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3)화 (93/214)

93화 

“우유나 다른 거를 함께 넣어 마시지는 않고요?”

“그럼 맛이 더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커피콩을 발견해서 가져온 오스카 공자와 그 측근만이 즐겨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 그렇군요.”

록사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지 사업과 특산품을 떠올릴 때 커피도 생각하긴 했었다.

‘캠든에서 나지도 않고,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거 잘하면 괜찮겠는데!’

“저, 영주님. 제가 괜히 받아 온 게 아닐지…….”

프레드릭이 드물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아니요. 정말 잘 받아 왔어요, 프레드릭. 이 커피콩으로 어쩌면 베렛이랑 다시 협상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정확히는 오스카 대공자랑요.”

“그렇습니까.”

그제야 프레드릭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오스카 대공자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대공가 내에서 힘은 별로 없지만, 학식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자신이 보고 겪은 오스카 대공자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간혹가다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단 말이죠.”

록사나는 오스카 대공자가 사고방식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차피 캠든에서는 종이 개발에 착수했고, 이제는 굳이 베렛 공국의 제지 기술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다만 커피에는 관심이 많았다.

‘베렛 공국 고지대에서 커피콩이 발견되었다는 건 그곳이 원산지라고 봐도 무방할 듯해.’

“프레드릭, 내 생각에는요. 커피콩에 대해서 내가 오스카 대공자에게 도움을 주는 게 어떨까 싶어요.”

“커피콩에 숨겨진 뛰어난 효능이라도 있습니까?”

“카페인 각성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건 이미 오스카 대공자도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주고 싶은 도움은 커피를 차처럼 기호 식품으로 대중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에요.”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프레드릭의 관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영주님 말씀을 들어서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게 그의 요즘 지론이었다.

록사나는 커피를 활용한 다양한 음료 제조법과 디저트에 대해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물론 세세한 제조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떤 재료들이 들어가는지 정도는 알았다.

“오, 그런 방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프레드릭이 옅은 초록색에 가까운 커피콩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커피 음료 제조법 등을 알려 주며 오스카 대공자와 상단 거래를 틀 예정이에요. 우리 영지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베렛 공국에 판매할 수 있게 길을 다지는 거죠.”

“좋은 생각이십니다.”

흡족한 미소를 띤 프레드릭이 말했다.

무려 먼 베렛 공국까지 가서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해 그동안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마워요, 모두 프레드릭의 노고 덕분이에요.”

엄연한 사실이었다. 만약 프레드릭이 콩에 관심이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커피콩을 선물 받지 못했었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못했을 테니까.

* * *

록사나는 프레드릭에게 다시 한번 베렛 공국에 다녀오는 임무를 맡겼다.

표면상으로는 캠든 상단의 판로를 뚫기 위한 것이었으나, 제2 대공자 오스카 베렛과의 비밀 면담이 주 목적이었다.

“학교 교장직도 맡고 있는데,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보내 미안해요.”

“아닙니다, 영주님. 그래도 이번에 케빈이 함께 가니 적적하지 않아 좋을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2 보좌관 케빈을 그와 함께 보내는 건 이번 기회에 다양한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여러 사람을 만나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거기에 더해 프레드릭의 가르침까지 받는다면 돌아왔을 때 더욱 단단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건강히 잘 다녀와요.”

“케빈, 조심히 다녀와요.”

“아울~!”

록사나와 아이린, 벨루카의 배웅을 받으며 프레드릭과 케빈이 먼 길을 떠났다. 캠든 상단의 물품을 실은 마차와 일꾼들도 함께였다.

* * *

다이아몬드 동굴에 갔던 아스테리온과 키얀 등이 캠든 성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모두 수고했어요.”

아스테리온과 키얀이 고개를 끄덕였고, 부단장 헥터를 위시한 캠든 기사단이 물러났다.

세 사람은 록사나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성과가 좀 있었어요?”

“이종족들을 추가로 발견했어.”

“100여 명 정도 되어 보였어요.”

두 사람의 말에 록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발견자가 총 500명 가까이 되네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걱정이 드러나는 말투였다. 아스테리온과 키얀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각 수용 구역별로 결계가 쳐져 있어서 안으로 진입해 볼 수가 없었어요.”

키얀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에 록사나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아스테리온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꿈틀거렸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록사나의 시선은 여전히 키얀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팠을까.’

같은 수용 시설 내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 실상은 참담했으리라.

두 사람이 이종족 수용 시설을 조사하는 동안 록사나는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 입을 떼었다.

“무사히 구출해 낸다고 해도 황실이나 귀족 사회의 눈을 피해서 보호해야 할 거 같아요.”

“동감이야.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지.”

이종족의 자유를 주장하는 쪽보다 구속하자는 의견이 더 지배적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속박하려 들리라.

키얀은 자신들이 마주했었던 인간들을 떠올렸다. 수용 시설에서 마주친 인간들은 그들을 천대하며 동시에 적대했다. 탈출했을 때는 어떻게든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녀야만 했다.

자신의 주변에는 이종족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키얀을 비롯한 키아, 코델리아는 자신들의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캠든에 그들이 편하게 살아갈 만한 장소를 만들려고 해요.”

키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드러냈다.

“어디 정해 둔 곳은 있어?”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레드포드 영지에 이종족들을 숨길 수도 있지만 캠든에 비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캠든 영지에 비해 로웰 후작 령 및 자이언트 포레스트와 훨씬 가까운 편이었고, 서북부에 치우쳐 있는 카일라니 공작 령은 춥고 척박했다.

그가 본 이종족들 대부분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고, 그들을 레드포드 령에 머물게 한다면 태반이 죽어 나갈 것이다.

“캠든 성에서 가까운 알렉산드리아 산맥 근처가 어떨까 싶어요. 인적이 드물고, 수많은 인원이 머물기에 넓은 지역이기도 하고요.”

“내 생각도 그래.”

최우선적으로 이종족들이 편하게 머무를 수 있고, 필요한 물자 등을 전달하고 소통하려면 캠든과 가까운 지역이어야 했다.

록사나가 키얀을 바라보았다.

“키얀, 너는 어떤 거 같아?”

“좋아요.”

얼굴이 확 밝아지며 키얀이 바로 대꾸했다. 밤 산책을 다닐 때 알렉산드리아 산맥 지류를 돌아다녔던 키얀은 그 장소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내일쯤 근처 산맥을 돌아봐야겠어요.”

“나도 함께하지.”

“저도요.”

록사나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는 아스테리온을 일종의 동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종족 구출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키얀은 산맥 일대를 자주 돌아다녔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수인족이기도 하니까 그들이 편안해할 만한 장소를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다음 날, 록사나, 벨루카, 아스테리온, 키얀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캠든 성을 나섰다.

프레드릭과 케빈이 캠든 성을 비웠기에 아이린에게 내정을 대리하게 했다.

일행의 안장 위에는 조그만 짐들이 실려 있었다. 이번 답사는 하루 만에 끝내기 어려웠기에 며칠을 예상하고 야영을 위해 간단하게 챙긴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산맥은 서쪽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지류들은 서남부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산맥 줄기를 마주 보며 서남쪽 방향으로 나아가 몇 시간 동안 여러 개의 작은 산등성을 넘었다.

평야에 인접한 산들은 대체적으로 험난하지 않고 완만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길이 없어도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것 같군. 휴식도 잠시 취하고.”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그게 좋겠어요.”

록사나와 키얀이 말에서 내려섰다. 록사나와 같은 말을 타고 왔던 벨루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펼쳐진 경사가 심한 산은 말을 타고 이동을 했다가는 바로 낙마할 정도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척 가팔라 보였다.

수통을 꺼내 벨루카에게 먼저 먹여 주고 뒤이어 록사나도 목을 축였다.

키얀이 짐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록사나에게 건넸다. 샌드위치였다.

“고마워, 키얀.”

록사나의 페리도트빛 눈이 반달을 그리자, 키얀의 눈도 둥근 호선을 그렸다.

키얀은 벨루카와 자신의 몫을 챙기고 나머지 하나를 아스테리온에게 내밀었다.

‘조금은 친해졌나 보네.’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록사나가 생각했다. 함께 이종족 시설에 잠입한 이후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으, 힘들어! 안 되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달리자 록사나는 자신의 다리에 정령의 힘을 부여했다.

‘진작 이럴걸! 확실히 편하네.’

자꾸 뒤처지는 록사나가 신경이 쓰여 안절부절못하던 두 남자는 그녀의 변화에 얼굴이 펴졌다. 정령의 힘을 사용한 것을 눈치챈 것이다.

산의 저녁은 이르게 시작된다.

“점심 먹고 이동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이네요.”

“오늘 밤 머물 곳을 찾아보지.”

아스테리온이 어둑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탁해요.”

“아울.”

“전 록사나 님 옆에 있을래요.”

키얀이 바위 위에 걸터앉은 록사나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키얀이 록사나 곁에 있으면 그녀가 훨씬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테리온은 야영할 곳을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일행은 아스테리온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꽤 아늑한 동굴이네요.”

동굴 입구는 몸을 쑤셔 넣어야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는데, 내부는 제법 넓어서 세 사람이 충분히 몸을 누일 수 있을 정도였다.

“아우울~!”

벨루카도 마음에 드는지 동굴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더러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