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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79)화 (79/214)

79화 

“공작님의 식사는 잘 준비되었겠지?”

업무를 하면서는 아스테리온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있었는데, 아침과 점심을 어떻게 했는지 신경 쓰지 않은 게 걸렸다.

깨어났을 때 평상시와 다름없이 말짱해 보이기는 했지만 3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이린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 이야기를 하면 록사나가 공작을 더 신경 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야 어떠하든 숨길 수는 없었다.

이미 록사나는 아이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을 삼키며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주방에서 환자식으로 아침과 점심을 준비해 올렸는데, 반 접시도 안 드셨대요.”

못 드신 게 아니라 안 드신 거라고 의심하는 아이린은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록사나가 멈칫했다.

“저녁은?”

“환자식과 일반식 준비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쯤 올려 보냈을 거예요.”

“…그래.”

한 박자 늦게 록사나가 대답했다.

서재로 요청한 식사가 당도하고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옆에는 벨루카도 함께였다.

요리는 주방장 니아가 평소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인 듯 하나하나가 입에 착착 붙으며 정말 맛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얼마 후, 주방 소속 카타리나가 빈 그릇들을 가져가기 위해 영주의 집무실에 왔다.

“카타리나, 공작님께서 저녁 식사는 잘하셨니?”

“그게 드시긴 하셨는데요. 입에 안 맞으시는지 스테이크랑 샐러드만 조금 드시고 다른 건 아예 손도 안 대셨어요.”

록사나의 질문에 카타리나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수고해.”

카타리나가 그릇을 수거해 나가자, 아이린이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 저녁 완전 맛있었는데요.”

“맞아.”

제국에서 손꼽히는 요리사가 만든 공작가에서 먹었던 음식들 못지않게 정말 맛있었다고 생각하는 록사나였다.

다시 펜을 든 록사나가 업무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돌연 록사나가 펜을 내려놓았다.

입맛에 안 맞아 하시는 것 같다는 카타리나의 말과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식사를 못 한 것 같은 아스테리온이 자꾸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고생했어.”

“영주님도요.”

아이린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록사나는 벨루카를 데리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평소의 일정대로라면 키얀에게 개인 과외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밀려서 며칠간 쉬기로 한 상태였다.

“영주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록사나의 등장에 한창 주방 마무리를 지휘하고 있던 니아가 다가왔다.

“아니에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들 마무리하고 들어가요.”

“네, 알겠습니다.”

록사나의 독촉 아닌 독촉에 고용인들이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썰물처럼 주방을 빠져나갔다.

영주님이 혼자 뭔가 하시려고 하나 보다 생각하며 편하게 하시라고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뭘 만들어 줘야 입맛이 돌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록사나가 주방 사람들의 바람대로 주방을 종횡무진하며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다 만든 음식을 널따란 쟁반에 담아 들고 아스테리온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이동식 카트를 쓰면 편했지만 음식을 올리고 내리고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한 그사이에 음식이 식을 걸 염려했기에 쟁반을 활용했다.

그녀의 뒤를 은빛 털북숭이 벨루카가 쫄래쫄래 따라갔다.

문 앞에 다다른 록사나가 잠시 고민했다. 무거운 쟁반을 들고 있어 노크를 할 수가 없었다.

“아우울!”

벨루카가 짧은 울음과 함께 앞발로 문을 벅벅 긁어 댔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렸다.

록사나를 마주 본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드러났다.

“받아요.”

민망함을 숨기려 록사나가 대뜸 쟁반을 그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쟁반을 받아 든 아스테리온이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록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 일을 다 마친 록사나가 몸을 휙 돌렸다.

“록사나.”

아스테리온이 앞으로 문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우뚝.

서둘러 자리를 뜨려던 록사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몸을 반쯤 돌려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바라봐 주자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신의 말을 기다리던 록사나가 다시 등을 돌릴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아스테리온이 겨우 입을 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천만에요.”

“그리고… 같이 먹어 주면 안 될까? 혼자 먹기 외로워서…….”

아스테리온은 용기를 내 자신의 운을 한 번 더 시험하기로 했다.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눈이 전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무슨 개수작이냐고 따졌을 텐데…….’

커다란 덩치에 축 처진 어깨를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더군다나 음식을 건네준 건 자신이었다.

“안 돼요.”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아스테리온의 눈꼬리가 아래로 향했다.

“1인분만 만든 거예요. 그리고 나는 배 안 고파요.”

“그렇군…….”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록사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대신 차를 가져올게요. 먼저 들어가서 기다려요.”

“응.”

그녀의 말 한마디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생기가 화악 돌았다.

안 들어가고 뭐 하냐는 듯 록사나가 눈짓하자, 아스테리온이 주춤주춤 문을 넘으며 뒤를 자꾸 돌아보았다.

록사나가 차를 가지러 떠나고, 그 뒤를 호위처럼 벨루카가 따랐다.

아스테리온이 겨우 걸음을 옮겨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렸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익숙한 음식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아스테리온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자제했다.

깨어난 후 입맛이 없어서 그런지 배고프지도 않아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다.

그런데…….

꼬르륵. 얌전하던 그의 배가 신호를 보내오며 몹시 허기가 졌다.

그의 입가가 절로 위로 향하며 자꾸 헤실헤실 풀어졌다.

록사나가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이 아님을 아스테리온도 잘 알았다.

아마도 연민 비슷한 감정으로 그를 챙기는 걸 거다. 그녀가 아이린을 거둬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너무나 좋았다. 아주 작은 불씨가 생긴 것 같았다.

잠시 후, 록사나가 티 포트를 들고 돌아왔다.

“안 먹고 뭐 해요?”

그녀는 음식을 식히고 있는 아스테리온을 타박했다.

“응. 이제 먹으려고.”

아스테리온이 음식이 담긴 그릇의 뚜껑을 허겁지겁 열었다.

고소한 크림수프와 신선한 샐러드, 촙스테이크까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해 준 요리였다.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식사 못 했다면서요. 아프고 난 뒤로 입맛이 없는 거 같아서 만든 거예요. 저번에 맛있게 먹었잖아요.”

곁눈질로 그를 쳐다본 록사나가 입을 말했다.

“응, 맛있어.”

아스테리온이 스푼을 들었다.

‘그 말은 한 입이라도 뜨고 해요.’

록사나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벨루카를 위해 함께 챙겨 온 야식거리를 탁자 위에 놓아 주었다.

벨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간식을 먹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차를 우려 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중간중간 아스테리온을 보니 황홀한 표정으로 정성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크림수프가 싹싹 비워지고, 샐러드와 촙스테이크까지 한 조각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저 덩치에 새 모이만큼 먹었으니 엄청 배고팠겠지.’

아스테리온은 음식이 줄어들 때마다 더없이 행복하면서도 우울해졌다.

이 음식을 다 비우면 그녀도 자리를 뜰 테니까.

아무리 속도를 최대한 늦추며 먹어도 아쉬움의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그의 코끝에 새로운 차향이 스쳤다. 기대감에 그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숙면에 좋은 캐모마일 차예요.”

록사나가 찻잔을 아스테리온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짙은 청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지만, 그의 시선을 외면한 록사나는 보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은 잠시간 유예된 이별에 소중한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록사나와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니 심장 한구석이 아려 왔다.

* * *

아스테리온이 새벽 연무장에 다시 등장하자,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들떠 있었다.

소드 마스터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들도 공작이 아팠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소드 마스터도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동질감을 새삼스레 느꼈기에 더욱 친근감이 솟아났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새벽 훈련이 끝나자마자, 어린 훈련생들이 우르르 연무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들 오렴.”

활기차게 인사하는 아이들을 향해 연무장 안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로사 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로사 경, 경이 허락한다면 훈련생들의 대련 상대를 하고 싶은데.”

“훈련생이라면…….”

로사 경이 성인부 훈련생과 미성년 훈련생들을 번갈아 살폈다.

“양쪽 다.”

“아이들도요?”

로사 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

“환영입니다!”

로사 경이 환하게 웃으며 호쾌하게 승낙했다.

하늘과 땅 차이의 실력이지만 소드 마스터와의 대련은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신나는 추억이자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로사 경이 훈련생들을 모아 놓고 오늘은 한 명씩 돌아가며 소드 마스터인 카일라니 공작과 대련을 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니 다들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호승심이 많은 키얀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술 실력이 낮아서 그렇지 훈련생 중 힘으로는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또한 키얀은 근 며칠간 아스테리온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공작 때문에 록사나와 함께하는 수업을 며칠씩이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수업을 할 때 록사나의 방문 앞에 공작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를 반쯤 놀리는 마음으로 아양을 부렸는데, 아프다는 것으로 복수를 할 줄이야!

카일라니 공작은 참으로 무서운 자였다.

‘두고 봐. 내 실력을 보여 주지!’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키얀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몸을 풀며 키얀이 카일라니 공작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공작은 미성년 훈련생들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목검을 든 아이들의 자세와 허점을 짚어 주면서 그 역시 목검으로 아이들의 검을 맞받아 주었다. 아이들의 눈빛이 더없이 초롱초롱 빛났다.

어른들보다 체력이 떨어지고, 이제 막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미성년 훈련생과의 대련은 금방 끝났다.

뒤를 이어 성인부 훈련생과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키얀 역시 성인부에 속해 있었다.

다른 훈련생들이 모두 대련을 마치고, 드디어 키얀이 마지막으로 아스테리온과 목검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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