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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88)화 (88/214)

88화 

* * *

“흠.”

집사 프레드릭이 보낸 서신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영주님, 안 좋은 소식인가요?”

자신의 자리에서 집무를 보던 아이린이 물었다.

“응. 베렛 공국에서 우리 쪽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네.”

“듣기로는 제지 기술을 유출한 자는 무조건 사형이라고 하던데요.”

“아마 사실일 거야. 베렛 공국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니까.”

리온 제국에 비해 한참 작은 나라인 베렛 공국은 종이 수출 사업에 의존도가 높았다.

록사나는 베렛 공국 왕에게 종이 가격을 인하하여 캠든 영지에 수출해 달라는 제안서를 프레드릭을 통해 전달했다.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대가도 제안했다. 온수 난방 설치 기술을 전수하고 보일러를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은 물론 추후 캠든에서 생산되는 제품 등에 대해서도 특혜를 주겠다고 한 것이다.

“영주님이 여러 가지 혜택 사항을 제안했는데도 거절했다니 이제 어떡하죠? 제지 기술자를 데려올 수도 없잖아요.”

“그러게. 어떻게 할까…….”

록사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예 그냥 캠든에서 종이를 개발해 볼까? 산에 나무도 많은데.’

* * *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캠든 상단주 잭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상단은 방문하는 귀족 손님들로 미어터졌고, 물건은 준비되자마자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고급형 동물 귀 머리띠와 날개 액세서리는 재고가 부족해 예약 주문 판매는 필수였다.

동물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옷 위에 걸칠 수 있는 일반용과 잠옷용으로 나오는 동물 옷은 패밀리 룩으로 많이 구입들을 해 갔다.

더불어 수도에는 어린 자녀들을 둔 귀족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드레스 코드 파티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동물 귀 머리띠 또는 동물 옷을 착용하는 파티 문화가 등장한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열기가 수그러들 법한데 캠든 상단 건물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인기 주력 제품 외에도 동물 모양 어린이 가방과 신발, 날개옷, 동물 모자 등 동물 캐릭터를 적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속속들이 출시되며 손님들을 더욱 끌어모았다.

캠든 상단은 단 며칠 만에 수도의 명소가 되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실내 놀이터는 수도 어린이들의 핫 플레이스 장소가 되었다.

그동안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은 기껏해야 그네 정도였다.

그런데 시소, 미끄럼틀, 줄타기, 징검다리 건너기, 손 운전 미니 마차 등 듣도 보도 못한 놀이 기구가 캠든 상단에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보호자들을 위한 카페가 마련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편하게 티타임이나 소규모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놀이 시설은 어른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개방된 형태였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안전 요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아, 힘들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사무실 소파에 몸을 내던진 잭의 얼굴에는 고된 흔적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가시지 않은 흥분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털썩.

“제 월급은 캠든 상단에서 받아 가야 할 것 같네요.”

맞은편 소파에 주저앉으며 문라이트 상단 소속의 핀이 투정을 했다.

“하하하. 그건 제 소관이 아니라서요.”

잭이 몸을 바로 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수도에 상경한 후, 문라이트 상단과 핀의 지원은 캠든 상단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핀이 도와주지 앉았다면 잠잘 시간도 없었을 거야.’

핀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 잭이 속으로 생각했다.

캠든 상단이 수도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세 달 정도 돕기로 영주 록사나와 문라이트 상단주 휴고 사이에 미리 이야기가 되었었다.

잭이 핀을 바라보며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께 핀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고 꼭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면 안 말릴게요.”

“하하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는 호쾌하게 웃었다.

“캠든 상단의 제품들은 제가 봐도 정말 아이와 부모들이 혹할 만해요.”

“그렇죠?! 거의 모두 영주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시죠.”

“참, 신제품이 또 나온다면서요?”

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핀이 물었다.

“네. 연필과 지우개라는 필기구입니다. 헌데 좀 출시가 늦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왜요? 전에 들어 보니까 연필도 엄청 잘 팔릴 것 같은데요.”

“연필을 마음껏 사용하려면 종이가 저렴하게 많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영주님께서 주관하시고 계시니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요…….”

“하긴, 종이값이 무척 비싸니 평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연필을 사도 쓸 일이 별로 없을 수도 있겠네요.”

핀과 잭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연필이 잘 팔리려면 종이값이 부담되지 않아야 한다.

귀족들은 주로 베렛 공국에서 수입하는 질 좋은 종이를 사용한다.

평민들이 사용하는 양피지와는 달리 얇으면서도 질겨 보관이 용이하고 색도 눈처럼 하얄 뿐만 아니라, 잉크도 잘 번지지 않았다.

오직 베렛 공국에서만 생산되는 종이로 그 제조 비법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가격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어 고급 종이 한 장은 최소 평민 식사 한 끼 값에 육박했다.

품질 좋은 종이는 황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고, 평민들 사이에서 사치품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리온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 * *

록사나는 캠든 영지 업무와 더불어 이종족 실험 시설 발견으로 인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키얀, 조심히 다녀오렴.”

“네, 영주님.”

한층 의젓해진 키얀은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두르지.”

두 사람의 옆에 있던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흘러나왔다.

이에 키얀이 몸을 돌리며 아스테리온을 잠시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카일라니 기사단 부단장 헥터 일행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린 맹수의 위협에도 아스테리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록사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잘 부탁해요.”

자신이 함께 가지 못하는 점과 더불어 키얀에 대한 부탁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지.”

얼굴에는 아쉬움이 살짝 묻어 있었다.

록사나는 정신이 다른 데 쏠리기 시작해 그 모습을 놓쳤다. 키얀이 오늘 처음으로 이종족 시설 잠입조에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감금된 이종족들을 파악하는 게 목적인 이 일은 아스테리온이 주도하고, 키얀과 헥터 경이 보조하기로 했다.

아스테리온이 이끄는 한 무리의 기사단이 캠든 성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눈빛에는 염려가 깃들었다.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과 카일라니 기사단이 있으니 무력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곳에 뭐가 더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 그곳을 발견하고 캠든 성에 복귀한 이후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다이아몬드 동굴에 두 번 더 방문했었다.

두 사람은 시설에 대한 정보 수집과 회색 돌 통로에 대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었다.

그 결과 정령의 힘이 깃든 다이아몬드만 있다면 굳이 록사나가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동굴에서 가져온 다이아몬드에 넉넉하게 정령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록사나가 등을 돌려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아이린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 * *

“록사나 님, 어서 오십시오.”

영주의 집무실 앞에서 서성이던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아스테리온 일행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록사나를 반겼다.

“오셨으면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주인인 영주님이 안 계신데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요. 허허허.”

빈센트의 너털웃음에 록사나도 따라 웃었다.

“들어가요.”

록사나가 먼저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 있던 케빈이 벌떡 일어났다.

“영주님, 다녀오셨습니까?”

“아우울~!”

벨루카 역시 록사나를 반겼다.

“케빈, 차 좀 부탁해요.”

“네, 금방 내오겠습니다.”

선임 보좌관 아이린의 부탁에 케빈이 집무실에 딸린 탕비실로 냉큼 들어갔다.

케빈은 록사나가 캠든에 오기 전부터 성에 시종으로 있었다.

최근에 업무 변경을 하고 싶다며 관리직에 지원하였다가 록사나의 눈에 띄어 후임 보좌관으로 발탁이 되었다.

올해 열일곱 살인 케빈은 아이린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만 선임인 아이린의 말을 깍듯이 따랐다.

나이보다 실력과 경력 등을 중요시하는 캠든 성의 특성과 분위기상 두 사람 모두 이에 대해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부하 직원을 두게 된 아이린은 열과 성을 다해 케빈에게 업무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차 준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케빈이 내온 차를 마시며 록사나와 빈센트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요즘 많이 바쁘죠?”

“정말 바쁩니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 있고 매일매일이 즐겁습니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빈센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캠든이 빈센트에게 잘 맞는 거 같아 다행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건강은 꼭 잘 챙기면서 하세요. 빈센트는 캠든에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하하핫. 록사나 님 말을 들으니 제가 정말 캠든의 일원이 되었다는 실감이 납니다.”

빈센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얼굴에 나타났다.

“다른 개발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때요, 빈센트?”

“연필하고 지우개 개발은 다 끝나고 생산하는 일만 남았으니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보일러 생산도 체계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제가 신경 쓸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번에는 무슨 개발입니까?”

“종이요.”

“종이요?”

빈센트의 눈이 커지면서 동시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베렛 공국에서 영주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고 들었는데요. 그쪽에서 제지 기술과 관련한 다른 제안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록사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우리 필기구인 연필이 잘 팔리려면 종이값이 역시 저렴해야 해요.”

“그건 그렇습니다. 귀족들이 쓰는 종이를 평민들이 사서 쓰기에는 가격이 너무 높지요.”

“그래서예요. 저쪽에서는 제가 제시한 가격으로는 절대 고급 종이를 팔 수 없다고 하니 우리가 독자적으로 종이를 개발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가능하겠습니까?”

빈센트가 록사나의 말을 불신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버릇 같은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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