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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4)화 (94/214)

94화 

4월 초, 봄이어도 해가 진 산속이었다. 바깥보다는 찬바람이 약했지만 다소 추위를 느낀 록사나가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땔감을 주워 올게요.”

그 모습을 본 키얀이 나섰다.

사실 두 사람만 있게 하기 싫었고, 마음 같아서는 내내 록사나의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잠잘 곳을 아스테리온이 구했으니 땔감은 자신이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사 경이 남자는 듬직한 게 최고랬어.’

훈련 교관 로사 경의 말을 떠올린 키얀은 록사나에게 듬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같이 가자.”

“아니에요, 저 혼자 충분해요.”

“그렇다는군. 당신은 쉬어.”

너무 두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아 미안해진 록사나가 나서자, 둘 다 그녀를 말렸다.

“그래도요. 두 사람만 너무 많은 걸 하잖아요.”

지금까지 말들도 두 사람이 모두 통솔했다.

벨루카야 정령이고 늑대의 몸을 하고 있어서 알아서 잘 따라왔기에 록사나는 자신의 몸만 챙기면 되었다.

“그럼 록사나 님이 음식이랑 그릇 좀 꺼내 놔 주세요.”

“알았어.”

록사나의 불편한 마음을 감지한 키얀이 말하자, 그녀가 흔쾌히 대답했다.

키얀이 땔감을 구해 올 동안 록사나가 열심히 짐 속에서 저녁 재료와 그릇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거라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덜 어색하네.’

아스테리온과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이번뿐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더 중요한 일들이 있어 그걸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종족 거주지를 정하기 위해서 답사를 온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캠핑을 온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하는 양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그녀를 보며 우울해졌다.

어느 순간 가까워졌다 싶으면, 또 어느 순간에는 그보다 더 멀어졌다. 좀처럼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질 기미가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지은 죄를 잊은 건 아니겠지.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양심도 없이.’

그의 심장이 아프게 옥죄어 들었다.

어느덧, 키얀이 땔감을 한 무더기 구해 와 불을 피웠다.

“엄청 많이 구해 왔는데!”

“헤헤, 밤새도록 추우면 안 되니까요.”

“수고했어, 키얀.”

이에 키얀이 가슴을 쭉 폈다.

록사나는 그런 키얀이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반면 아스테리온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록사나가 키얀을 동생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동굴 안은 금방 따뜻해졌다. 벨루카도 따뜻한 게 좋은지 모닥불 가까이에 몸을 뉘었다.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른 아스테리온이 모닥불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 지지대를 먼저 설치했다.

그러고는 냄비에 재료를 넣고 지지대에 걸어서 음식을 끓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행동이었다.

‘의외네.’

그 모습이 록사나의 시선을 끌었다. 공작이라는 지위를 생각하면 이질적이라서 더욱 그랬다. 늘 사람들의 시중을 받아 왔을 테니까 말이다.

냄비 속의 재료가 익어 가며 맛있는 냄새가 동굴 안에 솔솔 퍼졌다.

록사나는 정령의 힘을 발휘해 동굴 밖으로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바람의 장막을 쳤다. 산짐승이나 마물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음식이 다 조리되고, 각자의 앞에 따끈한 스튜 한 그릇과 빵이 한 덩어리씩 놓였다. 그 사이에서 벨루카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도 맛있게 먹어요.”

록사나가 스푼을 들며 말했다.

“록사나 님도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요즘 제법 존댓말에 익숙해진 키얀의 뒤를 이어 아스테리온이 긴장하며 말했다.

그는 록사나가 첫술을 뜨는 모습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막 한 술 뜬 록사나의 얼굴에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그러자 스푼을 부러뜨릴 듯 쥐고 있던 아스테리온의 손에서 곧바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키얀?!”

“네, 뭐…….”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는 뉘앙스였지만 록사나만큼이나 키얀의 손놀림도 전보다 빨라졌다.

“다행이군.”

자신의 그릇을 향해 고개를 내리며 첫술을 뜨기 시작한 아스테리온의 입가가 남모르게 실룩댔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뒷정리를 한 후, 잠자리를 마련했다.

모닥불 주변에서 록사나를 중앙에 두고 키얀과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양옆에 자리했다.

평온한 록사나와 달리 두 남자는 쿵쿵대는 심장과 붉게 상기된 표정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키얀은 야외에서 록사나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된 것이 몹시 설레었다.

아스테리온 역시 외부에서 록사나와 밤을 지새우는 건 처음이었다. 생경하면서도 그의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비록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지는 못했지만 가슴 시린 것쯤이야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었다.

산을 오르느라 피곤했던 록사나는 몸을 뉘자마자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벨루카가 살포시 안겨 있었다.

아무리 정령이라도 해도 그 행태가 몹시 거슬리고 못마땅했던 아스테리온과 키얀이 벨루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흠칫.

두 남자가 서로의 행동에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각자의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록사나의 품에서 벨루카를 빼내려는 서로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췄던 손을 키얀이 먼저 움직였다. 막 벨루카의 목덜미를 잡아채려고 할 찰나였다.

벨루카가 록사나의 품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잠결에도 반사적으로 은빛 늑대를 꼭 끌어안았다.

이내 벨루카가 두 눈을 살짝 뜨더니 두 남자의 손을 흘끔 쳐다보았다. 상당히 냉소적인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승리의 미소였다.

허! 두 남자는 소리 없이 헛숨을 삼켰다.

‘영악한 정령 놈 같으니라고!’

‘저 교활한 놈이!’

아스테리온과 키얀이 손을 거둬들이며 벨루카를 찢어발길 듯이 쏘아보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기어코 벨루카를 록사나에게서 떼어 놓게 된다면 그녀를 깨우게 될 수도 있어 포기해야만 했다.

키얀의 성급한 행동이 불러온 참사에 아스테리온이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모포 위에 몸을 뉘었다.

이를 가볍게 무시한 키얀은 벨루카의 괘씸함에 한참을 씩씩거리다 잠들었다.

다음 날, 록사나 일행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탐사를 이어 갔다. 간간이 나타나는 마물들은 아스테리온과 키얀의 손에 손쉽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롭게 발견한 장소에서 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 * *

바스락.

인기척에 놀란 토끼 한 마리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벨루카가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가기 시작했다.

“벨루카, 너무 멀리 가지 마!”

록사나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은빛 늑대를 향해 외쳤다.

만나는 산짐승들이 뭐가 그리도 반가운지 벨루카는 어린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듯 종종 장난 삼아 짐승들을 뒤쫓았다.

‘정령치고는 어린 축에 속하니까 뭐 새로운 동물들을 볼 때마다 궁금하긴 할 테지.’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처럼 행동하는 록사나와는 달리 아스테리온과 키얀은 벨루카의 행동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록사나 일행은 벨루카의 뒤를 따라가며 발길을 재촉했다. 하늘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으니 오늘 밤 야영할 곳을 찾아야 했다.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벨루카의 뒤를 따라 세 사람은 작은 동굴로 들어섰다.

어딘가에서 빛이 들어오는지 동굴 안은 밝았다. 그 안에 자라난 덤불을 헤치며 더 안으로 들어서던 그 순간, 일행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세 쌍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동시에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굴 안쪽은 웅장하고 거대했다. 고개를 한껏 꺾어 올려다본 높이만 해도 족히 100m는 훌쩍 넘어 보였고, 폭은 그보다 더 광대했다.

공동 안에는 푸르른 나무들과 꽃이 자라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물이 흘러내리는 곳을 따라 계곡과 강이 존재했고, 해변가 같은 고운 모래사장도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어떻게!!”

록사나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스테리온과 키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맙소사. 여기 대체 뭐야?!”

“아울~”

언제 돌아온 것인지 벨루카가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는 록사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마구 비벼 댔다.

한참 동안 세 사람은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야영을 하면 되겠군.”

아스테리온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키얀과 록사나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공동에도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미지의 공간 탐색은 내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적당한 곳을 찾은 아스테리온과 키얀이 등에 지고 있던 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산 중턱부터 산세가 험해지며 말 대신 짊어진 짐들이었다.

말들은 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이끄는 사람이 없어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도록 레드포드 영지에서 특별히 훈련된 말들이었다.

록사나도 작은 등짐을 벗었다. 아득바득 우겨서 자신의 몫으로 겨우 받아 냈던 모포 한 장이었다.

발치의 벨루카를 품에 안아 든 록사나가 은빛 머리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벨루카, 너 여기 알고 있었던 거야?”

벨루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더 쓰다듬어 달라고 록사나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알고 일행을 이끈 건 아닌 모양이었다.

록사나가 여전히 경악이 깃든 시선으로 주변을 다시 훑어보았다.

‘산맥 안에 이런 비밀스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 운이 좋았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알렉산드리아 산맥에서 이틀 만에 운 좋게 찾은 이곳은 이종족 거주지로 삼기에 딱 알맞아 보였다.

모닥불을 피워 준비한 저녁 식사의 첫 그릇은 록사나의 주도하에 이 일의 1등 공신인 벨루카에게 먼저 돌아갔다.

이후 록사나 일행은 동굴 일대 탐색을 마치고 일주일 만에 캠든 성으로 귀환했다.

적당한 규모의 땅을 찾았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코델리아가 가장 기뻐했다.

하지만 이종족 거주지의 존재 여부와 위치는 이종족을 구출한 후에도 한동안 세상에 비밀로 부쳐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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