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괜찮아?”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려서…….”
민망함이 몰려온 록사나가 몸을 바로 하며 그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온 사람은 정작 아스테리온인데…….’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록사나는 이를 보지 못했다.
“고생했어요. 돌아가면서 얘기해요.”
“그러지.”
두 사람은 바로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록사나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보았던 회색 돌의 깜박였던 것에 대해 얘기했다.
“당신 말처럼 빛이 약해지면 통로 문이 닫히는 것 같아. 건너편에서도 빛이 약해져서 바로 넘어왔거든.”
“넘어가 있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였던 것 같아요.”
시간을 가늠한 록사나가 덧붙였다.
“다음에는 혹시 다이아몬드나 불어 넣은 정령력의 크기에 따라서 통로가 연결되는 시간이 달라지는 건 아닌지 꼭 실험해 봐요.”
“그러는 게 좋겠어.”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시야가 탁 트이며 밝아졌다.
“또 다른 뭔가를 본 거죠?”
잠시 후, 록사나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곳을 벗어나 연결된 다른 장소를 봤는데… 이종족들이 갇혀 있는 장소를 새롭게 발견했어.”
“그들은 살아 있는 거죠?”
갇혀 있다고 했으니 살아 있다고 짐작되었다.
“응.”
아스테리온이 자신이 본 광경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성한 곳 한 곳 없이 모두 어딘가 여러 군데 망가졌다. 더러는 몸이 멀쩡해 보였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본연의 외모가 아닌 누군가의 신체를 기운 이들이었다. 키메라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철창에 갇혀 있었고, 사육되는 짐승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그곳 역시 처음 본 장소와 다를 바 없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종족만 있었나요?”
“응. 감옥 안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자들은 보지 못했어.”
우선은 그나마 인간은 없었다는 점에서 안도하긴 했지만, 이 또한 모르는 일이었다. 어딘가에 따로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와서 까만 돌을 다시 봤어. 그런데…….”
아스테리온이 잠시 말을 멈췄다.
핏빛으로 물든 붉은 눈을 마주했을 때를 떠올린 그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강심장인 그도 그때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털이 쭈뼛거렸었다.
걸음을 멈춘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를 움직였어.”
“누, 눈을 움직였다고요?”
말을 더듬으며 록사나가 경악했다. 온몸에서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까만 돌 속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는 분명 눈만 뜨고 있었을 뿐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그녀의 심장은 덜컹거렸다. 꺼림칙한 핏빛 눈동자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겨우 얼굴의 눈 부분만을 보았기에 인간인지 이종족인지 지금까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눈동자를 움직였다니! 분명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 * *
페어리 레이크의 온천과 그래파이트 광산 시찰을 마친 록사나 일행이 캠든 성으로 복귀했다.
록사나는 도착하자마자 측근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집사 프레드릭과 기사단장 기드온 경, 로사 경, 인어족 코델리아, 수인족 키얀, 캠든 상단주 잭, 그리고 페어리 레이크에 동행한 헨리 경과 아이린, 마도 공학자 빈센트.
아스테리온과 그의 제2 보좌관 안드레아스, 카일라니 기사단 부단장 헥터 경까지 총 열네 명이 한자리에 자리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동굴에서의 사건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심각한 표정이거나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자이언트 포레스트의 시설에서 탈출한 당사자인 코델리아와 키얀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영주님과 공작께서 보셨다는 그 시설은 저희가 갇혀 있던 그 시설이 틀림없어요.”
격양된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꽉 말아 쥔 주먹 위로 그녀의 남편인 잭이 손을 올려 토닥거렸다.
그러자 코델리아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맞은편에 있는 키얀을 흘긋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번 사라진 이들은 다시 볼 수 없었어요. 키얀의 부모님도요. 어쩌면 두 분이 보셨다는 그곳으로 끌려간 게 아닐까 싶어요.”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키얀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기드온 경이 키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를 건넸다.
“코델리아, 키얀. 많이 힘들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한번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래요?”
록사나를 포함한 일부는 그들의 사연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것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필요한 부분이었다.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도 코델리아와 키얀은 기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갇혀 있던 시설에는 수백 명의 다양한 이종족들이 있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이종족은 성장이 빠르고, 수명은 인간들보다 길었다.
코델리아와 키얀, 키아가 지낸 곳은 수용 시설이었고, 감시자가 늘 상주했다. 하지만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밖으로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고대 유물을 사용한 것인지 거무스름한 장막을 뚫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들 금방 발각되었고, 어딘가로 붙잡혀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반항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용 시설 내에는 처벌자 외에도 당연히 감시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시키는 고된 노동을 수행해야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감시자 중에는 뛰어난 인간뿐만 아니라, 이종족들도 다수 존재했다.
한참 어려서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한 조인족 키아와 키얀은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숨겨진 그 시설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코델리아가 기억하는 키얀과 키아의 부모님은 실험 시설에 25년 동안 갇혀 있었으며 그곳에서 서로의 짝을 만나 각자의 아이들을 낳았다고 한다.
키얀이 다섯 살 때 그의 부모님은 며칠 간격으로 어딘가로 끌려가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키아의 부모님 역시 키아가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못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이종족들의 사정도 대부분 이와 비슷했는데 어린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주 대상이 되었다.
코델리아 역시 그곳에서 태어난 존재였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운이 좋았다.
감시자 중 한 명인 그녀의 조부 모건이 고아가 된 코델리아를 거두어 돌봐 주었다.
모건이 그녀를 찾아오기 전까지 코델리아는 조부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감시자와 이종족들의 눈을 피해 모건은 코델리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코델리아의 할아버지가 바깥세상과 탈출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 주셔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군요.”
로사 경의 말에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제가 있었던 곳 말고도 자이언트 포레스트 내에 다른 수용 시설이 몇 개 더 있다고 했어요.”
“한 수용 시설에 수백 명이 있는데 다른 곳이 몇 군데 더 있다니요…….”
“허허.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의 이종족들이 붙잡혀 있다는 얘기군요.”
기드온 경의 말에 집사 프레드릭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 시설이 최근 몇십 년 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최소 몇백 년 넘게 존재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카일라니 공작가의 제2 보좌관 안드레아스의 추측에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세대를 거쳐 수용 시설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또한 이종족들이 인간들이 머무는 땅에서 모습을 감춘 후, 근 100년 전까지는 아주 가끔씩이라도 그들을 마주쳤었다는 기록이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에 대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륙에서 이종족들이 거의 사라진 게 어쩌면 그곳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습니다.”
카일라니 기사단의 부단장 헥터 경의 말에 캠든 기사단의 헨리 경이 호응했다. 다른 이들의 눈빛도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회의실 사람들의 표정이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흠흠. 저는 그 거무스름하다는 장막이 무척 궁금하군요.”
자신에게로 주의를 집중시킨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추후 시설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려면 그에 대한 정보와 대비가 꼭 필요하죠.”
록사나는 빈센트를 보며 역시 마도 공학자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코델리아, 제게 그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고대 유물 장치 형태나 구조, 기능, 장막의 특징 같은 거 뭐든 말입니다.”
빈센트가 코델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이에요. 키얀도 장막에 대해 꽤 알고 있으니 같이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펜하고 종이요.”
아이린이 어느새 준비한 것들을 코델리아에게 내밀었다. 이에 그녀가 눈인사로 대신 감사를 표현했다.
한참 동안, 코델리아와 키얀, 빈센트를 중심으로 장막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이후에는 이종족 구출과 관련한 논의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워낙 많은 조사와 준비가 필요했기에 정오쯤부터 시작되었던 회의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 * *
다음 날, 영주로서의 록사나의 바쁜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종족 구출은 한시가 급했지만 구출한 그들을 캠든에 몰래 수용하려면 많은 부분들이 준비되고 선행되어야 했다.
이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영지 재정비와 개발 문제도 무척 급하고 중요했다.
온천과 페어리 레이크 주변 지역의 개발, 그래파이트의 채굴과 감시 초소의 설치, 연필 개발 등과 관련하여 논의를 연달아 진행하다 보니 영주 집무실 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렸다 닫혔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캠든 영지에 봄꽃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렸다.
캠든 성내의 완성된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바깥 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곳곳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완성된 놀이터를 처음 봤을 때 유치원생들은 다들 눈을 크게 뜨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