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 천천히 봐도 되는데요.”
“저희야 오늘부터 매일 실컷 볼 수 있잖아요.”
앤이 테일러를 대신해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우리 이제 구경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 보세요.”
“네, 그럼.”
록사나를 필두로 관계자들이 우르르 집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들이 나온 뒤에는 사전에 집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추천을 통해 선발된 20여 명의 사람들이 집을 구경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거나 가족의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움에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 사이에 껴 있던 한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새집의 외관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사내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밤에 다시 와야겠군.’
그는 어떻게든 집 안도 꼭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수많은 인파 속으로 이내 몸을 감췄다.
평범한 차림새였기에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사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언뜻 보면 호기심 가득한 다른 사람들의 눈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테일러의 집은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으며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었다. 테일러 가족의 집을 시작으로 다른 집들도 거의 매일 완성이 되어 갔기 때문이다.
* * *
베렛 공국, 왕성.
“그래, 알아보았는가.”
“네, 대공자님.”
계승 서열 3위인 대공의 둘째 아들인 오스카와 한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오스카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그의 심복이자 호위 기사인 라탄이 입을 떼었다.
“어서 말해 보게.”
“캠든 영지에 가 보니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화재가 있었던 빈민촌을 중심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노후된 집들을 허물고 새로 다 지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최대한 세세하게 풀어 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오스카와 라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다 사실이었군요!”
서신을 직접 들고 베렛 왕실까지 찾아왔던 캠든의 집사 프레드릭을 떠올리며 라탄이 감탄을 했다.
“그런 것 같군.”
이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오스카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보일러라는 것도 살펴보았나?”
“네, 물론입니다.”
사내가 품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최초로 지어졌던 새집에 몰래 잠입하여 그려 온 것을 탁자 위에 쫙 펼쳤다.
집의 구조와 보일러의 그림은 물론 그가 처음 보는 것들과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종이 안을 꽉 채우며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오스카와 라탄의 표정이 더없이 진중해졌다.
오스카는 캠든에서 서신을 보내왔을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베렛 대공과 다른 형제들은 물론 가신들까지 이에 대해 모두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캠든 영주가 원하는 것은 종이를 낮은 가격에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신 베렛 공국에 온돌 난방 시스템인 보일러를 낮은 가격에 제공하고 설치 기술을 전수하겠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캠든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에 대해 다른 곳보다 15%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겠다고도 했다.
제지 기술이 베렛 공국의 수입에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추악한 진실이 자리했다.
제지 기술 보유자는 존경받는 위치인 동시에 천대받는 노예였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었다. 페이프라는 한 목공 기술자가 양피지를 뛰어넘는 종이를 발명했다.
선량했던 페이프는 제지 기술을 통치자인 대공가에 공개했고,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고급 종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종이는 변방의 가난한 공국이었던 베렛 대공가를 단숨에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돈맛을 알게 된 가신들은 채 1년이 되지 않아 눈이 뒤집혔다.
공국을 위해 제지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기술자들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고 대공에게 주청을 올렸다.
대공은 가신들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를 허락했다. 그 결과 페이프를 비롯한 기술자들은 하루아침에 격리 조치되었다.
그들은 대공가의 철저한 감시 아래 밤낮으로 종이를 생산해 내야 했고, 자유를 박탈당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많은 것이 지원되기는 했지만, 종이를 생산하는 지역 자체를 벗어날 수 없는 삶이었다.
한때 반항과 파업으로 들고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들의 가족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태였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지.’
오스카는 대공과 가신들의 이런 조치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역적으로 몰릴 테니까.
“제안을 거절한 게 참으로 아쉽습니다.”
보고를 마친 사내가 물러가고 둘만 남게 되자, 호위 기사 라탄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응.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처지가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몰라.”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현재 베렛 공국은 종이의 높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수량만 풀고 있었다.
종이를 지금보다 더 많이 생산하게 하면서 가격을 낮춘다면 이익이야 감소하겠지만, 수요는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또한 기술자들이 더 많이 필요해지게 되므로 지금처럼 강제로 통제하기 어려워지리라. 그만큼 감시 인원이 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발생할 테니까 말이다.
똑똑.
잠시 후, 밀밭 같은 머리색을 가진 앳된 소녀가 티 포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오스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무척 따뜻했다.
“어서 와, 리브.”
“안녕하세요. 오스카 대공자님, 라탄 경.”
“안녕, 리브.”
리버티가 두 사람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오스카와 라탄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오스카라고 부르라니까.”
“혹시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할 수 있으니까 절대 안 돼요.”
단호하게 말한 리버티가 두 사람의 앞에 진한 갈색빛의 액체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마워, 리브.”
아쉬움을 지우며 오스카가 말했다.
“이 쓴 걸 무슨 맛으로 마십니까. 저는 아무리 마셔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찻잔에 설탕을 듬뿍 넣으며 라탄이 투덜거렸다.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없었다면 아무리 돈을 쥐여 줘도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전 계속 마시다 보니까, 안 마시면 오히려 더 생각나던데요.”
어느새 자신의 잔을 채운 리버티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마셨다.
오스카는 귀엽다는 듯 리버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이 아주 귀에 걸리셨습니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해.”
“아, 예~”
라탄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주군인 오스카는 올해 스무 살로 열여섯의 하녀 리버티와 비밀 연애 중이었다.
대공의 둘째 아들로 다른 형제들에 비해 가장 세력이 약했지만 어쨌든 그는 대공자였다.
반면에 리버티는 대공 성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종이를 발명했던 페이트의 손녀였다.
오스카와 리버티의 인연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질로 잡혀 왔던 일곱 살의 리버티에게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느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린 소년은 어느새 소녀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오스카는 뒤에서 열심히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러고는 기어이 리버티를 그의 전담 하녀로 만들었다.
‘리버티만 불쌍하지.’
오스카의 짝사랑은 몇 달 전 그의 고백을 리버티가 받아들이게 되면서 끝을 맺었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오스카가 제지 기술자들의 처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리버티의 영향이 컸다.
‘페이트가 손녀 이름을 리버티(자유)라고 지은 건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기술자들이 갇혀 지내며 착취당하기 시작한 건 리버티가 태어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지금의 상황을 봤을 때 라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버티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오스카는 계승 서열 3위였지만 위로 쟁쟁한 누나와 형이 있어 가능성이 희박했고, 발언권도 약했다.
다른 형제들이 권력을 다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오스카는 별 희한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이 시커먼 차 같은 것 말이다. 어느 날, 고산 지대에 다녀온 후 오스카는 그곳 원주민들이 볶아 마신다는 콩을 가져왔다.
신문물이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했다가 지금은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만 즐기는 차가 되었다. 차 이름은 커피였다.
“오스카 님, 그런데 괜찮을까요?”
“응? 뭐가?”
“이 맛없는 콩을 캠든에서 온 사람에게 주었지 않습니까.”
캠든의 집사 프레드릭은 오스카가 보여 주는 커피콩을 보자마자, 자신이 모시는 영주님이 콩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오스카는 선물이라며 커피콩을 잔뜩 안겨 주었고, 프레드릭은 좋아라 하며 받아 갔다.
“차로 내려 마시는 법을 알려 줬으니 알아서 하겠지.”
천하태평하게 말하는 오스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스카는 커피콩이 그의 운명을 180도 바꿀 거라는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 * *
“프레드릭, 이걸 누가 줬다고요?”
“베렛 공국의 제2 대공자이신 오스카 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베렛 공국에서 캠든으로 복귀한 프레드릭이 그동안의 보고를 마치며 받은 선물을 막 내민 참이었다.
“영주님께서 콩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주시더군요. 이 콩은 볶아서 차로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한번 마셔 봤는데 엄청 쓰더군요. 콩 이름은…….”
“커피.”
“영주님, 이 콩을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처음 보는 콩이고 오스카 대공자가 말하기를 한 번도 외국으로 반출된 적이 없는 콩이라고 하던데요.”
프레드릭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에 록사나가 씨익 웃었다.
“다 아는 수가 있어요. 거기에서는 어떤 차로 마시던가요?”
“볶아서 가루를 내어 물을 부어 우려 마십니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만요?”
“네, 그렇습니다. 아, 워낙 너무 쓰다 보니 설탕을 넣어 마시기도 합니다. 그나마 낫더군요.”
커피차를 대접받던 때를 떠올린 프레드릭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한 모금 마신 순간 당장 내뱉고 싶었지만 대공자 앞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뜬눈으로 날을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