어 모르는 척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도로 양쪽에 각각 있는 또 다른 길 두 개 중 하나는 인도인 걸 알겠어. 그런데 다른 하나는 무슨 용도지?”

“어, 그러네요?”

주군의 말에 창밖을 내다본 안드레아스 역시 그제야 고개를 갸우뚱했다.

록사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위로 향했다.

“역시 공작님은 남다르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던데.”

그녀가 뜸을 들이자, 아스테리온의 한쪽 눈썹이 들썩거렸다. 빨리 답을 알고 싶어 하는 아이의 호기심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한번 맞혀 보실래요?”

장난기가 발동한 록사나가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옆에 앉은 아이린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아이린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가득 피어올랐다. 영주님의 얄미운 전 남편을 골린다는 생각에 절로 즐거웠다.

“음……. 다른 용도의 인도인가?”

잠시 생각을 마친 아스테리온이 슬며시 록사나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답이었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띠고서.

“땡! 아니에요.”

“크크큭.”

“하하하.”

“아울~”

록사나의 단호한 외침에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이 동시에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록사나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벨루카도 한몫 거들었다.

“흠!”

무안해진 아스테리온이 헛기침을 크게 하자, 아랫사람인 안드레아스와 아이린이 눈치를 보며 입을 합 다물었다. 하지만 자꾸 들썩거리는 입꼬리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안드레아스도 같이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

아스테리온은 혼자만 창피를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보좌관인 안드레아스를 끌어들였다. 이에 안드레아스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까라면 까는 게 아랫사람의 도리였다.

“그렇게 하세요.”

록사나가 흔쾌히 승낙하자, 이후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록사나와 아이린은 재미난 광경을 구경하듯 느긋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관찰했다.

록사나가 아스테리온까지 한 마차에 타고 간다고 했을 때 처음에 아이린은 불편해 숨 막혀 죽지 않을까 하고 질겁했었다. 그래서 록사나에게 마차를 따로 타고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간소하게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린 록사나에게 어떠한 불만도 없었다.

세상 무섭고 하늘같이 높은 줄만 알았던 공작님을 놀려 먹는 재미가 이렇게 쏠쏠할 줄이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안드레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와 공작님은 각자의 답을 말하겠습니다.”

안드레아스가 동의를 구하듯 그녀를 바라보자,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저는 어린아이와 함께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길 같습니다. 아무래도 짐을 잔뜩 들고 다니거나 커다란 어른들 사이에 어린아이들이 다니다 보면 치여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름 합당한 답변에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고 정답은 아니었지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죠?”

“남작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에 관심이 많으시잖습니까.”

안드레아스는 자신하며 록사나가 영지에서 펼치고 있는 주요 정책들 중 몇 가지를 떠올렸다.

학교 설립과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아이들 급식에 관한 것들을 봤을 때 저 수수께끼 같은 길 하나도 그런 것의 일환이지 않을까 유추했다.

“음, 그렇군요. 그럼 공작님 답변은요?”

“나는 우마차 같은 것들을 위한 길이 아닐까 싶은데. 일반 마차는 속도가 빠른 편이니까 속도가 느린 우마차가 같이 달리다 보면 길이 정체될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스테리온의 답변에 록사나의 눈이 반짝였다. 이에 희망을 느낀 그의 두 눈에는 덩달아 기대감이 차올랐다.

“아쉽지만 둘 다 땡! 정답은 아니랍니다.”

한껏 부풀었던 두 사내의 커다란 어깨가 한순간에 푹 꺼졌다.

“하지만.”

“하지만?”

록사나의 다음 말에 두 남자가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어깨가 다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들은 제발 자신의 대답이 맞기를 바라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공작님이 정답에 얼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좋았어!”

아스테리온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록사나와 아이린이 그를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모든 희망이 무너진 안드레아스는 마차 한구석에서 몸을 수그리며 명멸했다.

서로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시자, 록사나가 퀴즈를 내었던 길의 용도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마차는 아니고 나중에 자전거가 다닐 길이에요.”

“자전거?”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가 낯선 용어에 호기심을 보였다. 반면에 아이린은 예전에 이미 록사나에게 설명을 들었기에 자전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전거는 평민들의 주요 이동 수단이자, 소형 운송 수단이 될 거예요.”

아이린이 옆에서 눈치 좋게 종이와 펜을 꺼내 록사나에게 건네주었다.

록사나는 그림을 그려 가며, 자전거의 형태와 용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저렴하게 서민들에게 보급할 수 있다면 참으로 가볍고 유용한 이동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생 행정관인 안드레아스라 할지라도 자전거의 가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평민들은 마땅한 이동 수단이 없어 먼 거리를 대부분 걸어 다녀야만 했다. 어쩌다가 우마차나 마차를 얻어 탈 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영지민들의 삶과 질이 당장 확 개선될 것이다.

“멋집니다! 하루 빨리 출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그대는.”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서는 진정성이 묻어났다.

록사나는 그가 지금까지 봐 온 어떤 사람보다도 훌륭하고 뛰어난 인재였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자신의 성안에 갇혀 지내느라, 날개 한 번 제대로 펼쳐 보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실수가 뼈에 사무치도록 미안하고 씁쓸했다. 지금에 와서 죽도록 후회해 봤자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 * *

록사나 일행이 대화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쿠엔틴 백작 령의 중심지인 앨론드라에 진입했다.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이라 일행은 이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그들이 오늘 저녁에 목적지로 하고 있는 곳인 콘테 자작 령의 경계선 마을에 늦지 않게 다다르려면 부지런히 가야 했다.

여관 식당에서 서둘러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는 다시 열띤 대화가 오고 갔다.

“캠든 영지에서 수도까지 마차로 15일이나 소요되니… 너무 오래 걸려요.”

“어쩔 수 없지요. 영지 사정에 따라 수도로 이어지는 길이 다들 천차만별이니까요.”

록사나의 반푸념에 안드레아스가 응수했다.

“전 영지에 이곳의 메인 도로 같은 게 깔린다면 며칠은 단축할 수 있을 거야.”

사실 레드포드 영지도 캠든의 메인 도로 못지않게 도로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부러 캠든 영지를 예로 들었다.

왠지 록사나의 푸념이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얘기를 꺼내서 놀라게 하려나.’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가 더해졌다.

평소 때라면 주야장천 마차에서 서류만 들여다보기 바빴었다. 록사나와 장거리 마차 이동을 할 때도 여지없었다.

지루하고 미련한 과거들이 떠오르며 아스테리온의 마음속에 후회 한 국자가 담뿍 더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