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내 마음을 눈치채셨구나.’
록사나를 향한 자신의 속마음을 어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눈치챌 수 있었던 순간은 공작가에 도착한 록사나와 인사를 나눌 때뿐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제야 엘리노어와 데미안이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아스테리온. 내 친우에게 예전에 약속했었단다. 두 사람의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잘 지켜 주겠다고 말이다.”
아벨리오 남작 부부를 떠올리는 엘리노어의 표정에는 그리움이 아련히 묻어났다. 그건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록사나의 부모는 친우이자 그들에게 은인이기도 했다.
응접실을 나온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약혼이란 걸 한 자신의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내가 조금만 더 약혼을 미뤘었더라면 괜찮았을까?’
지금에 와서는 전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록사나와 재회하고 앞으로 공작가에서 살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무겁게 박혔다.
【 조금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자신이 록사나에게 살갑게 굴거나 자주 함께하게 된다면 사교계와 적들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부모님의 당부처럼 록사나와의 접점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마음먹은 것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어느 날 밤, 후원에 쪼그려 앉아 노랗게 핀 달맞이꽃을 보고 있는 록사나를 발견했다.
다음 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어린 소녀는 혼자 밤마다 후원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소녀의 행동은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자, 강제로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달맞이꽃이 다 졌기 때문이다.
꽃이 다 진 화단 앞에서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녀는 소리 죽여 울었다.
아스테리온은 태어나 처음으로 무기력감을 느꼈다. 다가가 소녀의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스테리온은 소녀가 좋아하는 달맞이꽃을 사계절 내내 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달맞이꽃을 록사나의 방 창가에, 혹은 머리맡에 몰래 놓아둔 것은.
수도의 달맞이꽃이 모두 진 계절에는 늦게까지 달맞이꽃이 피는 먼 남부에서 구해 와 보존 마법을 걸었다.
부디 상실의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않기를… 조금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작은 바람이 닿은 듯 소녀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가끔씩 얼굴에서 웃음 비슷한 것도 피어났다.
달맞이꽃 선물은 소녀가 여인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 *
“뭐라고요?”
록사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었다.
“각하께서 많이 아프십니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제2 보좌관 안드레아스 버논이 침잠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자신도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아벨리오 남작처럼 믿기 어려워했을 거다. 소드 마스터는 강건한 육체를 지녀 잔병치레가 없다.
그런데 진짜로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지금 침실에 몸져누워 있었다.
며칠 전 캠든에 도착한 안드레아스는 캠든 영지에서 진행되는 영지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레드포드 영지에서 벌일 각종 사업에 대해 오늘 오전부터 논의하기로 공작과 일정을 잡았었다.
그런데 공작에게서 한 시간이 넘도록 기별이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공작의 방을 찾았다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불성이 된 아스테리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허겁지겁 의원과 약제사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하고 약을 처방받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는 답변만 들었다. 몇 시간째 차도가 전혀 없었다.
옆에서 공작을 간호하던 안드레아스는 공작이 무의식중에 아벨리오 남작의 이름을 말하는 걸 주워들었다.
공작이 아픈 데에는 아무래도 록사나와 깊게 연관이 있어 보였다.
이에 안드레아스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마음의 병.’
그 결과, 트레버 못지않게 충실한 수하인 안드레아스가 록사나의 집무실을 부리나케 찾아온 것이다.
“정말인가 보군요.”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록사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린, 지금 당장 공작님 방으로 애슐리와 캘빈을 불러 줘.”
“의원과 약제사라면 오전에 다녀갔습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록사나의 뒤를 안드레아스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를게요.”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온 아이린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전에 말했다.
아스테리온이 머무는 방 앞에 도착한 록사나는 노크도 없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응접실을 가로질러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다가가자 간간이 신음 소리를 내뱉는 아스테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록사나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아스테리온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왜 이렇게 차가워!’
입술은 파리했고, 손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옆을 보니 다 식은 물이 담긴 대야와 푹 젖은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물하고 수건이 필요해요.”
“예!”
안드레아스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아쉬운 대로 록사나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식은땀에 젖은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왜 아파요? 한 번도 안 아프던 사람이…….’
록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스테리온은 카일라니 공작가 일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캠든 영지에 머물며 너무 무리를 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파파베르 사건을 자신의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던 건지도 몰랐다.
가슴 한구석이 철렁하며 덜컥 겁이 났다.
‘이 사람도 떠나면 어떡하지?!’
서로 이혼한 부부 사이라지만 자신도 모르게 아스테리온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그가 강인한 소드 마스터인 걸 알지만, 아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자꾸만 약해졌다.
부모님처럼, 선대 공작 부인 엘리노어처럼 그가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갑작스레 아프니 더욱 그랬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워 가려고 할 때 안드레아스와 샐리가 들어왔다.
샐리가 이동식 카트 위에 챙겨 온 대야와 수건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재빨리 내려놓았다.
“내가 할게.”
“네, 영주님.”
샐리가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록사나가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 마른 수건을 푹 담갔다.
물이 많이 뜨거워 록사나의 두 손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의 물기를 꾹 짜내었다.
록사나는 그 수건으로 아스테리온의 얼굴과 목, 손 등을 닦아 주며 말했다.
“샐리,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어 줘. 그리고 새 침구도 부탁해.”
“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아스테리온의 체온이 낮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수건을 따뜻하게 적신 록사나가 이불을 젖히고 아스테리온의 상체를 닦아 주었다.
한겨울에도 상의를 걸치지 않고 자는 그의 습관 덕분에 옷을 따로 벗길 일은 없었다.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등을 닦기 위해 움직이자 안드레아스가 다가와 거들었다.
물이 식으면 다시 뜨거운 물로 교체하며 땀으로 범벅이 된 아스테리온의 몸을 닦아 주었다.
어느새 록사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신의 소맷부리로 땀을 훔친 그녀가 안드레아스에게 부탁을 했다.
“각하께서 새로 갈아입으실 옷을 챙겨 주세요.”
“물론입니다.”
새 잠옷으로 갈아입히자마자, 애슐리와 캘빈이 방에 들어와 카일라니 공작을 다시 진찰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공작님께서 아프신 원인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캘빈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환자가 아픈 상황에서 이런 말은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의원으로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부상당한 것도 아닌데 아픈 소드 마스터를 진료해 보는 건 처음이라 참으로 난감했다.
“저, 제가 생각하기에는 마음의 병이 아니실까 싶어요.”
약제사이자 캘빈의 아내인 애슐리가 말했다.
“마음의 병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공작가의 주치의에 크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캘빈과 애슐리의 실력은 뛰어났다.
“네. 오전에 공작님을 진찰한 후 캘빈과 제가 공작님께서 보이시는 증상들을 토대로 의학 서적들을 살펴봤어요. 몸살감기 증상하고 비슷한데, 소드 마스터인 공작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마음의 병이 아닐까 짐작했어요.”
옆에서 안드레아스가 애슐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음의 병…….”
혼잣말하듯 록사나가 읊조렸다.
고개를 돌려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음 방에 들어서서 봤을 때보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뭘까…….’
자신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얼토당토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아파하는 것이라면 이혼한 그 순간 앓아누워야 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잠시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아스테리온과 자신은 이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아파하고, 빨리 일어나. 그게 당신다워.’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눈가에 닿은 금발을 부드럽게 뒤로 쓸어 넘겼다.
* * *
꿈인가.
고요한 밤하늘을 닮은 검은 실타래가 그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아스테리온의 몽롱한 시선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발견한 그는 다른 손을 뻗어 밤의 자락을 걷어 냈다.
그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그리운 이의 말간 얼굴이 드러나자,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수줍게 피어났다.
살포시 감긴 검은 속눈썹을 보며 조심스럽게 록사나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움찔거렸다.
아스테리온이 숨을 멈췄다. 더 이상 미동이 없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왜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지?’
문득 록사나가 침대에 상체만 걸친 채 엎드려 자고 있다는 걸 인지한 아스테리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마 위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툭 하고 이불 위로 떨어졌다.
록사나에게 막 손을 뻗으려던 아스테리온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물수건을 침대 밖으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록사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자신의 옆에 반듯하게 눕혔다. 이불도 끌어다가 덮어 주고, 자신도 그 옆에 몸을 뉘였다.
거의 동시에 록사나가 잠결에 뒤척이며 그가 있는 방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로 마주 본 자세가 되자,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위로 쓰윽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