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바스락.
발걸음을 옮기던 록사나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그때 나무 뒤에서 커다란 형체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이의 모습에 잔뜩 움츠렸던 록사나가 긴장을 풀었다. 아스테리온이었다.
생일이 다 지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은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록사나를 눈앞에 둔 아스테리온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와 헤매다가 후원에 들어서는 록사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검은 머리카락이 별보다 더 반짝였다. 그녀는 그의 온전한 밤이자 안식이었다.
아스테리온이 한 발 한 발 천천히 록사나에게 다가갔다. 달빛이 환해서 고운 그녀의 얼굴이 대낮처럼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당신이었군요.”
살짝 타박하는 말투에는 자신을 놀라게 한 원흉에 대한 원망이 조금 녹아 있었다.
딱 두어 걸음 정도 남겨 두고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저도 모르게 록사나에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렸다.
“꿈이 아니었군.”
아스테리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순간 알아듣지 못한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자지 않고 왜……?”
아스테리온이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살짝 눈을 내리깔자, 짙은 욕망이 감추어졌다. 그가 연모하는 상대가 사슴처럼 겁을 먹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그러는 당신은요?”
“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스테리온은 말문이 턱 막혔다. 오늘 저녁이 너무 달콤해서 도저히 쉽게 잠들 수 없었다고 대답해야 할까?
아스테리온은 그 외에도 록사나에게 하고 싶은 말과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가 달아나지 않을까?
그래서 차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떤 말보다도 이 말을 먼저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나지막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록사나에게 처음으로 해 보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하지 못하고 가슴속에만 꼭꼭 담아 두었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내 생일 챙겨 줘서.”
“별말씀을요. 우리 사이에 뭘요.”
록사나는 대답해 놓고 아차 싶었다.
‘우리 사이라니!’
아스테리온이 오해하지 않도록 서둘러 적절한 이유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린 서로 협력하고 있는 사이니까. 그… 친구 비슷한 사이잖아요.”
“그래, 친구.”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에 친구라는 단어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적어도 친구 사이인 건가?”
협력자보다는 친구 사이가 더 가깝지 않은가. 어떻게든 친구라는 자리라도 붙들고 그녀와의 관계를 잇고 싶었다.
록사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렇죠?! 친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아스테리온의 긴장했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지며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에 록사나는 살짝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내 스스로 납득했다.
‘그도 나처럼 우리 관계가 애매한 것이 그동안 고민이었나 보네. 그래, 친구. 나쁘지 않아.’
이혼 후, 아스테리온이 자신을 볼 때마다 늘 애틋하고 뜨거운 시선을 보낸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가 어땠었든 두 사람은 5년 동안이나 한 이불 덮고 생활한 부부였다.
그러니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 자르듯 뚝 끊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익숙해지는 데 서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영지 경영에 몰두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처럼 아스테리온 역시 하루 빨리 마음의 평화를 찾길 바랐다. 서로를 위해서.
한편 아스테리온은 친구 관계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록사나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품지 못했을 희망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커다랗고 곧은 손을 록사나를 향해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청하는 동작이었다.
“잠시 산책할까요, 레이디? 우리가 친구가 된 기념으로요.”
“뭐, 그래요.”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손 위에 한 손을 얹으며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차갑던 록사나의 손이 아스테리온의 체온으로 인해 금세 온기를 되찾았다.
아스테리온은 맨살에 닿아 오는 록사나의 감촉에 손이 살짝 떨렸다. 거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부부로 살아오며 함께 밤을 보낸 시간들이 수두룩하건만 첫날밤 못지않게 떨리는 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그의 사랑이 매일매일 깊이와 높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은 오랜 시간 다져 온 사교술을 발휘해 자신의 흉악한 감정을 철저하게 숨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가 록사나와 맞잡은 손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힘을 주었다. 이를 신호로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록사나가 후원에서의 밤 산책을 이어 갔다.
간간이 오고 가는 대화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주를 이루었다.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주제는 의식적으로 피하다 보니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자정을 한참 넘기게 되었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방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잘 자.”
아스테리온의 인사에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막 문이 닫히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아스테리온의 귓가에 들려왔다.
“잘 자요, 아스테리온.”
딸깍.
문이 완전히 닫혔다.
귀 끝이 발갛게 물든 아스테리온은 한참 동안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생일의 달콤함이 길게 이어지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작은 기적이 모이고 모여 그에게 또 하나의 기적을 가져다주었다.
【 맛없는 콩 】
3월 말, 캠든 영지에 울긋불긋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록사나를 비롯한 캠든 성과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노스의 빈민촌에 모여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영지의 수많은 인파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 흥분과 기쁨이 가득했다.
록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얀 3층집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벅찬 감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작년 12월에 일어난 빈민촌 화재 이후, 처음으로 완공된 집의 지붕에는 멋들어진 적토빛 기와장이 봄 햇살을 받으며 반짝였다.
한동안 말을 잊고 있던 록사나가 정신을 차렸다.
“자, 우리 테이프를 자를까요?”
영주인 록사나와 이 집에 기거할 테일러 가족, 영지 공사 담당자 단테, 보일러 개발자 빈센트 등 관련자들이 주르르 한 줄로 서서 붉은 테이프를 잘랐다.
“우와아아!”
“축하하네, 테일러.”
“멋진 집입니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축하의 인사말이 쉼 없이 쏟아졌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테일러 가족들이 록사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새집이 생긴 거 축하해요. 앞으로 이 집에서 항상 건강하고 좋은 일들이 가득하길 바라요.”
록사나는 덕담을 건네며 가족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테일러 가족은 대가족이었는데, 이들의 집이 가장 먼저 완공된 이유이기도 했다.
서로가 외동인 테일러와 그의 아내 앤은 양쪽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두 사람의 아이들까지 합하면 총 열 명이었다.
‘집이 다 타 버렸을 때는 정말 막막했었는데…….’
화재 당시를 회상한 테일러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록사나는 그의 모습을 못 본 척해 주었다.
“자, 집주인들이 먼저 집 구경을 해야죠.”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먼저 들어가세요.”
록사나의 재촉에 테일러 부부가 당연하다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테일러 가족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아이들까지 신나게 안으로 들어가고 록사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영주님, 방이 여섯 개에 화장실이 일곱 개라면서요?!”
그냥 기다리기 지루했던 아이린이 물었다.
“응. 여섯 개의 각 방에 딸린 화장실이랑 손님이 방문했을 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따로 있어. 2층에는 두 개의 방이 있고, 3층에는 방이 네 개가 있어.”
설계도를 봤었던 록사나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테일러 가족은 부부가 세 쌍이고 테일러와 앤의 자녀들은 아들 둘, 딸 둘로 둘씩 함께 방을 사용할 거라고 했다. 마지막 방 하나는 손님용 방으로 때에 따라서 세를 놓을 수도 있었다.
“우아! 진짜 편하겠네요. 귀족가도 이렇게 되어 있는 데가 드물잖아요.”
“그렇지.”
“저는 1층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집사 프레드릭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층은 가게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직접 장사를 해도 되고 세를 놓아도 되지요.”
공사를 총괄했던 단테가 어깨를 쭉 폈다.
“수고 많았어요, 단테.”
“이번 공사를 하며 참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몇 년 동안은 공사가 계속 진행될 테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부탁해요.”
“아이쿠.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단테가 만면의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집을 지으면서 보일러 설치 같은 최신 기술은 물론 실용적인 공간 배치 등에 대한 것 등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거기에다 높은 보수는 덤이었다.
이러한 점은 단테뿐만 아니라, 공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문라이트 상단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지!’
옛일을 회상하며 단테가 안도했다.
처음 캠든에서의 일을 권유받았을 때, 그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촌구석 영지에 대해서 전혀 기대가 없었다.
그나마 높은 보수를 준다기에 마지못해 오게 되었는데, 지금은 아예 이곳에 정착하기로 진작 결정을 했다.
남겨 두고 온 가족들도 조만간 이곳으로 영구 이주할 예정이었다.
영주인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의 탁월한 능력, 학교 설립과 교육, 평민 등용 등과 같은 다양한 시행 정책들을 보며 캠든의 밝은 미래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저는 보일러라는 게 정말 기대됩니다.”
“이제 봄이라서 사용할 일이 별로 없겠지만, 앞으로 매년 겨울은 아주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걸세.”
록사나의 제2 보좌관 케빈의 말에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주변에서도 보일러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한참 후, 테일러 가족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특히 깨끗하고 멋진 새집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