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입에 있는 거 다 삼키고 말해야지, 키얀.”
그러자 키얀이 안에 있는 쿠키를 꿀떡 삼켰다.
“응.”
“그렇다고 그렇게 급하게 먹지는 말고. 체하면 어쩌려고.”
록사나가 수건을 꺼내 들자, 키얀이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손이 닿기 편하게 자신의 고개를 돌렸다.
키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내 주며 혼잣말을 하듯 록사나가 중얼거렸다.
“다른 건 곧잘 하면서 쿠키를 먹을 때 입가에 묻히고 먹는 건 왜 안 고쳐지는지…….”
그 순간 키얀의 파란 눈동자가 옆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하지만 록사나는 이를 보지 못했다.
“자, 다 됐다. 쿠키만 먹지 말고 목마르니까 우유도 좀 마셔.”
“응.”
키얀이 우유가 든 잔을 들어 벌컥벌컥 두어 모금 마시다가 슬그머니 소리를 죽여 얌전하게 마셨다.
“풋!”
키얀의 행동에 록사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매일 저녁 한 시간 정도 짬을 내어 키얀에게 인간 사회에서의 예절 교육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첫 번째로 가르친 건 존댓말이었다.
록사나는 키얀에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녀뿐만 아니라, 연장자나 상사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대신에 록사나와 아이린만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다.
로사 경의 도움 덕분에 키얀의 존댓말 실력은 나날이 늘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아이린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키얀은 그녀를 가르칠 때와는 조금 다른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했다.
이종족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록사나는 기본 예절 교육과 함께 역사에 대한 부분을 키얀에게 따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학교 성인반에서 글과 함께 역사도 간간이 가르치기는 했지만, 키얀과 다른 학생들과의 배경 지식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자, 오늘부터는 대륙과 리온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 볼까?”
“응, 선생님.”
다시 학생이 된 키얀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반면에 배부르게 간식을 먹은 벨루카는 푹신한 쿠션을 턱 밑에 괴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졸린 모양이었다.
록사나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키얀의 표정이 갈수록 몽롱해졌다.
한창 설명을 이어 가던 록사나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기습 질문을 던졌다.
“키얀, 리온 제국의 현 황제 이름이 뭐라고?”
“알프레드 마르퀴스.”
“그럼 승하한 황후는 어느 나라 출신이라고 했지?”
“몬타나 왕국.”
“몬타나 왕국은 어디에 있어?”
“리온 제국의 동남쪽.”
질문에 전혀 막힘없이 대답하는 키얀이었다.
‘음? 분명 딴생각을 하는 거 같았는데 잘 듣고 있었잖아?!’
저녁 식사 이후 시간에 피곤하지 않느냐고 처음에 물었던 것도 수업 시간마다 키얀이 멍한 표정을 자주 지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록사나의 질문이 이어지지 않자 키얀이 파란 눈을 반짝였다.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록사나가 손을 뻗어 키얀의 까만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키얀이 기분 좋다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살짝 내리뜬 키얀의 파란 눈동자가 날카롭게 문 쪽으로 향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록사나는 수업을 계속 이어 갔다.
* * *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춘 아스테리온이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며 피를 내었지만 그는 그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방 안쪽에서 록사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응답하는 어린 수인의 목소리도.
아스테리온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똬리를 틀었다.
심장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아팠지만, 차마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두 눈에는 열이 차오르는데 온몸의 피가 말라 버린 듯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아스테리온은 덫에 걸린 듯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밑바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심장은 쿵 하고 자꾸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은 암흑이 그의 심장을 받아먹기 위해 바닥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어린 키얀을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질투심에 휩싸였다.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자꾸만 치솟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한껏 조소를 퍼부었다. 그럼에도 저열함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수인족들은 인간과 다르게 빠른 시간 안에 성장하며 성년에 이른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록사나를 담은 키얀의 성장 가능성은 눈부셨다.
그래서 두려웠다. 카얀이 성장한 후, 록사나의 시선이 그리로 향할까 봐.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눈길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순수한지를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한껏 받으며 무시할 때는 언제고.’
복도의 창을 통해 넘어온 달빛이 아스테리온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었다.
아스테리온의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아아.’
상상만으로도 그의 세상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아스테리온의 무릎이 순식간에 꺾였다.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 앞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이미 자격을 박탈당한 자신은 감히 다시 꿈꾸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아스테리온은 포기할 수 없었다.
* * *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제국력 890년 8월.
챙챙.
카일라니 공작가의 기사단 연무장에서는 기사들의 대련과 훈련이 한창이었다.
그 속에는 소공작 아스테리온도 함께였다.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아스테리온이 다수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드 익스퍼트 중·상급의 기사들이었다. 아스테리온을 둘러싸고 있던 여섯 명의 기사들이 검기를 발산하며 동시에 짓쳐 들어갔다.
“하앗!”
매서운 칼날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순식간에 아스테리온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을 깜박거리기도 전에 아스테리온의 검에 기사들의 칼날이 차례대로 부러졌다.
푹!
부러진 여섯 개의 검날이 거의 시간 차 없이 땅속 깊이 박혔다.
완벽한 합으로 이루어진 협공을 펼쳐 냈다 자신했던 기사들의 몸이 일순간에 굳었다.
그들의 표정이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반면에 아스테리온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의 검은 발도된 적도 없다는 듯 검집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소공작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저희와의 대련을 단 일 합 만에 끝내 버리시는 겁니까?”
한 기사가 나서며, 불만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투덜거렸다.
본디 대련의 목적은 서로의 실력 향상과 한 수 아래인 자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 일 합 만에 끝나 버렸으니 다른 기사들도 소공작이 그들을 상대할 마음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전의 기사들과의 대련에서는 제법 공방을 주고받으며 검을 이끌어 주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라 내가 마음이 좀 급했었군.”
“아, 공작 부인께서 오늘 귀환하시는군요.”
그제야 기사들이 몇 주 전에 여행을 떠났었던 공작 부인을 떠올렸다.
소공작이 어머니를 마중하려는데 대련 시간과 좀 겹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였다.
“도련님, 곧 마님께서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아스테리온이 시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쯤 오셨지?”
“대문을 통과하셨다고 합니다.”
“서둘러야겠군.”
“그럼, 들어가십시오.”
“다음에 다시 대련하도록 하지.”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아스테리온이 연무장을 떠났다.
땀 냄새를 지우고 어머니를 뵈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다. 지금은 씻을 시간이 없어졌다.
바로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저택 본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아스테리온이 막 본관 앞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 엘리노어 또한 마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어머…….”
어머니를 부르려던 소년의 목소리가 끊겼다.
엘리노어의 뒤로 작은 체구를 가진 한 사람이 따라 내렸다.
아스테리온의 하늘빛 두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밤하늘을 닮은 까만 머리카락에 녹음을 닮은 초록 빛깔의 눈을 가진 소녀였다.
지난 9개월 동안 자신의 마음을 간질이던 그 소녀.
“록사나?!”
아스테리온이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이름을 속삭이듯 불렀고 소녀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아름다운 두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소녀가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려 더 깊이 바라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생기 넘쳤던 빛은 사라지고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은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때였다.
“아스테리온, 이리 오렴.”
어머니 엘리노어가 마중 나온 아들을 발견했다.
“어머니, 잘 다녀오셨어요?”
아스테리온이 엘리노어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을 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 너도 잘 지냈지?”
“네, 어머니.”
엘리노어가 고개를 옆으로 내렸다.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록사나, 내 아들인 아스테리온 카일라니란다.”
이어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 이 아이는 내 친우의 딸인 록사나 아벨리오야. 앞으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낼 테니 서로 인사 나누렴.”
앞으로 함께 지낸다는 말과 친우의 딸이라는 사실에 몹시 궁금증이 일었지만 아스테리온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야.”
아스테리온이 살짝 상체를 굽히며 한 손을 내밀었다.
록사나가 어두운 낯빛으로 엘리노어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엘리노어가 괜찮다는 듯 감싸 안은 록사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록사나가 힐끗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왼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아스테리온이 손등에 입맞춤을 하자 록사나가 후다닥 제 손을 거둬들였다.
잔뜩 경계심을 품은 록사나의 모습에 아스테리온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재회하게 되길 바랐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스테리온의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그날 저녁, 어머니 엘리노어에게서 록사나의 사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아스테리온, 너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걸 잊지 말렴. 혹여 만에 하나라도 록사나가 약혼 상태인 너와 연관되는 건 좋지 않을 듯싶구나.”
“그건 나도 네 어머니 말에 동의한다.”
아버지 데미안까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바라보는 엘리노어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