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이 집무실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둘이 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아스테리온이 준비된 차를 입가로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의 손끝은 살짝 떨렸고, 심장은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캠든 영지에서 록사나의 곁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는 상황은 특히 요즘 들어서 더더욱 흔치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록사나를 떠나보내기 전에는 함께할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었다.
록사나는 수없이 되풀이되는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상처 입을 걸 알면서도… 그를 마주할 때마다 차 한잔하지 않겠냐고, 함께 산책하지 않겠냐고 끊임없이 물었었다.
그럴 때마다 아스테리온은 귀찮은 기색을 내비쳤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권유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속마음은 달랐지만 어쨌든 그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던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가슴 한구석이 절로 아려 왔다.
‘지금 이렇게 한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설레건만…….’
아스테리온은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기에 잠시나마 허락된 지금 이 순간들만이라도 후회 없이 붙잡고 싶었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 록사나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잠시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과 살짝 내리깐 속눈썹 아래 자리한 싱그러운 녹안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아스테리온은 당장에라도 록사나의 부드러운 뺨으로 뻗어 나가려는 자신의 손을 제지하기 위해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이혼 후 록사나는 웃음이 많아졌고, 현재의 삶이 제법 만족스러워 보였다.
자신이 곁에 서 있지 않음으로써 더욱 행복한 그녀. 그것이 자신에게 주었던 마음을 영영 지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록사나는 아까부터 얼굴에 뜨겁게 다가오는 아스테리온의 시선 때문에 심장의 박동이 자꾸만 빨라지고 뺨이 붉게 달아오르려고 했다.
더군다나 대화가 없으니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또한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건 곤란했다. 다시는 그에게 끌리고 싶지 않았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호흡을 잠시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먼저 운을 띄웠다.
“음,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러지.”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이종족 구출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기드온 경과 헥터 경을 중심으로 이종족 실험 시설에 대한 조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 결과, 페어리 레이크에 있는 다이아몬드 동굴 내 회색 돌을 통해 시설을 드나드는 데 있어서 인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00여 명 정도의 이종족이 갇혀 있는 수용 시설을 발견했다.
“그들을 1차로 구출해야 할지 아니면 조사를 완전히 마친 후에 한꺼번에 구출해야 할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거 같은데, 공작님 생각은 어떠세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한 번에 진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일부만 탈출시키게 되면 저들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질 테니까.”
아스테리온의 의견에 록사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발견한 인원들만 구출하게 된다면 아직 찾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 무슨 일들이 생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은폐를 위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다.
“동의해요. 그럼 모든 이들을 찾고 난 후에 작전을 진행하는 걸로 하죠.”
“그런데 록사나. 앞으로 발견될 인원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을 충분히 열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할 텐데, 괜찮겠어?”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서는 염려가 묻어났다.
이종족 실험실과 페어리 레이크의 다이아몬드 광산 동굴을 연결하려면 문 역할을 하는 회색 돌에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힘의 양에 따라 두 곳을 연결하는 지속 시간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무리를 할까 봐 심히 걱정되었다.
근래에는 납치를 당하고, 동굴에 추락하는가 하면, 밤낮으로 영지 업무에 매달리느라 무리를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도 약하다.
“제 힘이 온전히 다 돌아온 건 아니지만 인원이 지금 찾은 것보다 열 배로 늘어난다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요.”
“그대가 그렇다고 한다면 안심이야.”
확신이 깃든 목소리에 아스테리온이 그제야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 두 사람은 조사 내용과 더불어 코델리아가 주었던 정보를 토대로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이종족 구출 작전을 세세하게 수립해 나갔다.
먼저 적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고 속전속결로 탈출을 주도해야 했다.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건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파견되어 있는 카일라니 정보부원들에게 임무를 하달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다이아몬드 동굴 쪽에서는 록사나가 두 곳의 통로를 연결하고, 아스테리온과 헥터 경, 기드온 경을 위시하여 선별된 양쪽 기사단이 침투하여 작전을 펼칠 것이다. 양동 작전이었다.
그런데 적들 편에 선 이종족과 붉은 눈이 갇혀 있던 검은 돌의 처리 문제가 불거졌다.
두 사람은 배반한 이종족의 처리 문제는 이종족들에게 맡기고, 검은 돌은 작전 수행 전까지 그 여부를 고민해 보는 것으로 논의를 일단락 지었다.
* * *
며칠이 지난 후, 황실에서 서신 하나가 록사나 앞으로 발송되었다.
서신을 펼쳐 든 록사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아스테리온의 표정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황궁에서 이 먼 캠든 영지까지 그대에게 서신을 보낸 거지?”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스테리온이 물어 오자, 마침 서신을 다 읽은 록사나가 그에게 이를 건네주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린 아스테리온이 와그작 서신을 구겨 버렸다. 맹렬한 분노와 함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이런, 미친 것들이!!”
“그러게 말이에요. 황태자께서는 참으로 한가한가 봐요. 시골 자작의 형편까지 두루 살펴 주시다니, 나 참!”
록사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된통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당 서신은 도노반이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결론만을 간추리자면, 영지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록사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인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속내는 중매 자리를 주선해 캠든 영지를 삼키려는 의도였다.
남작 위를 받았으니 황제 폐하께 감사 인사차 5월에 열리는 봄 사교계에 필히 참석하라는 압박과 함께 말이다.
정작 록사나는 수도에서의 사교 활동을 시작할 마음이 현재로서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봄 사교계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수도에서 좋은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문득 테오도르 황자가 보고 싶기는 했다.
록사나의 기색이 살짝 변하는 것 같아지자, 아스테리온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듯 갈라졌다.
“설마, 참석할 건 아니지?”
아스테리온의 손에 잔뜩 움켜쥐어진 서신은 먼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듯 심하게 요동쳤다.
“흐음. 글쎄요.”
무심한 답변에 아스테리온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그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런지도 모르고 록사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스테리온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도노반의 편에 설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과의 이혼으로 록사나가 언제든지 누구와도 재혼 가능한 상태임을 절실히 깨닫고 나니 마음이 몹시 조급해졌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아스테리온의 손등 위로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팽팽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완전히 녹아내리겠다 싶을 때쯤, 록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초대장까지 보냈으니 참석할 수밖에 없겠네요.”
귀찮다는 티가 났으나 아스테리온에게는 그다지 위안을 주지 못했다.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대는 영지 돌보는 것만 해도 많이 바쁘잖아.”
자신이 록사나의 일에 상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되지도 않는 이유를 갖다가 붙였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논리적이던 카일라니 공작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로 그녀가 재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한 질투가 거대한 불길처럼 일어나 그의 심장을 갉아 댔다.
이내 아스테리온이 일견 타당하고 적당한 이유를 떠올렸다.
“파파베르 사건이 황태자와 연결되어 있었으니 분명히 당신한테 큰 앙심을 품고 접근하는 거야.”
“나도 황태자가 좋은 이유로 접촉해 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날 이용하려 들겠죠.”
록사나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까닥거리며 소파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초대를 피하게 되면 황태자의 시선이 캠든 영지로 쏠리게 될 거예요. 물론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적당히 잘 넘긴다고 해도 주의를 끌고 말겠죠. 당신이 날 돕고 있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황태자 귀에 들어가게 될 테고요.”
“그대 말이 맞아…….”
아스테리온이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캠든 영지에 황태자나 귀족파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두 사람은 원치 않았다.
“지금 한창 수도에서 캠든 상단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상황이니 홍보차 사교계에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도 같고요.”
“내가 동행할게.”
“네?”
록사나가 뜻밖의 제안에 초록빛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보고 적들한테 먹잇감을 던져 주라고요?”
그녀의 반문에 아스테리온의 잘생긴 금빛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록사나의 말처럼 이혼한 전 남편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은 적들에게 의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 혼자 먼 수도까지 보내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불안했다. 아무리 록사나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