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내게도 봄 사교계 초대장이 도착했을 거야. 도중에 만나게 되어 동행하게 된 거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캠든 기사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투입되어서 호위 인원을 빼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 말이야.”
전보다 규모가 더 커지기는 했지만 아직 캠든 기사단의 수가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록사나가 거절할까 봐, 아스테리온의 두 손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록사나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좋아요. 나야 고맙죠.”
“나야말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확 드러나며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윽! 뭐야?!’
마치 태양이 떠오른 듯 주변이 확 밝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록사나의 양 볼에는 살짝 붉은 기가 피어났다.
자신의 허락이 뭐라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좋아하는 아스테리온의 모습을 보는 게 조금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5월 초쯤에 수도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 * *
“어서 오세요, 로웰 후작.”
“강녕하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로웰 후작이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노반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론입니다. 보다시피 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요. 그리고 또…….”
로웰 후작이 도노반의 손짓에 따라 맞은편에 앉으며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파베르 사건 이후 처해졌던 근신이 완전히 풀린 것과 더불어 다른 좋은 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도노반이 옆 협탁에 놓여 있던 봉투 하나를 들어 올려 보였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 아니지. 아벨리오 남작이 봄 사교회에 참석한다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도노반이 말했다.
“그렇군요. 잘되었습니다.”
“다 로웰 후작 덕분입니다.”
웬일로 변덕이 심한 도노반이 공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저는 그저 언급만 했을 뿐 실행에 옮긴 것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로웰 후작이 노련하게 그 공을 도노반에게로 돌렸다. 이제 시작이라 공이랄 것도 없지만 말이다.
“하핫하. 아무튼 아벨리오 남작 부군을 우리 쪽 사람으로 세우는 게 어떻겠냐는 후작의 생각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 여자도 많이 젊고 상단이랑 영지 경영이 힘들 터인데 내가 힘이 되어 줄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어느새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의 호칭은 ‘그 여자’로 격하되었다.
요즘 수도에서 한창 뜨고 있는 캠든 상단을 집어삼킬 생각에 신이 난 도노반은 록사나가 재혼 생각이 있으니 회신을 보낸 것이 아니겠냐며 멋대로 해석해서 지껄였다.
자금줄을 하나 챙길 생각에 도노반이 너무 들뜬 것 같자, 로웰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모르니 카일라니 공작 쪽과의 관계를 계속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혼까지 당한 마당에 전 남편이 뭐가 예쁘다고. 설마 카일라니 공작이 전 부인의 재혼을 막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만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그만 아닌가.”
도노반은 록사나가 아스테리온과 원수 같은 관계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또한 큰 자금줄이었던 파파베르 사건이 들통난 후 경제적으로 다소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던 도노반에게 새로운 자금줄이 되어 줄 것이다.
‘쯧쯧. 저리 자신만만해서야.’
로웰 후작이 도노반의 단순한 사고방식에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후작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능력 하나 없던 록사나 아벨리오가 상단 대리인을 잘 만나 승승장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로웰 후작은 ‘적의 적은 동지다’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록사나를 쓰고 버릴 패로 선택했다.
사실 카일라니 공작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혼한 사이이니 이쪽에서 손을 쓴다고 해도 그가 나설 명분은 약했다. 뭔가 손을 쓰려고 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이리라.
“아, 가져왔습니까?”
도노반이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탁한 연보랏빛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역시!”
로웰 후작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자, 도노반이 이를 반기며 바로 낚아챘다.
그것을 눈높이에 맞춰 들어 올린 도노반이 히죽 웃었다. 손가락 하나만큼 작은 유리병 안에는 검은 알약 같은 것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용무를 다 마친 로웰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유리병에 정신이 팔린 도노반을 뒤로하고 황태자의 응접실을 나섰다.
황태자 궁을 떠나는 로웰 후작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가 뒤를 돌아 웅장한 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볍고 구슬리기 좋은 인물이기에 도노반을 황태자로 선택한 것이긴 했지만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때때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행동하다 보니 수시로 신경 써야 해서 번거로웠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못 잡아들이는 것이야?!’
로웰 후작은 며칠 전 있었던 수하의 보고를 떠올렸다. 달아난 이종족들의 흔적이 레드포드 영지에서 끊겼다는 내용이었다.
하필 카일라니 공작 령이라서 그의 수하들로는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벌써 잡아들였어야 했는데……. 그것들이 어딘가에서 모두 죽었기를 바랄 수밖에. 그리고 시설 관리에 대한 경비를 더 강화해야겠군.’
이 이상 이종족들이 탈출해서 그 존재와 시설이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했다.
【 수도행 】
프레드릭이 베렛 공국에서 돌아왔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하셨어요. 프레드릭.”
“아닙니다. 여행과 다름없어 좋았습니다.”
록사나의 치하에 프레드릭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제법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서 건네었다.
“오스카 대공자님의 서신입니다.”
고급스러운 종이로 작성된 편지를 록사나가 펼쳐 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프레드릭은 준비된 커피 원액에 따뜻한 우유를 부어 만든 부드러운 카페라테를 음미했다.
완연한 봄이라 베렛 공국에서 마셨던 아이스 카페라테가 그립기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괜찮겠군.’
어느새 커피 맛에 중독된 프레드릭이었다. 날이 더워지는 대로 즐길 수 있는 커피 음료들을 떠올리니 즐거웠다.
록사나가 건네준 커피 음료 레시피는 그야말로 오스카 대공자와 그 주변인들을 경악시켰다.
커피 추출 방식을 바꾸자 단번에 쓰고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시고 달고 쓴 오묘한 맛의, 제법 마실 만한 음료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레시피 팁을 토대로 개발한 커피 음료들은 하나같이 황홀했다. 여기에 어울릴 만한 티 푸드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프레드릭 역시 그 과정에 참여했었기에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맛봤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서신을 내려놓으며 록사나가 환하게 웃었다.
“아무렴요. 영주님께서 진행하신 일인데요.”
“제가 준 건 완벽한 레시피가 아니라서 사실 조금 염려하기는 했거든요. 그래도 오스카 대공자와 그 측근들이 잘해 내 줘서 기쁘네요.”
“네. 오스카 대공자님의 지지도나 세력이 약해서 그렇지, 주변 인물들은 다들 쓸 만했습니다.”
“그래서 더 기대돼요. 앞으로 커피로 카페 사업과 사교 활동이 성공해야 우리 쪽 일도 잘 풀릴 테니까요.”
“제가 떠나올 때 그것 때문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 지금쯤이면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주님.”
프레드릭이 잔을 내려놓으며 진중한 얼굴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이에 그녀가 편히 말해 보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들을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는 우리가 진행하는 걸로 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럴 여력이 안 되는 걸요. 그리고 베렛 공국의 제지 기술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알맞은 거래라고 생각해요. 또 커피 원두는 오스카 대공자 쪽에서 먼저 발견하고 선점한 것이니 그 공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고요. 어찌 됐든 이번 거래는 여러모로 서로에게 이득이 될 거예요.”
프레드릭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리 영지가 여러모로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실 일이 없도록 제가 옆에서 뼈가 바스러질 때까지 열심히 돕겠습니다.”
“어머, 프레드릭. 오래도록 부려 먹을 건데 뼈가 바스러지면 어떡해요? 그것만은 절대 안 돼요.”
록사나의 너스레에 프레드릭이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 * *
이른 아침, 수도로 떠나는 록사나를 배웅하기 위해 프레드릭을 필두로 저택 현관 앞에 저택 내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일렬로 모여 있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1층으로 내려오자, 그들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공작님.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나 없는 동안 우리 영지 잘 부탁해요, 프레드릭. 그리고 여러분도요.”
록사나가 당부의 말을 건네며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캠든에는 빨라도 두 달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아스테리온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록사나가 마지막으로 풀이 죽은 채 서 있는 키얀에게로 다가갔다.
아직은 수인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기에 자신을 데려갈 수 없다는 걸 키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록사나가 며칠 전에 미리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래서 떼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록사나와 무려 두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기분이 절로 곤두박질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키얀이 록사나가 손을 잡자 얼굴을 들었다.
“키얀, 다음에는 수도에 꼭 함께 가자.”
“정말이죠?!”
“그럼.”
록사나가 미소를 지으며 확답을 주자, 그제야 키얀의 침울하던 얼굴이 펴졌다.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알았지?”
“알았어요. 그러니까 록사나 님도 건강히 잘 다녀와요.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해요.”
“응, 노력할게.”
록사나가 발돋움을 해 한 손으로 키얀의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러다가 해가 지겠군.”
맘에 들지 않는 인사가 길어지자, 아스테리온이 딴지를 걸었다.
키얀이 매섭게 아스테리온을 흘기고는 보란 듯이 록사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록사나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마주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다녀올게.”
록사나가 이내 몸을 돌려 세웠다.
현관 앞에는 세 대의 마차와 카일라니 기사단원 열 명, 그리고 말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번 수도행에는 록사나 쪽에서는 아이린과 벨루카, 마르셀, 필립과 콜트가 함께했다.
아스테리온 쪽 사람으로는 카일라니 기사단원을 제외하고 안드레아스가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