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록사나와의 결혼 생활 동안 그녀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 준 적이 없었다. 그저 형식상 목걸이나 반지 등 보석류를 선물로 보내 준 게 다였다. 물론 자신이 직접 고른 것이었지만 차갑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록사나는 그의 생일날이면 수놓은 손수건, 검에 다는 술 장식, 장갑 등을 선물해 주곤 했었다. 모두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성이 깃든 선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벽에도 귀가 있을까 봐 이를 신경 쓰느라 늘 마지못해 받는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새삼스레 그 사실이 비수가 되어 지금 이 순간 아스테리온의 가슴을 더욱 깊이 후벼 팠다.
‘못난 전 남편이 뭐가 예쁘다고…….’
한없이 회상이 깊이 이어져 갈 때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이 그를 일깨웠다. 록사나였다.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앉아요. 선물도 받고 저녁도 들어야죠.”
그사이 식탁 위 촛불과 마력석의 불이 밝혀지며 실내를 환하게 비추었다.
“아, 그래.”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자신의 오른쪽에 착석하는 것을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이들도 각자 빈자리에 알아서 착석했다.
한편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당일 날에서야 아스테리온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록사나를 통해서였다.
헥터 경을 위시한 아스테리온 휘하의 사람들은 주군 생일을 기억해 준 록사나에게 다들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주군의 생일을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선물입니다.”
아스테리온의 왼쪽에 앉은 헥터 경이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건넸다.
천에 둘둘 말린 그것을 받아 든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미묘했다. 솔솔 풍겨 오는 냄새만으로도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맙군.”
그러고는 한쪽으로 치워 두려고 마음을 먹었다. 부하의 정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안 열어 봐요?”
어린 키아가 큰 소리로 물었다. 선물이 궁금하다는 듯 말간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록사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테리온은 무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선물을 풀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육포였다.
“죄송합니다, 주군. 주군의 생신이 오늘인 걸 깜박했지 뭡니까. 그래서 마땅한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진 것 중에서 최상급 육포로 준비했습니다.”
헥터 경이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카일라니 공작에게 생일 선물로 육포라니. 다른 귀족들이 알게 된다면 대대손손 비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걸 알기에 충성심이 강한 헥터 경이 주군에게 누를 끼쳤다며 혹여라도 상처를 받게 될까 봐 아스테리온은 선물을 풀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여긴 캠든이지.’
이곳은 귀족들의 허영이 넘치는 사교계가 아니었다.
“역시 그래서인가. 냄새가 좋군.”
아스테리온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한마디에 헥터 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맛있겠다!”
키아가 꼴깍 침을 삼키며 홀린 듯 말을 흘렸다. 육포는 조인족인 키아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먹어 볼래?”
“정말요?! 근데 그건 키아 선물 아닌데…….”
아스테리온이 묻자, 키아가 눈을 또르르 굴리며 받아도 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육포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아스테리온이 육포 하나를 키아에게 건네주었다.
키아의 눈이 대번에 왕방울 만해졌다. 손이 자동으로 마중을 나가더니 육포를 받아 들고는 몹시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맛있게 먹으렴.”
키아의 행동에 어른들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들은 육포를 냠냠 맛보는 키아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아스테리온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아낌없이 육포를 나누어 주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가서 그의 수중에는 부스러기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육포를 각자의 손에 쥐고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스테리온과 헥터 경의 표정은 전에 없이 풀어져 있었다.
그사이 주방에서 내온 음식들이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선물 증정식이 계속 이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준비한 선물을 주었는데 보석류나 고가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구운 지 얼마 안 된 듯한 따끈한 쿠키와 직접 만든 음식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와인과 맥주, 검을 손질하는 숫돌과 가죽, 아이들이 준 고운 빛깔의 나뭇잎과 조약돌 등이 있었다. 소소하지만 각자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선물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선물은 키얀의 것이었다.
쭈뼛거리며 키얀이 나무로 엮어 만든 조그만 케이지를 들고 아스테리온에게 다가왔다.
아스테리온은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키얀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어린 수인족이 자신의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정말 뜻밖이었다.
“자, 내 선물…요.”
키얀의 선물은 무려 토실토실한 산토끼 두 마리였다. 다행히도 토끼들은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내려왔다. 화난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그래, 고맙다.”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케이지를 받아 들었다. 꽤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산토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토끼를 꺼내 귀를 잡고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너무 귀여워~”
“나도 토끼 키우고 싶다.”
“와, 이거! 최고의 선물은 키얀인 거 같은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록사나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키얀, 대단해! 언제 산토끼를 잡아 온 거야?! 시간도 촉박했을 텐데.”
“나한테 식은 수프 먹기예요.”
키얀이 두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에 아스테리온은 한순간에 키얀에 대한 고마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질투는 잠시 접어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스테리온은 유치원에 교육용으로 기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토끼가 든 케이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키얀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선물을 건네주었고, 록사나만 남았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은근히 록사나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주변에도 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놓여 있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며, 록사나의 선물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행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음식을 향해 손을 뻗어 바쁘게 움직였다.
‘이 이상 그녀에게 기대해서는 안 되지.’
아스테리온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그때 프레드릭이 헥터 경을 밀치고 아스테리온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넌지시 귀띔을 해 주었다.
“이 케이크를 영주님께서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사실입니다.”
케이크를 만들 때 주방장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과정을 록사나가 직접 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아스테리온의 심장을 가득 메우며 간질거렸다. 반짝이는 눈으로 케이크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전혀 아리거나 시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다른 이들이 먹고 있는 케이크로 향하자, 프레드릭이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공작님 것만 영주님이 특별히 만드신 거고, 다른 사람들 거는 주방장이 만들었습니다.”
작은 의구심이 먼지처럼 부스러지며 벅찬 감격이 아스테리온의 온몸을 덮쳤다.
결혼 전에는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행복이 뭔지 잘 몰랐고, 결혼 후에는 행복을 멀리했다. 이혼 후에는 늘 불행했다.
그런데 오늘 록사나가 그에게 작은 기적을 선물했다. ‘이런 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는 삶의 기적.
그리고 한없이 멀어졌던 록사나와의 거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기적.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맛보기 시작했다. 달콤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다. 손을 움직일수록 줄어드는 달콤함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렇게 아스테리온의 생일 파티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 * *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각, 온 세상은 고요했다.
침대에 누웠던 록사나가 여러 번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 생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담.’
일시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있는 상태지만 애매한 관계인 전 남편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처음에는 잘하는 일일까 싶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스테리온의 모습을 떠올리니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도움을 많이 받는 처지고. 뭐, 동업자 비슷한 사이 아닐까.’
록사나는 나름대로 두 사람의 애매한 관계를 나름대로 정의했다.
캠든 성 사람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갑작스럽게 기획된 파티라 준비 시간이 빠듯해 성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내일 음식을 만들어 나눠 주라고 해야겠다. 주방 사람들이랑 수고한 사람들한테는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 줘야지.’
록사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이러다가는 잠들지 못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되었다.
‘그럼 안 되지. 잠깐 산책을 다녀오면 잠이 오겠지.’
옷을 갈아입기 귀찮아 잠옷 위에 두툼한 실내용 가운과 숄을 걸쳤다.
록사나의 기척에 침대 근처 커다란 바구니에 몸을 말고 있던 벨루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벨루카. 미안, 내가 깨웠구나.”
록사나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벨루카가 만족스럽다는 듯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잠깐 산책하려는 거니까 따라올 필요 없어.”
“아울~”
“진짜 괜찮아. 성안이라 위험하지도 않고, 내가 어디에 있든 넌 나를 금방 찾아올 수 있잖아.”
“아울.”
이내 쉽게 납득한 벨루카가 머리를 낮추며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덕분에 록사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쌀쌀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 걸 느끼며 본채와 가까운 후원으로 향했다.
하얀 달빛 아래 비친 후원은 고즈넉한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