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또 다른 뭔가를 본 거죠? 】
다음 날, 처음 온천수가 터져 나온 곳에 도착한 록사나 일행은 그 주변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 일대에 온천을 개발하고 제대로 된 숙박 시설까지 짓는다면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겠군.”
록사나를 기어이 쫓아온 아스테리온이 주변 풍광에 감탄했다.
페어리 레이크와 호수 주변을 둘러싼 산과 나무들은 리온 제국에서 보기 힘든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직접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의 이런 속마음을 눈치챈 록사나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그래서 캠든 영지 준 거 후회해요?”
온천에 그래파이트 광물까지 돈이 될 만한 것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욕심이 날 것이다.
“아니. 제대로 된 영지를 준 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이야.”
늘 무표정한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록사나는 살짝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배 아파해야 정상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아스테리온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코딱지만 한 영지를 탐낼 만큼 그렇게 돈이 없어 보여?”
황당해하는 그의 진심이 표정에 드러났다.
록사나는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에 코딱지만 한 영지라는 소리를 들으니 속이 무척 상했다.
“지금 돈 많다고 자랑해요?! 당신한테는 코딱지만 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레드포드보다 더 큰 영지거든요!”
“아니, 난…….”
그녀를 붙잡으려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었으나 록사나는 고개를 팩 돌리며 일행이 모여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하아.”
아스테리온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말실수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록사나와의 관계는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멀찍하게 벌어졌다. 지금처럼.
‘은연중에 잘난 체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아스테리온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말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록사나가 평소보다 예민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지?’
록사나는 이후부터 내내 아스테리온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자신의 일행들과 온천 일대, 그리고 그래파이트가 발견된 산맥을 돌아보았다.
혼자 외톨이 신세가 된 아스테리온은 제2 보좌관 안드레아스를 데려올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록사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밖에는 없었다.
“헨리 경, 그래파이트 광산 규모가 제법 큰 것 같죠?”
“네. 그래파이트 광물을 발견한 영지민의 말에 따라 주변 일대를 훑어보았는데 적어도 이 산맥 일대에 그래파이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헨리 경의 의견에 동의했다.
“음, 그렇단 말이죠.”
거대한 산맥 일대를 둘러보며 록사나가 그 크기를 가늠했다.
“광산 주변은 물론 산맥 전체에 감시 초소를 두는 게 좋겠군. 성벽을 쌓는다면 더 좋겠지만.”
조용히 존재를 지우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성벽까지요?”
그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레드포드 영지를 이끄는 공작으로서 영지 운영 경험이 무척 풍부했기 때문이다.
록사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실전 경험은 어느 정도 별개라고 생각했다.
“응. 캠든에서는 레드포드 영지와 쿠엔틴 백작 령이 가장 가깝지만 그래파이트가 알려지게 되면 수작을 부리려는 자들이 생기겠지.”
록사나와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파이트가 발견된 곳은 산 중턱 바로 아래였기에 누구나 충분히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캠든은 서쪽에 치우쳐 있고 워낙 외진 영지라 실질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영지는 아스테리온이 앞서 말한 두 곳뿐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산맥이라는 거대한 미지의 산맥이 캠든의 서쪽을 중심으로 남쪽까지 세로로 길게 쭉 뻗어 있었다.
서쪽 산맥 너머에는 끝이 없는 바다 딜란해가 펼쳐져 있다.
캠든의 남쪽 역시 알렉산드리아 산맥에서 뻗어 나온 크고 작은 산맥들로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캠든의 남쪽 산맥 너머에 있는 리온 제국의 서부 위즐리 공작 령과 남부 메도우 공작 령에 가려면 동쪽 쿠엔틴 백작 령을 거쳐 빙 돌아가야만 했다.
이렇듯 캠든은 산맥 때문에 함부로 넘나들기 힘든 만큼 고립된 지역이었지만 그만큼 안전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아는 아스테리온이 성벽 얘기까지 꺼냈다는 건 무시하기 어려웠다.
‘역사적으로 봐도 지리적 이점만 믿고 있다가 망한 나라와 영지는 수두룩하지.’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다. 록사나는 자금과 인력이 많이 들겠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당장은 힘들었지만.
“조언 고마워요. 당장은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성벽을 쌓아야겠어요.”
“별말씀을. 혹시 모를 마물의 공격 대비에도 좋을 거야.”
아스테리온의 말에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파이트 광산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거야. 그러면 산짐승이나 마물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페어리 레이크와 가깝기도 해서 혹시라도 알렉산드리아 산맥을 넘어오는 마물들이 있다면 위험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어쩌다 길을 잃고 내려오는 하급 마물 한두 마리 정도가 전부여서 마을별 치안대가 처리하고는 했었다.
본격적으로 치안대의 인원과 수준을 높이기 위해 병력을 대거 늘렸지만 한계가 있었다.
‘영지민 인원이 적으니까, 치안대나 기사단 인력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어. 새 영지민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해.’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며 록사나가 산 중턱 일대를 휘이 둘러보다가 허전함을 느꼈다.
내내 옆에 붙어 있던 정령 벨루카가 시야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 나온 게 좋은지 신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더니 근처 어딘가를 또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벨루카는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 늑대라고 할 만큼 제법 덩치가 자랐다. 그만큼 활동량과 활동 반경이 확 넓어졌다.
“벨루카는 어디 갔지?”
“아까 저쪽으로 뛰어가시던데요.”
낮게 읊조리는 록사나의 말에 아이린이 산 위쪽을 가리켰다.
“어, 벨루카?!”
아이린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언뜻 벨루카의 은빛 털이 나무 사이로 보이다 사라졌다.
록사나의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이린, 여기서 기다려. 벨루카 찾아올게.”
“기사님들을 보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야, 내가 금방 다녀올게.”
아이린의 만류에도 록사나는 자신이 직접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벨루카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따라가지.”
자신이라도 따라갈까 고민하는 아이린에게 아스테리온이 말하고는 록사나의 뒤를 따라갔다.
“벨루카~”
벨루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도착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록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다시 은빛 털이 보였다.
록사나가 다시 벨루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벨루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뭐 재미난 거라도 발견한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벨루카가 고개를 돌려 록사나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다시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몸을 쓱 일으켜 세웠다.
앞쪽은 산이 뚝 끊기는 지형으로 뻥 뚫린 시야와 더불어 건너편 산자락이 보였다.
벨루카가 앞으로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벨루카, 거기 위험해. 이리로 와.”
혹시라도 낭떠러지 끝에까지 갈까 봐 록사나가 은빛 늑대에게 다가갔다.
정령인지라 아래로 떨어져도 무사하겠지만 아직 세상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정령이었다.
록사나에게 다가온 벨루카가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뭐 좋은 거라도 봤어?”
쩌저적.
‘응?’
그 순간 딛고 선 땅이 훅 꺼지며 록사나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록사나!”
뒤에 있던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손을 뻗어 록사나의 몸을 감싸 안으려 했지만 갑자기 그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막?!’
그가 다시 몸을 날렸다. 역시 보이지 않는 뭔가에 부딪치며 몸이 튕겨졌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도 마찬가지였다.
록사나를 삼킨 땅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했다.
검을 빼 든 아스테리온이 보이지 않는 막을 향해 미친 듯이 휘둘렀다.
“공작님!”
“영주님!”
뭔가 무너져 내리는 커다란 소리를 들은 일행들이 잠시 뒤 우르르 몰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기사들이 너도나도 공작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투명한 막과 부딪친 검들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무리 내리쳐도 막은 부서지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이 검을 휘두른 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낭떠러지를 따라 장막처럼 쳐진 막이 꿈적도 안 했다.
“공작님, 아무리 해도 파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헨리 경이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기사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는 아이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록사나의 납치 사건 이후, 제 한 몸이라도 지키기 위해 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린은 일행에 비해 아직은 실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잠시 거친 숨을 가다듬은 아스테리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장막을 주변으로 그대들은 이 일대를 수색하라. 나는 우회해서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가겠다.”
* * *
“끼잉. 낑.”
움찔.
땅이 무너져 내리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록사나의 의식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으음.”
얕은 신음과 함께 눈꺼풀이 들리며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끼이잉. 아우울.”
록사나를 염려하던 벨루카가 그녀의 얼굴을 연신 핥았다.
벨루카의 모습을 확인한 록사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벨…루카.”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신의 자세를 자각하며 록사나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몸에 흙이 묻어 있었지만 다행히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었다. 땅이 훅 꺼지며 어느 순간 한참 동안 흙더미를 굴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