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여긴 어디지?’
벨루카를 끌어안으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오는지 주변이 희뿌옇게 보였다.
그녀가 등지고 기댄 것은 함께 쏟아져 내린 토사 더미였고, 머리 위로는 높다란 동공이 펼쳐져 있었다.
맞은편 벽의 한참 위로는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저 구멍으로 내가 떨어져 내렸나 보네.’
함께 쏟아지던 흙덩이가 쿠션 역할을 하며 충격을 완화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우리가 떨어진 저 구멍으로는 나가기 힘들 것 같은데.”
록사나의 품에 안긴 벨루카가 귀를 쫑긋 세우며 꼬리를 흔들었다.
“너 나가는 방법 알아?”
“아울!”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벨루카가 품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록사나를 쳐다보았다.
“나보고 따라오라고?”
“아울!”
“그래, 네가 앞장서.”
록사나가 몸을 일으켜 벨루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벨루카가 흙더미 뒤에 감춰져 있던 동굴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동굴 안에 동굴이 또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땅속이라 지열이 있어서 그런지 춥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옮길수록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다.
가끔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공기가 순환하는 걸 보니 어딘가 바람구멍이 있는 거 같아.’
록사나는 앞에서 살랑이는 은빛 털 뭉치를 열심히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주변이 점점 밝아지며 동굴 벽에 박힌 투명한 돌들이 점점이 나타났다. 안으로 발을 내디딜수록 빛을 받아 반짝이는 돌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대낮처럼 밝은 다른 공간을 마주한 순간 록사나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쏟아졌다.
“와아~!”
그녀의 감탄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안내자 역할을 하던 벨루카가 뿌듯한 눈빛을 띠었다.
록사나의 곁으로 총총총 걸어와 다리에 몸을 한껏 비볐다.
온 사방에 투명한 돌이 박혀 있는 커다란 동굴이었다. 그 위의 어딘가에서 뻗어 들어오는 빛이 반사되며 모든 돌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인가? 에이, 설마. 크리스털이겠지.”
주변을 둘러보며 직접 투명한 돌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었다.
그때 록사나의 눈에 유일하게 빛나지 않는 특이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빛이 꺼진 듯한 회색 빛깔의 돌이었는데 높이가 2m 가까이 되어 보였다. 아랫부분은 땅에 파묻혀 있었다.
‘살아 있는 돌?’
마치 숨이 꺼지기 직전처럼 희미하게 돌이 호흡하고 있었다.
록사나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낑낑낑.”
벨루카도 불안한 듯 이상 행동을 보였다. 돌 앞에서 자꾸 바닥을 긁었다.
살짝 겁이 났지만 록사나가 한 손을 뻗었다. 우중충한 회색 빛깔이었지만 나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회색 돌에 닿았다. 여느 다른 돌과 같이 차갑고 딱딱하기만 했다.
벨루카 때처럼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살짝 기대했었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벨루카, 이건 정령이 아닌가 봐.”
민망해하며 록사나가 손을 떼었다.
그녀는 커다란 회색 돌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두드려도 보고, 다시 만져도 보고. 허나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벨루카 역시 앞발로 툭툭 건드렸으나 곧 두 귀가 축 처졌다.
“이건 대체 뭘까?”
자리에 주저앉은 록사나가 회색 돌에 등을 기댔다.
‘벨루카의 반응을 보니 정령과 관련이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록사나가 무심결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한 돌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확 커졌다.
‘혹시?!’
정령의 힘을 투명한 돌에 살짝 불어 넣자, 돌 안에 초록빛이 담겼다.
그 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 투명해졌다.
“응?! 진짜 다이아몬드잖아!”
엄밀히 말하면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지만, 틀림없었다.
어릴 적 다이아몬드 원석에 장난 삼아 정령의 힘을 불어 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원석에 초록빛 정령의 힘이 담겼다가 투명하게 변했었다.
“우와! 벨루카, 다이아몬드야!”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친 록사나가 어린 은빛 늑대의 몸을 덥석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울~!”
벨루카도 덩달아 꼬리를 마구 흔들며 좋다고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세상에, 다이아몬드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록사나의 초록빛 눈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반짝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아까는 크리스털이라고 생각해 무심코 지나쳤는데 커다란 동굴의 벽과 바닥 여기저기에 원석이 널려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 캠든 영지는 가난한 영지가 아니라 부자 영지였다. 다만, 그동안 묻힌 자원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대박!”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록사나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머리 위로 던져 올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다이아몬드를 받기 위해 손을 내민 그때였다.
동굴 안 모든 다이아몬드 원석이 내뿜는 빛이 던져 올린 원석 속 정령의 힘과 만나며 새하얀 빛을 뿜었다.
“어?”
그 빛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회색 돌에 닿았다.
번쩍! 화악.
록사나의 몸이 회색 돌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벨루카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자 록사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울렁거리는 느낌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달라진 기운을 느낀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헉!”
그녀의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푸줏간에 온 게 아닌가 할 정도로 핏물을 뚝뚝 흘리는 살덩이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벽에는 빼곡하게 잘린 팔, 다리, 몸통이 통째로 고리에 걸려 있었다. 동물의 것도 있었지만 인간의 신체도 보였다.
실로 무섭고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록사나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공기 중에 가득한 비릿한 혈 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우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록사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우우울.”
놀란 벨루카 역시 그녀의 품에 안겨 잔뜩 털을 곤두세웠다.
구역질을 겨우 멈춘 록사나의 손끝과 다리, 온몸이 달달 떨렸다.
악몽보다 더한 살풍경한 모습에 당장에라도 두 눈을 꼭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의 광경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공포감과 두려움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피부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여긴 대체 어디지?’
눈을 겨우 부릅뜬 록사나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주변을 훑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여기저기에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나 지하 같은 느낌이 드는 곳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능하면 푸줏간 고깃덩어리처럼 걸린 것들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공간 중앙에 놓인 익숙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빨려 들어오기 전에 다이아몬드 동굴에서 봤었던 회색 돌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조금 달랐다. 거대한 돌은 까맣고 탁한 색을 띠었다.
벨루카를 꼭 끌어안은 록사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돌을 향해 나아갔다.
바닥 곳곳에는 고리에 걸린 신체 부위에서 떨어져 나온 살덩이들이 널려 있어 피해 가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까만 돌 앞에 다다른 록사나가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돌 안에는 까만 연기 같은 게 가득 차 있었는데 자아를 가진 것처럼 모였다 흩어지며 색이 진해졌다 옅어졌다.
그 순간, 까만 돌 안에 사람이 얼굴이 드러났다. 시뻘겋게 눈을 뜬 상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꺄악!”
외마디 비명이 절로 흘러나오며 록사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턱!
막 땅에 주저앉기 직전인 그녀의 몸을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동시에 록사나의 몸이 굳어지려고 하는 찰나 하늘을 닮은 청량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익숙하고 편안한 향이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록사나의 두 눈을 가린 상대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나야.”
‘아스테리온?’
미친 듯이 뛰는 줄도 몰랐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제 속도를 찾아갔다.
“우선 여기서 나가지. 눈 감아.”
그의 말에 따라 록사나가 벨루카를 꼭 끌어안고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서 아스테리온이 두 팔로 록사나의 허리와 등을 받치며 안아 들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거리는 아스테리온의 심장 소리가 들리자, 코끝을 스치던 피비린내가 사라지고 그가 가지고 있는 향기와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스테리온이 몸을 돌려 성큼 걸어갔다. 그가 가는 방향에는 점점 작아지는 빛이 있었다.
그 빛은 다이아몬드 동굴의 회색 돌과 연결된 통로였다.
“잠시 어지러울 거야.”
빛을 넘어가기 전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록사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이 빛 속으로 들어갔다.
* * *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품에 안긴 상태 그대로 페어리 레이크 근처 여관까지 옮겨졌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도 끔찍했던 광경들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주의 무사 귀환에 잠시 소란이 벌어졌지만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잃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마을 의원의 진찰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낭떠러지의 일부가 무너지며 그녀 역시 땅속으로 떨어졌지만 몇 군데 생채기가 난 것 말고는 건강하다는 의원의 진단에 아이린은 한숨 돌렸다.
하지만 충격받은 것 같은 록사나의 모습에 아이린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록사나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방에 딸린 욕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혀진 록사나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공작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모두가 물러나고 록사나가 머무는 방 안에 공작과 벨루카만 남자 아이린이 물었다.
“그 얘긴 나중에 하도록 하지. 우선은 편히 쉬게 하는 게 좋겠어.”
사실 아스테리온도 자신이 봤던 그 끔찍했던 광경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마물은 물론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 왔던 자신에게도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