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89)화 (89/214)

89화 

록사나가 자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설마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만들어 내라고 말을 꺼냈겠어요?”

“저는 언제나 록사나 님의 말을 믿습니다!”

눈을 빛내는 빈센트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빈센트, 종이의 가장 큰 비밀이 뭔지 알아요?”

“가장 큰 비밀은… 종이를 만드는 재료와 제지 기술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종이 재료는 뭘까요?”

베렛 공국의 제지 기술은 물론 종이를 만드는 원료 또한 베일에 꼭꼭 싸여 있었다.

제국은 물론 여러 왕국에서 그 비밀을 캐내려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였지만 모두가 실패했다.

“음, 저도 한때는 그 문제에 대해서 잠시나마 고민하고 연구를 했었지요. 재료는 양피지가 아닐까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써 오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베렛 공국의 제지 기술의 핵심은 양피지를 최대한 얇게 가공해서 뭔가를 추가로 첨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얀색이야 탈색을 하면 되는 것이고요.”

“풋!”

빈센트의 진지한 말투와 상상력에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빈센트. 비웃은 거 절대 아니에요.”

“네.”

대수롭지 않게 빈센트가 사과를 받아들였다.

“종이 재료는요, 바로…….”

“빨리 얘기하십시오, 저 숨넘어가겠습니다.”

“나무예요.”

“예?”

“나무라고요?!”

“설마요!”

케빈과 아이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빈센트는 한참 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생각에 골몰했다.

‘나무가 종이 원료라고?! 내가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맙소사!”

빈센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이 깊은 깨달음으로 빛났다.

“나무를 빻아 거기서 나온 섬유를 물에 풀어 평평하고 얇게 서로 엉기도록 한 다음에 물을 빼서 말리면 종이가 돼요.”

“지금 당장……!”

“앉아요. 아직 얘기 다 안 끝났어요.”

록사나는 곧장 뛰쳐나가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빈센트를 주저앉혔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그가 이내 록사나에게 재차 귀를 기울였다.

“종이는 나무 원료 외에도 첨가물에 따라 재질과 품질이 달라져요. 또 가공 처리가 안 된 종이는 아무래도 약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영주님 말씀은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거죠?”

“맞아요.”

쿵 하면 짝이었다.

평민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종이 보급을 확대하면 이를 통해 여러 가지 나비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빈센트가 록사나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대량 인쇄 기술도 필요해요.”

“지금 인쇄술보다 더 발달된 수준의 기술이겠군요.”

“네.”

제국의 출판사나 신문사 등을 중심으로 대량 인쇄술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부분이 많아 한계가 있었다.

‘다른 세계에 과학이 있다면 이곳에는 마도 공학이 있어.’

결은 조금 달랐지만 록사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지식의 힘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람의 손을 거치는 작업을 최대한 줄이고, 기계를 통한 대량 인쇄가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해요.”

컴퓨터와 프린터, 복사기를 떠올린 록사나가 이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이어 갔다.

자세한 구조나 세세한 원리까지는 어려웠지만 초기 버전 같은 제국의 인쇄술을 바탕으로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록사나의 설명을 듣는 마도 공학자 빈센트의 반응이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지금 인쇄술을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완성이 되면 제국과 온 대륙이 들썩이게 되겠군요.”

잔뜩 흥분한 빈센트가 열을 올렸다.

“그럼 사무실에서나 개인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거군요.”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이린이 눈을 반짝였다.

“저도 기대됩니다.”

아직 적응이 덜 되어 어안이 벙벙해진 보좌관 케빈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이후 빈센트의 연구실은 다시 밤낮으로 환하게 불이 켜지게 되었다. 캠든에 온 후 그의 밑으로는 어느덧, 조수들이 여러 명 생겼다.

영주인 록사나는 마도 공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주었다. 그래서 조만간 마도 공학자를 양성하는 학교도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에 빈센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철야를 시작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할 맛이 절로 났다.

* * *

날이 제법 풀렸다.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며 록사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서류에 파묻혀 지내는 일상이지만 보람찬 나날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만 같다.

대체 그게 뭘까?

록사나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으로 향한 순간, 깨달음이 번개처럼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

오늘은 3월 22일. 아스테리온의 생일이었다.

‘어떻게 깜박할 수가 있지?! 이혼한 지 불과 넉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방금 놓쳤던 조각 하나를 되찾은 록사나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일순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혼 전, 록사나는 매년 그녀의 방식대로 아스테리온의 생일을 챙기곤 했었다. 정작 그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혼한 사이다. 그런데 전 남편의 생일을 챙겨야 하나라는 의문이 록사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안드레아스나 헥터 경이 아스테리온을 보좌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알아서 챙기겠지?’

하지만 생일 당일인 오늘까지도 그들에게서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이 그들의 주군 생일인지조차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쩌지?’

록사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고민하게 만드는 건 두 사람이 이혼한 사이라는 걸 떠나서 현재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도우며 캠든 성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동안 붙들고 있던 서류도 손에서 놓은 채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록사나가 마음을 정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스테리온이 현재 캠든 기사단 연무장에 있다는 걸 상기하며 집무실을 나선 그녀의 발걸음이 주방으로 먼저 향했다. 때는 정오가 지난 후였다.

* * *

늦은 저녁, 외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아스테리온이 곧장 욕실로 향했다.

먼지 묻은 옷을 벗어 내는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왠지 모르게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하루 종일 록사나 얼굴 한 번 못 봤군.’

아스테리온은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조차 몰랐다.

욕조에 담긴 따뜻한 물이 육체의 피로를 풀어 주었지만 허전한 그의 마음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샤워를 마친 아스테리온이 1층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식사 때라도 록사나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아스테리온이 식당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캠든 성의 예비 집사 해리슨이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 스프링 룸이 수리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텀 룸에서 식사가 가능하십니다.”

별말 없이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리슨이 그를 어텀 룸으로 안내했다.

해리슨이 어텀 룸의 문을 열어 주자, 아스테리온이 기대를 품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어텀 룸은 스프링 룸보다 족히 다섯 배는 넓은 곳이었다. 은은한 촛불이 따사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의 푸른 눈동자는 눈에 띄게 빛을 잃어 갔다.

식탁의 상석에는 오직 한 세트의 식기만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식사는 그 혼자만 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가끔씩이라도 그녀와 함께 하는 식사가 삶의 낙이자 위안이었는데……. 록사나의 빈자리를 확인한 순간 그가 느끼는 실내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물론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시종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게 그거였다.

시종의 인사를 받으며 아스테리온이 자리에 힘없이 착석했다. 이에 시종이 식당과 연결된 곁문으로 다가가 아스테리온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자 난데없이 실내의 불이 훅 꺼졌다.

갑자기 덮쳐 온 어둠에도 아스테리온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시종이 다시 촛불을 밝히기를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였다. 가느다랗고 여리지만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스테리온 공작님~ 생일 축하합니다~”

곧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며 우렁찬 합창이 이루어졌다.

록사나가 촛불을 켠 케이크를 들고 아스테리온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벌떡 일어섰다. 몸의 방향을 살짝 틀어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촛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당황이 어렸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아스테리온은 곧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깨달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헥터 경, 안드레아스, 프레드릭, 기드온 경, 로사 경, 아이린, 케빈, 코델리아 가족 등 캠든 성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했다. 덕분에 실내가 꽉 들어찼다.

아스테리온이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록사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두 눈이 바람에 물결치는 파도처럼 크게 일렁거렸다. 심장이 뻐근했다.

록사나는 그가 제법 감동했음을 알아챘다. 그 모습을 보니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늘 차갑고 퉁명스럽게 반응했던 예전과는 몹시 대조적이어서 놀랍기도 했다.

“생일 축하해요, …아스테리온.”

록사나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일렁거리는 듯했지만 록사나는 촛불에 반사되어 그리 보이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메마른 강바닥에 단비가 흡족히 내려 물이 끝없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록사나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곤란해질까 자신의 심장과 두 팔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안으로 꽉 말아 쥐었다.

“먼저 소원을 속으로 빌고, 촛불을 끄세요.”

“네, 공작님. 어서 빨리요!”

“이러다가 촛불 다 녹아 없어지겠습니다.”

록사나가 미동이 없는 아스테리온을 재촉하자,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스테리온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짧게 록사나를 바라본 후, 촛불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촛불을 후 불었다.

“우아아~!”

“축하합니다.”

“공작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축하 인사가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아스테리온이 그런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화답했다.

그의 파란 눈에는 차가움 대신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생소한 이 순간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