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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84)화 (84/214)

84화 

록사나를 찾기 위해 겨우 발견한 동굴에 들어가 빛나는 회색 돌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그녀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 와중에도 그는 빛을 내뿜는 회색 돌에 손을 대었고, 그 순간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록사나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옥이 펼쳐진 장소였다.

록사나의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쓰러지는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그는 믿지 않는 신에게 속으로 감사를 드렸다.

그녀를 무사히 찾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스테리온이 눈을 감은 록사나의 한 손을 꼭 붙잡았다. 따가운 시선으로 아이린이 쏘아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맨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그런 끔찍한 곳을 보고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때라면 잡아 오는 자신의 손길을 지체 없이 뿌리쳤을 텐데 록사나는 아무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손도 몹시 차가웠다.

“괜찮아. 당신이 자고 일어날 때까지 내가 옆에 계속 있을게. 눈 좀 붙여.”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록사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는 그녀의 머릿속 가득 끈적이는 검붉은 빛의 향연을 서서히 지워 냈다.

이어서 수마가 그녀를 덮쳤다.

* * *

록사나의 눈이 뜨이며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잘 잤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스테리온이 동아줄을 붙든 것처럼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아직까지 있었어요?”

타박하지 않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었건만 그의 두 눈이 축 처지며 파르르 떨렸다.

“미안.”

“거기요.”

사과를 받고자 물었던 게 아니라고 먼저 말할까 했지만 록사나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기에 아스테리온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서 끔찍하고 괴기스러웠던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지워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에게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제 옆에 누워 있는 벨루카의 은빛 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잠들기 전까지도 자신을 옭아매는 듯한 살풍경한 잔상이 자꾸 괴롭혔었다.

그런데 벨루카와 아스테리온이 옆을 지켜 줘서 그런지 자는 동안에는 그 꿈을 꾸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아무 말이 없자 록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 장소가 회색 돌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어딘지 알 거 같아요.”

들었었던 이야기와 그녀가 가진 정령의 힘, 실제로 보았던 그곳을 떠올렸을 때 모를 수가 없었다.

“…숨겨진 이종족 실험실.”

무겁게 입을 뗀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로웰 후작 령과 가까운 자이언트 포레스트 어딘가에 숨겨진 시설일 것이다.

“틀림없어요.”

아스테리온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록사나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여전히 내가 그곳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요?”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는…….”

“당신도 봤는지 모르지만, 까만 돌 속에 누군가 있었어요.”

록사나가 최우선이었기에 경황이 없었지만 아스테리온 역시 까만 돌 안의 존재를 얼핏 봤다.

그때를 순간 떠올린 아스테리온이 진중한 눈으로 록사나를 바라봤다.

“바로 움직이는 건 무리야.”

지금 말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그 동굴로 록사나가 달려가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또한 까만 돌 속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돌 속에 갇혀 있는 건지 아니면 필요에 의해 그 안에 있는 건지 등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조만간 왜 회색 돌과 그곳이 연결된 건지 알아볼 거예요. 그리고 동굴에 대한 것도 우선은 당신과 나, 벨루카만 알고 있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쉰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 동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수확이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는 회색 돌이 있는 이상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회색 돌 말이에요. 다른 장소로 연결되는 열쇠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넘어간 것처럼 반대로 그쪽에서도 회색 돌 같은 게 있다면 넘어올 수 있겠죠?”

“아마도. 그곳에 회색 돌 같은 건 없었지만 까만 돌이 있었으니… 대비할 수단을 마련해야지.”

록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일 동굴에 가는 건 어때요? 미루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조사를 해 놓는 게 지금보다 안심이 될 거 같아요.”

그녀 혼자 가는 것보다 아스테리온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록사나가 제안했다.

“…그러지.”

아스테리온은 마음 같아서는 더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록사나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고도 싶었기에 이를 수락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친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벨루카가 다이아몬드 동굴로 향했다.

일행에게는 무너진 지형을 살피러 간다는 말을 전했다. 이에 아이린이 두 사람을 따라나서려 했지만, 록사나가 그녀에게 다른 일을 시키면서 무산되었다.

“당장 다이아몬드를 캐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네요.”

“캠든 영지에 당장 큰 수입이 없으니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번에 상단에서 만든 첫 제품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하더군.”

록사나의 가벼운 어투에 아스테리온이 대꾸했다.

첫 제품은 동물 귀 머리띠와 아이들용 날개 장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공식 첫 제품을 얼마 전 출시했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인근 영지에서 완판되었다. 귀족들을 겨냥한 고급형이었다.

“이제 시작이죠.”

록사나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회색 돌 앞에 섰다. 그들의 곁에는 벨루카 역시 함께였다.

“다른 건 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인데, 이 돌만 회색인 게 참 신기해요.”

“통로 역할을 하는 거라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록사나가 회색 돌에 손을 뻗어 살짝 만졌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 그제 처음 만졌을 때와 다른 건 없었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당신이 처음 회색 돌을 작동시켰을 때처럼 해 봐. 그때처럼 빛을 내뿜으면 내가 들어가서 건너편에 다녀오지.”

그 끔찍한 곳에 록사나를 들여보내고 싶지 않아 아스테리온이 선수를 쳤다.

록사나 역시 다시 그곳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용되었었던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는 회색 돌 앞쪽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스테리온과 함께 동굴을 빠져나갈 때 록사나는 그 돌을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록사나가 그때 사용되었던 다이아몬드와 바닥의 다른 다이아몬드도 함께 집어 들었다.

“두 갠가?”

“아니에요. 이게 그때 다이아몬드에요.”

왼손에 집어 든 것을 아스테리온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들고 있어요. 다른 다이아몬드로도 되는지 시험해 보려고요.”

오른손에 든 것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며 록사나가 말했다.

“그래.”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왼손에서 다이아몬드를 가져갔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정령의 힘을 불어 넣는 록사나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초록빛이 투명한 돌에 깃들며 점점 흰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투명해졌다. 많은 걸 봐 온 아스테리온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제 던져 올릴게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록사나가 정령의 힘이 깃든 다이아몬드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그때였다.

화악, 번쩍.

밝은 빛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른 다이아몬드로도 되네요.”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고 있던 다이아몬드를 무심하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하얀 빛을 뿜어내는 회색 돌에 가까이 다가섰다.

“다녀오지.”

록사나와 눈을 맞추며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조심히 다녀와요.”

“아울.”

걱정하는 록사나의 다리 옆에 앉으며 벨루카도 한마디 했다. 평소에 아스테리온을 아니꼽게 보던 것과 달리 염려가 깃든 울음소리였다.

아스테리온이 곧장 회색 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빛에 의해 삼켜졌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불안한 마음에 록사나는 최면을 걸 듯 자신에게 말했다.

“아우울.”

벨루카가 머리를 록사나의 다리에 비볐다.

록사나는 한참 동안 회색 돌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건너편의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을까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걸 보니 단순 통로인 건가?’

살짝 고개를 내려 벨루카를 바라보았다.

“벨루카, 너 땅이 무너지기 전에 여기서 뭘 느꼈었던 거니?”

소리가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록사나가 안심하고 궁금했었던 점을 물었다.

“아우울!”

맞다는 듯 벨루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회색 돌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 회색 돌의 기운을 느낀 거야?”

살짝 머리를 갸웃하던 어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고 하는 것 같은데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응? 다른 기운을 느낀 건가?’

평소에는 벨루카와 소통하는 데 있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참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네가 정령어를 할 수 있을까? 아직 덜 자라서 그런가?”

“아우우울.”

록사나의 말을 들은 벨루카의 두 귀가 축 처졌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왜 안 돌아오지?’

1분이 몇 시간같이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 록사나가 벨루카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어?”

회색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깜박거렸다. 마치 마석의 힘이 다한 전등이 깜박거리는 것과 닮아 보였다.

록사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초해하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며 절로 빨라졌다.

왠지 저 빛이 꺼지면 통로의 문이 닫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되겠어. 건너가 봐야겠어.’

막 발을 들이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커다란 형체가 툭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회색 돌의 빛이 훅 꺼졌다. 바람이 한순간에 촛불을 불어 끈 것 같았다.

“아스테리온!”

록사나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에메랄드빛 눈을 마주한 아스테리온이 두 팔을 들어 록사나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무사히 다녀왔어.”

“아!”

그의 한마디에 록사나의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스테리온이 곧바로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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