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옆으로 누워 자는 버릇은 여전하네.’
아스테리온이 손을 뻗어 록사나의 얼굴을 가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록사나의 얼굴 한쪽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볼록하게 솟은 이마와 앙증맞게 솟은 코를 지나서 도톰한 아랫입술과 부드러운 뺨을 차례대로 쓸어내렸다.
꿈속인데도 부드러운 살결과 따스한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져 그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였다.
아스테리온이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좋다.’
꿈이지만 정말 좋았다. 그의 입술에 와 닿는 느낌마저 현실 같아 심장을 간질여 댔다.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아스테리온은 록사나를 자신으로 품 안에 끌어안으며 한참 동안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고, 꿈이니까 더 실컷 보고 싶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이렇게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몽롱하던 아스테리온의 눈이 몇 번 깜박임을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스르륵 감기었다.
간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이 그를 숙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 * *
움찔.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록사나의 눈가를 찔러 댔다.
밝은 빛을 느낀 록사나가 눈꺼풀을 움찔거리며 눈을 살짝 떴다가 감기를 반복했다.
너무 편안하고 따뜻해서 침대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마침 따뜻한 인형도 옆에 있으니 더욱 그랬다.
록사나는 자신의 손에 닿는 인형을 바짝 끌어안았다.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따뜻해……. 그런데 나 인형이 없는데……?’
비몽사몽 그녀의 정신이 왔다 갔다 했다. 잠결에 그녀가 인형을 더듬거렸다.
“윽!”
외마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록사나가 눈을 번쩍 떴다. 드넓은 하늘과 바다를 닮은 두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눈동자의 주인을 잘 알았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그녀가 여러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으면 사라졌다가 눈을 뜨면 나타나고, 다시 해도 사라졌다 나타나고…….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눈을 감았다가 떠도 나는 사라지지 않아.”
붉은 입술이 열리며 따스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록사나가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이번에는 눈을 비볐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나머지 손마저 붙잡았다.
“자꾸 그렇게 비비면 예쁜 눈 상해.”
새로 붙잡은 작은 손을 입가로 가져가 쪽 하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록사나가 눈동자만 스르르 옆으로 굴렸다가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녀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왜 내 옆에서 자고 있어요?”
“음, 나도 자고 있었는데 당신이 옆에 있어서?”
“여기 내 침실이 아닌 거 같아요.”
“응, 그런 거 같아.”
“왜 우리가 한 침대에 있어요?”
“글쎄?”
공을 주고받듯 두 사람이 계속 소곤거렸다.
“…….”
록사나가 말을 멈추고 최근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나 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은 록사나의 방문 앞에서 소리 죽여 오열하던 것이었다.
그 뒤의 기억은 희미했다. 그저 자신이 머무는 방까지 겨우 돌아왔다는 것과 방에 들어선 이후의 기억은 완전 뚝 끊어져 있었다.
이후에 아스테리온이 눈을 뜬 건 방금 전 록사나가 그의 품에 파고들 때였다.
또한 꿈속에서 그녀와 만난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였다.
록사나가 생각을 모두 마쳤는지 내리떴던 그녀의 속눈썹이 들렸다.
“나는 간호를 하고 있었어요.”
“누구를?”
아스테리온의 파란 눈이 번뜩이며 한기를 품었다.
록사나의 입술이 금붕어처럼 벙긋거렸다.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다.
‘이 사람, 자신이 아팠다는 걸 모르는 거야? 설마, 혹시 기억에 이상이 생긴 건가?’
왜 있잖은가. 고열에 시달리거나 심하게 아프고 난 후에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는 사람들 말이다.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에게 붙잡혔던 손 중 하나를 빼냈다. 힘을 주고 있었던 게 아닌지라 실랑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록사나가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제처럼 차갑지 않았고, 적당한 체온이 느껴졌다.
“정상인 거 같은데……?”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스테리온이 참지 못하고 작은 손을 붙잡아 내렸다.
아스테리온에게는 더 급한 게 있었다.
“그래서 누군데? 당신이 간호했다는 놈!”
그의 목소리에 잔뜩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놈 당신인데요.”
“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테리온이 반문했다.
“방금 들었잖아요. 내가 간호한 사람, 당신이라고요.”
“난 아픈 적 없어. 소드 마스터를 뭘로 보는 거야?”
자랑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소드 마스터도 사람이죠.”
“맞는 말이긴 한데…….”
어느새 그녀의 양손을 그러쥔 아스테리온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록사나가 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못 믿겠으면 증인을 불러 줄게요. 안드레아스, 캘빈, 애슐리, 그리고 당신 방 담당하는 샐리까지. 아, 벨루카도 있어요.”
“아우울~”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들의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벨루카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바로 코앞에서 아스테리온을 째려보고는 등을 휙 돌려 록사나의 품을 파고들었다.
꼬리까지 열심히 흔들었는데, 그때마다 아스테리온의 뺨에 줄따귀를 날려 댔다. 표정이 썩어 간 아스테리온이 몸을 뒤로 물렸다.
벨루카를 품에 안고 록사나가 이때다 싶어 냉큼 몸을 일으켰다.
병간호 중이던 자신이 어쩌다 전 남편과 한 침대에 눕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벨루카, 고마워.’
다행스럽게도 벨루카 덕분에 민망함이 아주 많이 상쇄되었다. 그리고 붉어졌을 얼굴을 벨루카의 몸을 끌어안으며 가렸다.
록사나를 따라 몸을 일으킨 아스테리온이 침대 주변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아팠었던 건가?”
협탁에 대야와 물수건 등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기억 안 나요?”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록사나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어제 방까지 들어왔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나.”
“어제가 아니라 3일 만에 깨어났어요.”
“뭐?”
놀란 표정으로 아스테리온의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몸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아프다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몸 상태는 최상인데.”
“그렇겠죠. 당신 몸이 하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벨루카가 힘 좀 썼어요. 약도 안 듣고, 정말 벨루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요.”
“아울, 아우울~”
벨루카가 맞다는 듯 당당하게 하울링을 했다.
사실 자신은 정령의 힘만 살짝 빌려주고 록사나가 애를 많이 썼지만, 얄미운 저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군.”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안드레아스가 들어왔다.
“각하! 깨어나셨군요.”
날 듯이 침대로 다가온 안드레아스가 주군의 몸을 껴안으려 하자, 아스테리온이 굳은 얼굴로 살짝 비켜서며 그를 밀어냈다.
“정말 큰일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주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드레아스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남작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록사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안드레아스.”
재차 감사 인사를 할 것처럼 보이자, 록사나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아, 죄송합니다.”
“먹을 걸 올려 보내라고 할게요.”
“네…….”
록사나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안드레아스가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테리온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를 붙들 명분이 없어 주춤거렸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아, 다행이다.’
방을 나선 록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모면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록사나와 벨루카가 나간 방 안에 아스테리온과 안드레아스가 마주했다.
안드레아스는 그의 주군이 쓰러져 있던 지난 3일간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도 한낱 인간이었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맞습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각하께서는 인간이시죠.”
안드레아스의 말보다 소드 마스터도 인간이라던 록사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을 걱정하던 음성과 표정, 한 침대 위에 누워 있게 된 상황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던 모습들.
그녀의 걱정이, 행동들이 단비가 되어 황폐해진 그의 메마른 가슴을 적셨다.
록사나의 방에 어린 수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또 치유되고, 살아갈 희망이 생기는군.’
그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록사나를 떠올리자 심장이 찌르르 떨려 왔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각하, 어디가 또 아프십니까?”
그의 행동을 본 안드레아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야.”
“휴, 다행입니다.”
아스테리온은 절대 쓰러지면 안 되는 존재였다.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황실과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는 귀족들과는 달리 제국민들에게 기둥 같은 존재였다.
“각하께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트레버가 캠든으로 오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안드레아스가 화제를 돌리며 카일라니 공작가와 레드포드 영지, 최근 제국의 근황 등에 대해서 세세하게 보고를 이어 나갔다.
* * *
오전부터 업무에 복귀한 록사나는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3일 동안 록사나를 대신해 아이린과 프레드릭이 업무를 처리하기는 했었지만 그녀가 최종 검토해야 하는 서류들이 어마어마했다.
점심도 대충 간식거리로 때우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일이 밀릴수록 영지 재정비 사업은 지체될 테니까.
조금씩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영주님,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아, 벌써 그렇게 됐니?”
아이린의 말에 록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